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정보 전달법

아이루다 2014. 7. 29. 08:53

 
혹시나 인간의 초기 언어를 연구할 기회가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국 말을 쓰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할 수 있는데 일단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그냥 웃을지도 모른다.
 
물론 인류 문명 초기의 인간의 언어는 현대 문명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한 환경이기 때문에 아마도 제대로 된 언어 생활을 했다고 해도 실제로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현격하게 차이가 날 것이 분명하다. 잠시만 생각해봐도 요즘 많이 쓰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컴퓨터, 자판, 핸드폰, 커피, 책, 영화, 가방 등등 이런 것들이 그 시대 존재했을 리가 없으니 당연히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언어 능력뿐만이 아닌, 단어 그 자체도 발달을 했을 것이며 그 결과가 바로 현대의 언어 능력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후손인 우리 현대인은 단지 그 단어의 수와 표현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했던 언어를 통해 의사를 주고 받는, 즉 정보 전달 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정보 전달 법 하나가 탄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문자이다. 언어에 대한 능력은 자연 동물계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지만 문자만큼은 인간이 유일하게 사용할 줄 안다.
 
문자의 유용성을 따지면 이것만 해도 논문 한 편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문자 자체보다 이 문자를 통한 정보 전달 법이 우리 현대인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써보도록 하겠다. 물론 이것은 전혀 근거를 보장할 수 없는 내용이긴 하다. 그래서 그냥 참고 삼아서 보면 될 듯 하다.
 
한 100년 전쯤에도 우리 인간은 편지와 전보 등을 통해 문자로 의사를 전달받을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편지는 한 20년 전만해도 꽤나 활성화 되어 있었지만 이메일과 그 후 나타난 휴대폰 문자 서비스에 밀려 지금은 청구서 통보용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측면으로 전화가 발명되어 얼굴은 못 봐도 목소리를 서로 주고 받는 기술도 탄생했다. 그리고 문자를 주고 받는 기술과 목소리를 주고 받는 기술은 같은 정보를 주고 받는 방식이긴 하지만 목적이 좀 달랐다.
 
편지나 전보, 이메일을 주고 받는 것은 보통 상대의 반응을 바로 확인을 할 필요가 없을 때 사용되기 때문에 일종의 비동기적 방식이라고 한다면 서로 만나거나 전화를 통해 말을 주고 받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가 그것에 거의 집중하고 있어야 하는 동기식 방법이었다.
 
그래서 문자를 이용한 정보 전달은 주로 중요한 정보나 틀리면 안 되는 정보를 전달하는데 우선적으로 쓰였고 현재도 업무나 고지서 등을 통보하는데 주로 활용되며, 반대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하는 정보는 주로 개인적 사생활을 주고 받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연예 편지와 같이 개인적인 정보를 편지나 메일을 통하기도 하고 빠른 정보 전달을 위하거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중요한 정보 전달 법으로 전화가 선호되기도 한다.
 
하지만 PC와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시작된 문자 서비스와 메신저 등과 같은 문자 채팅 서비스가 활성화 되면서 우리는 말을 통한 의사 전달과 문자를 통한 문자 전달의 간격을 급격히 줄여 버렸다.
 
즉, 이제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를 통해 말이 담당하던 영역을 어느 정도 대신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자를 이용한 대화법은 일단 좋은 점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화자의 입장에서 그 문자들을 나열하여 하나의 문맥을 완성할 때 그것에 담긴 다른 정보를 노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같은 말을 하더라도 정말로 좋아서 그러는 것인지, 빈정거리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무관심한데도 숨기는 것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인지, 싫은 것인지를 숨길 수 있다.
 
이 방식은 화자나 듣는 사람에게 모두 공통으로 인간과의 관계성 유지를 위해 매우 좋은 수단이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가 나를 귀찮아 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을 받으면 상처 입거나, 분노 하거나, 같이 싫어하게 된다. 그것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 때문인데, 그런 태도로 인해서 우리는 결국 관계가 단절되는 사태를 맞게 된다.

 

이것은 그 개인들에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싫으나 좋으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어떤 식으로든 이득이 올 수 있는 기회를 날려먹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서 말하는 것보다 전화상으로 통화를 하는 것보다 문자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감출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다.
 
그리고 글은 말처럼 생각과 동시에 내뱉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좋다. 우리는 [DEL] 키와 [<-] 키를 이용해서 글을 지울 수 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보내기까지는 잠시나마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화자 입장에서 말 실수를 줄이는 큰 역할을 한다.

 

또한 거기에 더해서 문자는 동시에 여러 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해줌으로써 결국엔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과거 우리가 서로 대면해서 만날 땐, 오직 그 사람에게만 자신의 시간을 써야 했지만 이제는 꼭 그럴 필요가 없다.

 

아무튼 이 문자를 통한 대화법은 이렇듯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관계의 부담감을 줄이고, 말 실수를 줄여주면서, 인간 관계의 범위를 넓히는데 뛰어난 역할을 하기에 우리가 선호하게 된다.
 
그런데 세상에 어떤 일이 장점만 존재하겠는가? 여기에도 역시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대화를 통할 때 전달되는 정보의 종류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알 수 있는 문제인데, 바로 그것은 우리가 귀를 통해 듣는 상대의 입에서 나오는 음파 이외에도 우리가 대화 속에서 얻는 부가적인 정보가 생각보다 매우 많다는 점이다.
 
그런 정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표정' 이다. 우리 인간은 삼천 개의 가량의 표정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표정은 어떤 경우엔 말의 뜻을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바꿀 수 도 있다. 짜증나는 표정의 '감사합니다' 라는 표정은 절대로 감사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반대로 웃는 표정으로 '미워 죽겠어' 라는 말 역시도 너를 좋아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두 번째 정보는 '어투' 이다. 우리는 모두 말의 어투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의 미묘한 차이는 그 말에 숨겨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것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사람마다 발달된 집중력과 언어 능력만큼 해석 가능하다.
 
세 번째는 동작과 같은 일명 '제스처'라고 불리는 것이다. 몸 동작은 우리의 표현을 부가적으로 구체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네 번째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아무튼 눈을 서로 마주한다든지, 온 몸에서 느껴지는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다. 이것은 네 가지 중 가장 미묘한데, 같은 말이라도 눈을 서로 마주보고 말한다든지, 얼굴을 단호하고 목소리 역시 스스로 다짐하듯 말 하지만 온 몸을 미세하게 떨리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느낌이 날 수도 있다.
 
이것 말고도 전문적으로 생각하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상대에게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는데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 원래 말을 통해서 나오는 단어들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문자를 통해 대화를 주고 받을 땐, 이런 정보들은 모두 빠진 상태에서 전달된다. 물론 이모티콘이나 각종 이미지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긴 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자를 통한 대화 주고 받기에 많이 익숙해져서 문자를 해석하는데 있어 그 정확성이 꽤나 높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리고 말을 통한 정보 전달은 음파가 갖는 한계로 인해서 기억으로만 남아 부정확한 단점이 있지만 서로 표정과 어투를 보고 했기 때문에 문자에 비해서 훨씬 정확한 정보를 기록한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문자는 어디엔가 정확히 기록되기 때문에 기록 자체는 매우 정확하지만 원래 기록에서 우리가 대화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각종 다른 정보들은 모두 배제된 채 부정확한 정보가 기록되는 단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기록된 문자는 그것을 지우지 않는 이상 정말로 오래 정확하게 남아있게 된다.
 
요즘 가끔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각종 사건들을 보면, 그 사건의 주인공이 10년 전, 5년 전 했던 말들이 마치 현재 내뱉은 것인 냥 포장되어 돌아다니고 한다. 이런 형태의 문제는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의미 전달 자체가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단어가 그대로 해석되어 사람에 대한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 유난히 말 실수, 즉 문자를 써서 남기는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문자를 마치 말처럼 쓰는 버릇이 익숙해진 우리들의 문제점이다. 그리고 말 실수는 그나마 기억에만 남는 경우가 있지만 글 실수는 오랜 시간을 따라 다닐 수도 있다. 그리고 말 실수라고 해도 어딘가 기록이 되어 버리면 이것은 거의 평생의 걸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문제점을 더 하자면, 요즘은 문자를 아주 빠른 속도로 칠 수 있기 때문에, 문자를 거의 말하 듯 보낼 수 있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즉시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그냥 말로 서로 의사를 주고 받듯이 우리는 문자를 통해 완벽히 말을 대신하게 된다.

 

이럴 경우에 지울 수 있고, 확인 후 보낼 수 있다는 문자가 가진 장점은 사라져 버린다. 이것은 꽤나 치명적인 문제로 연결된다. 뱉은 말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은 이제 한 번 쓴 글은 절대 지울 수 없다는 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느 방송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카메라 앞에서 말을 한 것과 같다.


이런 문제점이 있음에도 말을 대신해서 문자를 주고 받는 행위는 앞에서 말했듯 장점이 명확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점점 더 그렇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또한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통화는 돈이 들고 문자는 거의 공짜에 가깝다. 그러니 우리는 점점 더 말을 대신해서 문자를 주고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냥 이것 역시도 우리 인간의 진화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나중엔 언젠가 말을 잘하는 이들보다 글을 잘 쓰는 이들이 더 선호 받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현재까지는 아직도 문자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자의 불편함으로 인해 (속도, 두 손을 써야 하는 문제 등등) 그나마 말의 역할이 유지되고 있지만 나중에 만약 생각을 바로 문자화 시키고 이것을 원하는 시점에 보낼 수 있는 기술이 나오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모든 대화를 문자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우리가 정보 전달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나머지 정보들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전달을 해야 할지 의문이긴 하다.
 
이것은 현재에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문제인데, 사람들은, 대화는 문자를 선호하면서도 문자로 이루어진 책을 읽기 보다는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그것을 영상으로 보는 영화를 선호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가 책보다 훨씬 사람을 깊게 끌어 당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정말로 당연한 결과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 우리는 냄새를 맡거나 촉감을 느낄 순 없지만 배우의 표정과 말투를 통해서 훨씬 더 정확하게 의도를 전달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볼 때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그 내용을 이해하고 그래서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사에 대한 전달은 정보를 줄여서 문자로 하는 것을 선호하면서도 남이 표현하는 정보는 문자 보다는 영상을 선호하는 세상은 뭔가 좀 부자연스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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