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게이 이야기

아이루다 2014. 8. 6. 10:52

 
솔직히 말해서 게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삶을 잘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용어가 정확히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게이라는 단어는 동성을 좋아하는 남자의 의미로 알고 있고, 반대로 동성을 좋아하는 여자는 레즈비언이라고 칭한다가 내 상식 수준이다.
 
내가 좀 헷갈리는 부분은 소위 트랜스젠더라고 불리는 성전환자와 게이와의 관계이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보통 남성들 중에서 그 자신이 원래는 여성이라고 믿고 성전환을 하여 실제적으로 여성의 성을 가진 채 보통의 여자처럼 이성인 남자와 사랑하는 것을 트랜스젠더라고 하고 그냥 남성인 상태에서 동성인 남성을 사랑하는 것을 게이라고 하는 것 같다.
 
트랜스젠더, 게이, 레지비언 등의 조금 특별한 성에 대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는 보통 성 소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지만 각 나라의 입장에 따라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고 매우 심한 억압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을 가장 심하게 배격하는 사람들은 바로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신이 하나님이 정한 규칙을 위배했다는 것인데 뭐 이해는 간다.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성이 분명히 있고 자식을 낳으려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 하고 또한 여자는 여자의 역할인 임신과 출산을 담당해야 한다.
 
그래도 좀 웃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은 수정 시기엔 성 자체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가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난 후 성이 분화되어서 여성과 남성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어떤 성을 타고 났다는 것은 반드시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닌 셈이다. 우리는 단순히 성이 분화되는 시기에 우연에 의해서 결정되며 거기에 호르몬의 역할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21세기의 한국은 아직도 유교적 사고 방식이 좀 많이 작용하고 있는 나라라서 겉으로 보기엔 성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매우 엄격한 편이다. 대한민국의 그 많은 모텔들은 성업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근엄한 태도로 성을 바라보고 또한 비 정상적인 성적 특징에 대해서 꽤나 비판적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성 소수자 분들이 자신의 본질적 모습을 들어내는데 있어서 매우 두려움을 느낀다. 물론 홍석천씨나 하리수씨처럼 게이나 트랜스젠더라고 당당히 밝히면서 연예인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단지 그 이유로 인해 인터넷 상에서 어마어마한 악플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통은 개인이 쉽게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도 게이나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그리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냥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고 스스로 판단해서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진 모습이라면 그냥 인정할 뿐이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인 선호도에 의해서 카레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카레는 누군가에겐 맛있는 음식이고 최고의 음식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그 냄새와 맛을 싫어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카레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물론 내가 카레를 찬양하는 이를 보면 그것에 대한 반론을 할 수 있지만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나는 게이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비판하는 짓을 하면 안 된다. 이것이 중요하다.
 
아무튼 요즘은 그래도 나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이긴 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남성을 버린 남성에 대해서 꽤나 심한 분노를 들어낸다. 말 그대로 역겹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게이 중 누가 더 우리에게 문제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솔직히 나는 지금껏 살면서 단 한번도 게이를 직접 만나 본적이 없다. 물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했으니 없다고 봐야 옳다. 내가 아는 게이는 홍석천씨가 유일하다. 그런데 담배 피우는 사람은 매일 만난다. 그것도 길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그 연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사람은 어디든 있다.
 
누가 더 나에게 해로운지를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권리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 속해 있다. 그래서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한 행위를 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인정해줘야 한다. 물론 그것이 익숙지 않아서 스스로 보기에 민망하거나 말 그대로 역겨울 수는 있지만 그런 생각은 그냥 안에 담아 두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것을 못 참고 외부로 표출을 하고 증오를 들어내게 된다면 그것은 타인의 행복할 권리를 뺏는 일이다. 반대로 누군가 나에게 와서 당신의 얼굴은 나를 증오스럽게 만든다고 하면서 욕을 하고 때리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그 사람이 어떤 이유로 인해서 나의 얼굴을 보면 역겹다고 하는데 말이다.
 
보통 이런 말을 하면 게이를 싫어하는 이는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그것은 바로 그런 동성간의 결합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후대를 잇지 못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동성간의 결합이나 성전환자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꽤나 근거 있는 이야기이고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동성애의 문제점을 다른 각도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논리 싸움에서 지기 싫어서 그냥 끌어온 것인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같이 따져야 한다.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또한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부부들에게도 따져야 한다.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또한 아이를 하나만 낳아서 기르는 사람들에게도 따져야 한다. 왜 둘이서 결혼해놓고 하나만 낳냐고. 또한 둘을 낳아서 기르는 부부에게도 따져야 한다. 왜 더 늘리지 않고 그대로 둘만 낳아서 현상 유지만 하냐고.
 
그리고 셋을 낳아서 기르는 부부에게도 따져야 한다. 우리 부모 세대는 다섯에서 열 명 정도는 낳았는데 왜 거기에서 멈추냐고. 마지막으로 게이를 싫어하는 본인에게 물어봐야 한다. 도대체 결혼을 하면 몇 명을 낳을 것이냐고. 최소 5명을 낳을 생각이냐고 물어봐야 한다.
 
또한 이것에 더해서 한 가지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게이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게이가 될 생각이냐고 묻는 태도이다.
 
최근에 리처드 도킨스씨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가벼운 아동 성애자는 나쁘다. 폭력적인 아동 성애자는 더 나쁘다. 그런데 이 말을 그렇다면 당신은 가벼운 아동 성애자를 지지하는 입장이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들은 논리에 대해 더 배워야 한다고 언급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그가 예시에 아동 성애자를 들었다고 해서 많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태도이다. 실제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의 논리적 사고의 부족에 대해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보다 더 한 단계 낮은 영역에서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원래 그는 신을 부정해서 적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가 그냥 싫은 것뿐이다.
 
게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게이를 지지한다고 여겨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최악의 인지 부족을 들어내는 일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남성에게 있어서 게이가 늘어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다. 그것은 바로 여성을 차지하려는 경쟁자가 줄어드는 효과이며 두 명의 남성이 서로 좋아하게 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 남자 셋, 여자 셋이 있는 환경에서 게이 커플이 나타나면 남은 남자는 여자 셋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상황인가?
 
그런 의미에서 남자에게 있어서 게이의 존재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보다 훨씬 유익한 존재이다. 반대로 여자에게 있어서 게이는 문제점이 심각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게이를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보통 게이에 대한 분노는 남자들이 영역이다.
 
앞에서 말했듯 게이를 싫어하는 것은 그냥 카레나 기타 입맛에 맞지 않는 외국 음식을 싫어하는 것과 같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며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다 보면 어쩐지 좀 익숙해져서 나중에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싫다고 해서 그 음식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절대로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다.
 
이 말은 딱히 이해하고 좋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말고 안으로 숨겨 두라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고,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해서 관용적인 인간다운 태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적인 이야기만 하고 끝을 내겠다. 자연계에는 성 개체 수에 따라 자유롭게 성을 변환시키는 종이 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물고기와 개구리 종류 중에 그랬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유명했던 영화 '쥬라기 공원' 에서 언급되었던 기억이 난다.
 
또한 남성의 성을 결정하는 염색체인 'Y' 염색체는 각 세대로 내려갈수록 퇴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3억년 정도 후이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온다는 뜻이다. 물론 단지 'Y' 염색체로써만 성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니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우리가 그리 철석같이 믿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 세상엔 절대적이란 것은 없다. 무엇인가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면 먼저 자신을 의심해봐야 하는 것이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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