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인간의 지능

아이루다 2014. 9. 7. 08:35

 
인간은 지능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능을 계측하여 수치화 시킬 수 있는 단위를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큐 혹은 지능 지수 라고 부르는 값인데, 이 값이 높을수록 지능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에 한번쯤 이 아이큐 테스트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이 수치는 학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대부분이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큐를 알고 있다.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한민국 평균 지능 지수가 100 안팎이라고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 평균치를 웃도는 IQ를 가진 것은 사실이나, 중학교 시절엔 87이 나와서 충격을 먹어 본 적도 있다. (친구가 알려줬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 나온 수치와 중학교에서 나온 수치를 비교해 보고는 더 이상 아이큐 테스트의 신뢰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큐는 통계치적인 의미는 존재한다. 그래서 아이큐 수치로 140정도의 이상 값을 가지면 보통 영재나 수재라고 보는 것이 대략 옳다. 그리고 150이 넘어서면서부터 천재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대로는 80이하로 떨어진 사람들은 조금 둔하거나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이들은 고등학교 교육 과정까지를 마칠 수는 있으나 제대로 이행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아이큐에 별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특별한 문제가 없다. 딱히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큐가 낮을 경우, 공부를 못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뒤떨어져 결국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물론 가난한 이들이 모두 아이큐가 낮은 게 아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아이큐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돈과 아이큐는 명백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상관성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머리가 좋으면 돈을 벌 확률은 늘어나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능력은 단지 아이큐, 즉 지적 능력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아이큐로 만으로 그 능력을 측정하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 지능 지수에 대해서 조금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간보다 하등 하다고 알고 있는 다른 동물의 지능이다. 물론 동물의 지능은 인간처럼 시험을 봐서 결정하지 못하기에 분명히 주관적인 면이 있다. 그럼에도 단순하게 수치화 시키면 특정 동물들 중에서는 인간의 지능 수준인 90정도 까지 오는 동물들도 있다.
 
머리가 좋은 동물로 알려진 종으로는, 돌고래/범 고래류, 코끼리, 침팬지/고릴라류, 개/돼지류, 까마귀 등등이다. 고양이는 인간 따위가 하는 검사는 받지 않아서 측정 불가라는 말도 있긴 하다.
 
그냥 편하게 생각해서 이들 아이큐가 70 정도 된다고 했을 때, 이들과 인간의 하위 그룹과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머리가 나쁘더라도 동물과는 완전히 다르게 산다. 인간은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옷을 벗고 다니지도 않고, 말을 못하지도 않는다. 똥/오줌을 못 가리거나 기타 동물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지적 능력이 비슷한 상황에서 동물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이 정말로 타고난 만물이 영장이라서 그런 것일까?
 
보통 개는 인간 아이의 3~4살 수준의 지능을 가졌다고 한다. 아이큐 검사를 못하니 그런 식의 표현이 좀 더 명확한 듯 하다. 머리가 아주 좋은 것으로 알려진 바다 포유류인 돌고래와 범고래는 정말로 사회성, 사냥 방식, 언어 능력 등등이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들은 인간 아이의 5~6살 수준까지도 될 듯 하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예전에 범고래가 얼음 조각 위에 올라 있는 물개를 잡기 위해서 여러 마리가 동시에 꼬리를 이용해 인공 파도를 만들어 내어 물개를 얼음조각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게 했던 놀라운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이들의 협동 능력과 물을 이용하는 창의적 아이디어는 정말로 흥미로웠다.
 
특히 인간에게 교육을 받은 1985년에 태어난 침팬지 팬배셔니와 오랑우탄 챈택은 훈련을 받아 인간의 단어 수천 개를 컴퓨터 합성 장치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실제로 인간과 토론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하니, 도대체 우리가 인간의 하등 동물로 여겨지는 동물은 생각보다 그리 만만한 상대들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똑똑한 인간은 동물의 지능에 비해서 상대가 안될 수준으로 높다. 하지만 우리의 평균 지능은 동물에 비해서 현저하게 높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뇌의 용량이 크고 이족 보행을 하며 손을 자유자제로 쓴다는 여러 가지 장점으로 인해 분명히 동물의 삶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단한 문명을 이루어 내긴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개미와 같다고도 볼 수 있다. 개미는 지능으로 보면 정말로 일반 포유류에 비하면 한없이 떨어지는 곤충이지만, 그들은 집단 생활을 통해 대단한 수준의 생존 능력을 보여준다. 그들은 심지어 버섯을 키우는 농업과 진딧물을 키우는 축산업도 하면서 대단히 정교하게 분업화 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 인간의 본질적 능력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말과 글을 통해 미래로 지식을 전달하고, 학교 등을 통해서 미래의 우리 자손을 교육 시킨다. 그리고 이것을 해내는 가장 큰 우리의 수단은 바로 언어 능력이다. 우리는 귀와 성대를 통해서 소리를 만들어 상대에게 전달하고 반대로 상대가 하는 말도 들어서 해석한다.
 
그리고 이런 인간 고유의 의사 전달 능력은(모든 동물은 각자들끼리 고유의 음역과 진동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정보를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전달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즉, 이 의미는 우리가 동물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상대적으로 뛰어난 지능과 함께 인간끼리만 이해 가능한 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에서 온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해도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면 그는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란 것을 유추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려서부터 문명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자라게 되면 일반적인 야생 동물처럼 살아가는 가장 명백한 이유가 된다. 우리 인간이, 우리가 정의하는 인간으로써 자라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가 어려서부터 받는 교육이란 점이란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을 데려다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이용해 교육을 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인간과 비슷한 삶을 경험시킬 수도 있다. 즉 그 순간 우리와 그들과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을 영화화한 작품이 바로 '혹성탈출' 이기도 하다. 그 영화에서는 어떤 이유로 인해 뛰어난 지능을 갖게 된 원숭이가 지구를 지배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인간의 문명 안에서 태어나서 교육받고 자란 거의 모든 인간은 누구나 인간 고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우리는 양손을 쓰고, 두 발로 걸으며, 도구를 이용한다. 그리고 우린 동물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즉, 우리는 누구나 인간인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며,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은 모두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인식한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글을 이해 못하는 거의 대부분의 동물들이 하등 하다고 여기면서 그들과 비교해 상대가 안될 정도로 대단한 문명을 이루어 낸 우리 자신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자부심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말 그대로 머리 속에 박혀 있다.
 
이 자부심은 우리 인간이 누구라도 인간이기만 하면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마치 우리는 모두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할 것처럼 스스로를 높게 여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꽤나 놀라운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우린 단지 인간의 모습을 가졌기에 위대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건 정말로 밑도 끝도 없는 자부심이란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한계를 갖는다. 인간과 동물은 나와 남처럼 차이가 난다. 남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써 대접할 수는 있지만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나는 살고 남이 죽어야 정상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동물을 생명으로써 대접하지만 우리와 동물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우리가 살고 동물이 죽어야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동물들보다 조금 잘났을 뿐이다. 우리는 몇 가지 인간만이 가진 특징을 잘 이용하여 지구라는 행성 내에서는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말을 이해 못하는 동물이 우습지만, 실제로 우리도 역시 동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동물을 우리를 비웃지 않는데, 우리는 동물을 우습게 본다.
 
우리 인간은 현재 지구상의 모든 자원을 우리 것으로 이용한다. 땅에 금을 그어 땅문서를 만든 후 거래를 하고, 땅이 파서 나오는 석유를 판다. 생명체를 즐거움을 위해 사냥을 하고, 우리가 먹기 위해서 엄청난 수의 가축을 정말로 참혹한 환경에서 키우기도 한다. 수백 년 된 숲을 벌목해서 집을 짓고, 수천 미터 깊이까지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
 
이 모든 것은 그 누구도 허락해주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 모든 것을 가진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인간 자부심이 자동으로 작용하는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냥 가진 것들에 대해서 고마워하지 않는다. 아니 고마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원래 그것들은 모두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믿으니까.
 
우리의 미래 세대는 아마도 우주 개척을 할 것이고, 그 때는 아마도 이 우주가 바로 인간의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다른 문명과 충돌이 나게 되면 그 소유권을 두고 피나는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지게 되어 멸종이 된다면, 그 최후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에게 무엇을 물어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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