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판단의 경계

아이루다 2014. 7. 22. 09:21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다. 뭐 누구나 알겠지만 쉽게 풀어 쓰면, 자기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에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그 자신이 그 조직이나 단체를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 속담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하고 있다. 하나는 이미 고정된 조직이나 단체를 개인이 의지를 가지고 바꾸려고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바꿀 능력과 용기가 없다면 그 안에서 계속 불만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그곳을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바꾸지도 떠나지도 않으면서 그 안에서 끝없는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행동 같아 보인다.
 
중이 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너무 시끄러워서, 다른 중들이 괴롭혀서.. 이런 경우라면 중이 절을 떠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성향이나 기호의 차이로 인해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만약 이것이 아닌 그 절의 주지 스님이 개인적인 비리를 저지르거나 그 밑에 그 주지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순박한 신도들을 살살 구슬려 돈을 뜯어내는 것을 보았다면 이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여기에서 그 절의 비리를 목격한 중은 둘 중 넷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 번째는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 두 번째는 그냥 못 본 척 하고 넘어가는 것, 세 번째는 그 절을 떠나는 것, 마지막 네 번째는 그 자신이 그 무리에 속하여 같이 이득을 취하는 것.
 
첫 번째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거의 무한대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고정된 기득권과 싸우는 것은 정말로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많은 이들은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 네 가지의 선택 중에서 자신이 속한 절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취할 행동일 수도 있다.
 
두 번째를 선택하는 것은 많인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경우이다.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바꿀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네 번째처럼 적극적으로 합류할 만큼 양심이 없지도 않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이런 삶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알아봐야 바뀌는 것도 없고 괜히 양심만 괴로우니 아예 보지 않고 살려고 애쓴다.
 
세 번째 선택은 두 번째처럼 흔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양심이 어느 정도 있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그런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그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해줘야 한다. 실제로 능력 있는 자들은 그 스스로 조직을 만들 수 있기에 남이 이미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괜한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네 번째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일단 도덕심이 많이 무디고 양심이 적어야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타고나고 또한 교육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다. 그냥 그렇게 타고 났고 또한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조직과 같은 연대가 맺어지고 그 안에서는 그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조직의 이득이나 나아가는 방향 그리고 조직이 성격 등을 결정한다.
 
그러다 보니 대표로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마음을 잘못 먹어도 그 조직은 그들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과거 오래된 역사를 통해 그것을 경험한 우리 인간들은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전횡을 막고자 한 노력을 했지만 아직도 그것의 완성은 멀어 보인다. 왜냐하면 인간은 끝없이 부패하기 때문이다.
 
그마나 개인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선택 중, 못 본척하기는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다. 물론 익숙해지면 쉬워지지만 처음엔 좀 어렵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고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싸우진 못해도 떠나긴 한다. 하지만 그 조직이 국가가 되면 이 결정마저도 그리 쉽지 않다.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떠나는 것은 바로 이민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엔 돈과 언어의 장벽이 있으며 살아가다  보면 문화적 장벽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느끼게 된다. 즉 먹고 살수는 있지만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신과 상식에 대한 생각부터 다른 이들과 행복한 삶을 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젠 절이 싫어진 중은 떠날 수가 없다.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통 사람들은 다른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하나는 끝없이 불만을 말하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절을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절 안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후 고유한 영역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것을 국가 단위로 환산해서 보면,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의 현 체제와 불평등한 사회 구조 및 심각한 빈부 격차에 대해 끝없이 불만을 말하고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한탄하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외치고 사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럴 시간이 있으면 더 노력하고 더 공부해서 승자편이 되면 너만은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불만을 가져봐야 바뀔 것도 없으니 그 체제를 떠날 수 없다면 그 안에서 지배층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전자는 후자에게 노예 근성에 찌들었다고 비판하고 후자는 전자에게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불만만 가득하다고 비난한다. 그렇게 그 둘은 끝없는 대척 점에 서서 영원한 전쟁을 한다.
 
여기에서 과연 누가 옳을까?
 
실제로 여기에서는 누가 옳고 틀림은 없다. 단지 상대적 옳음이 충돌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 역사 속에서 세상이 정말로 뭔가 문제가 심각할 경우 민란이 일어나거나 혁명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엔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다. 지금의 대한민국 역시 조선의 멸망을 통해 새로 건국된 나라이다.
 
조선은 고려를 고려는 신라를 뒤집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나 그들 모두 또한 타락했고 부패했다. 권력은 영원히 부패하며 인간이 현재의 인간인 이상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것은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닌 기득권이 바뀌는 것뿐이다.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왕족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들로 구성된 기득권을 타파하고자 노력했던 것은 새로운 지식층이었다. 그들을 글로써 민중을 분노시키고 봉기 시켰다. 거기에서 그 새로운 지식층들은 그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길 바랬던 것이다. 물론 우습게도 그 열매는 나폴레옹이 가져가 버렸지만.
 
그렇다면 과거 역사가 이러니 현재의 문제를 그냥 두고 그 안에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 옳은 것인가? 또한 그것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몇 가지 고질적인 문제만 없으면 지금부터 열 배 이상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상상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 지금보다 좀 더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요구하기만 해도 세상은 많이 바뀐다. 그것은 단지 정당한 투표로써 그리고 각자가 지닌 말도 안 되는 아집에서 벗어나 우리를 위해 일할 사람만 뽑아도 우리나라는 몇 십 년 내로 유럽과 같은 정치 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끝없이 진행된 세뇌와 갈등에 부추김을 당해 공포심과 증오를 이용하는 세력들이 계속 우리나라의 정치권에 머무르고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바꾸고자 하는 이들은 이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많이 어렵다. 세뇌된 사람에게서 그것을 깨는 것은 정말로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체제를 바꿀 수 없으니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 역시도 일종의 세뇌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로또를 만들어서 바늘구멍 만큼의 가능성을 만들어 주고는 너희들도 부자가 될 수 있으니 희망을 가지고 살아라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 이란 용어도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말인가?
 
얼마 전 우연히 본 영화 '비치' 에서 숨겨진 낙원과 같은 섬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해 보이는 이들은 어느 날 상어에게 습격을 당해 심하게 다친 사람을 치료하지 못하고 결국 그가 질러대는 비명소리를 듣기 싫어서 숲에 버리는 짓을 하고 만다. 그것도 다 같이.
 
그 영화를 보면 그 장면이 꽤나 끔찍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눈에 보이지만 않고 소리가 들리지만 않으면 누군가 지금 이 순간 죽음을 앞에 두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단지 차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그 사람을 숲에 버린 것이 아니어서 양심에 가책이 적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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