인간·사회

개미와 베짱이

아이루다 2014. 9. 28. 09:10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다. 워낙 유명한 동화라서 아마도 거의 모든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동화에서 개미는 다가올 추운 겨울을 대비해서 봄/여름/가을 동안 열심히 일을 하는 존재로, 반대로 베짱이는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편하게 여름 내내 놀다가 결국 겨울에 굶어 죽게 생긴 역할을 맡는다.
 
물론 개미와 베짱이의 현대 버전도 다수 존재한다. 그 중에서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일만하고 사는 개미와 부자 집에서 태어나 평생 돈만 쓰는 베짱이 이야기를 다룬 슬픈 버전도 있다.
 
아무튼 개미와 베짱이의 삶은 우리가 주어진 삶에 대해 응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각각 의미한다.
 
하나는 바로 걱정을 받아들이고 그 걱정을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사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걱정을 최대한 무시하고 현재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개미와 베짱이가 각자 다른 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다면 이 동화는 단지 이 수준에서 머무르지만, 만약 이 둘이 공동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다면 이땐 문제가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이 둘은 겨울에 같은 창고에서 식량을 꺼내 먹게 될 텐데 그것을 채운 것은 오직 개미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서 매우 다른 전개를 보여 줄 수 있다. 그리고 주로 창고를 채운 개미의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첫 번째, 개미는 열심히 일했고 노는 베짱이가 무척 싫었다. 이 경우엔 둘은 심하게 싸우게 될 것이고 결국 공동 창고를 없애려고 할 것이다.
 
두 번째, 개미는 열심히 일하면서 옆에서 놀아주는 베짱이가 좋았다. 즉 베짱이는 일할 줄만 아는 개미에게 일상의 행복을 준 것이다. 이 경우는 요즘 우리 현대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말 그대로 노는 사람들이 그 노력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미들은 그들의 모습을 TV에서 보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베짱이들에게 돈을 지불한다. 이것은 좋은 상생의 관계이다.
 
세 번째, 개미는 노는 베짱이가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베짱이의 존재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베짱이를 보고 있으면 개미는 자신의 삶이 힘들어도 가치 있다고 느낀 것이다. 개미에게 있어서 베짱이는 의미 없이 살아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개미는 당장은 힘들지만 미래를 꿈꿀 수 있었고, 그 비교 대상엔 베짱이가 있었다.
 
네 번째. 개미는 자신들에게 닥칠 겨울이라는 고난을 진지하게 생각해서 실제로 베짱이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충분히 일하면 베짱이는 물론 여치나 메뚜기도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미는 오직 자신만을 보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베짱이는 그런 개미에게 가끔 힘 되는 말을 해주었다. 별 의미는 없지만.
 
다섯 번째. 개미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으로 인해서 결국 자신도 포기하고 베짱이와 같이 놀았다. 그러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 베짱이는 노는 시간을 줄이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개미는 깨달았다. 베짱이를 일하게 만드는 방법은 같이 노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섯 번째. 개미는 어느 날은 놀아주는 베짱이가 좋았지만, 힘든 날은 같이 일을 안 하는 베짱이가 너무 얄미웠다. 그래서 개미는 매일 매일 베짱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개미의 히스테리가 심해지자, 베짱이는 개미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자 베짱이는 놀면서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아마도 이 경우의 수는 우리 인간 사회 관계만큼이나 복잡하게 전개될 것이다. 심지어 신경쓰인다는 이유로 인해서 쓸모 없는 베짱이를 죽이는 개미도 나타날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어떤 공동의 문제에 마주쳤을 때, 각자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리고 세상엔 반드시 개미와 같은 사람이 있고 베짱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학창시절 '조별 과제'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것에 대해 많은 공감을 할 것이다. 보통 네 명 정도가 짝을 이뤄서 진행되는 조별 과제엔 분명히 열심히 하는 사람들과 모임에 잘 참가도 안하고 노력도 전혀 안 하는 존재가 꼭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걱정은 불행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된다. 그래서 누구도 걱정거리를 가지고 싶어하진 않는다. 결국 누구나 자신의 성격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은 회피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성격의 차이로 인해서 누군가는 더 많은 걱정으로 해야 하고 다른 누군가는 덜 걱정을 하고 산다.
 
이런 모습은 누군가는 열심히 해결을 하고 누군가는 최대한 회피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그 내부적으로는 모두 회피를 하려고 하지만, 성격으로 인해서 그 회피되는 정도의 차이가 심하게 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재미난 사실 하나는 바로 그 걱정을 최대한 회피하는 사람들이 밝게 세상을 산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밝은 성격으로 인해 놀기 위한 모임에서 꽤나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반대로 걱정을 잘 회피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기 쉬워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바로 밝게 세상을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걱정을 회피한 존재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경우에 그렇게 동작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기묘한 관계는 우리 사회에 명확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것을 꽤나 조심스럽게 숨긴다.
 
그리고 그 은밀한 비밀에는 이유가 있다.
 
원래 우리는 먹고 살기만 해도 힘든 존재였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잉여 시간이 늘기 시작했고, 우리는 일하는 시간보다 잉여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을 가늠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왔다. 실제로 현대에 있어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들은 스포츠, 연예인, 전자 제품 등등 시간을 보내는데 유용한 것들이 모두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일을 하긴 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의 일이 존재하고 같이 협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 누구나 놀고 싶어한다. 또한 같이 노는 것이 더 즐겁다. 그리고 노는 것에도 능력차이가 존재한다.
 
일도 잘하고 잘 노는 사람은 최고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일을 잘하거나 잘 놀거나 둘 다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역할이고, 누군가는 잘 놀아야 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는 잘 노는 사람이 더 행복하기 마련이다. 그럼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생산적으로 필수적인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덜 만족스럽게 된다. 반대로 잘 노는 사람은 훨씬 더 행복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누가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일의 가치를 높여주는 일이다. 우리는 그래서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은 점점 더 노동의 가치가 줄어드는 쪽으로 발전되고 있다. 즉, 우리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노동 시간이 점점 줄고 있다. 물론 그 속도는 무척 느리지만 말이다.
 
아무튼 어떤 사회가 되더라도 일을 하는 사람은 필요하고 잘 노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겉으로는 일의 가치를 존중해주면서 실제적으로는 노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들 스스로 이것을 절대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는 공식적으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람들은 세 가지로 분류가 된다. 하나는 개미처럼 일하는 존재, 두 번째는 베짱이처럼 놀고 싶으나 어쩔 수 없이 개미처럼 일하는 존재, 마지막은 베짱이처럼 노는 존재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은 개미들이 주로 하는데, 이런 개미를 다독이는 역할은 주로 두 번째에 속한 베짱이로 살고 싶은 개미들이다. 이들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매우 높기 때문에 이들의 의견이 보통 사회의 공식적 입장이 되기 쉽다.
 
이들은 베짱이처럼 대놓고 놀지 않으면서 개미가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베짱이를 꿈꾸지만, 공식적으로는 개미의 삶을 좀 더 낫다고 평가해주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개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이들 역시도 일을 안 하게 되면 세상이 결국 망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우리들은 이 사실을 절대로 밖으로 끄집어 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가치를 가지고 우울하게 살아가고, 노는 이들은 일한 이들이 해결한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또한 행복한 베짱이는 이것을 개미에게 나눠줌으로써 개미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일하는 것이 행복한 개미이겠지만.
 
개미의 사회적 역할은 바로 열심히 일을 해서 전체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반대로 베짱이의 역할은 자신의 행복을 나눠줌으로써 모두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잘 조화가 되면 매우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만 실제로 현실은 이렇게 좋지만은 않다.
 
보통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개미들은 점점 베짱이에게 큰 실망을 느끼고 거리를 두려고 하며,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뤄낸 것을 자신만 가지려는 탐욕을 갖게 된다. 또한 베짱이는 힘든 개미를 위해서 자신도 어떨 땐 일손을 도와야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절대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노동을 하지 않는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개미를 불쌍히 여긴다.
 
결국 이 둘의 관계는 극단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해가 없는 관계가 가져오는 종말인 셈이다.
 
특히 개미와 베짱이 중 문제를 발단시키는 존재는 개미보다는 베짱이일 가능성이 높다. 베짱이의 개미에 대한 태도가 개미의 분노를 일으키기 쉽고, 결국 개미는 마음을 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놀기 시작한 베짱이는 어떻게든 계속 놀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무리를 하게 된다. 동네에 홍수가 나서 둑이 넘쳐 누구나 나와서 일손을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노는 것이다.
 
베짱이는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베짱이가 놀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잉여 시간이 있을 때만으로 한정된다. 이것이 없어지는 순간 베짱이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 개미와 베짱이의 갈등 문제는 작게는 가정에서도 나타나고 모임, 회사, 국가, 국가 공동체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이 모이는 그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 이 문제는 구성원들의 자세와 리더의 역할로 인해 큰 차이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문명 사회가 붕괴되지 않는 한, 개미와 베짱이는 늘 존재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개미를 무시하지 않는 베짱이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베짱이를 좋아하는 개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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