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피해자와 가해자

아이루다 2014. 7. 20. 14:00

 
2차 세계대전을 생각하는 순간 연관되어 떠오르는 단 한 명을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히틀러가 가장 많이 언급될 사람이 아닌가 싶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의 범위를 벗어나 히틀러는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상 인지도 면에서 부동의 1위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그런 히틀러가 했던 행동 중 최악의 것은 바로 유태인 학살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런 잔혹하고 상상하기도 힘든 폭력을 저질렀던 것을 제외한다면 그 역시 그냥 다른 전범자와 비슷한 인물 정도로 평가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폴레옹의 이미지처럼 되었을까?
 
아무튼 역사는 이미 고정된 사실이기에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히틀러가 저지른 600만명에 이른 유태인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처형한 것은 우리 인류에게 오랫동안 간직할 중요한 가르침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잔인성은 도대체 어디까지일 수 있는지에 대한 것과 독재가 가져오는 처참한 실상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히틀러를 통해 민주주의를 이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련의 스탈린 역시도 독재와 학살이란 주제로 따지면 히틀러 못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최근에 어디서인지 꽤나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조사한 지금까지 모든 인물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히틀러가 뽑힌 사실은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아무튼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들이 '시오니즘' 이란 범 유대적 운동을 통해 지금의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은 현재 21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나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읽은 아인슈타인이 직접 쓴 글들을 보다보니 2차 세계대전 전에 그가 이 시오니즘을 지지하면서 유태인의 인권과 유태인 민족의 미래에 대한 세계 각국의 배려를 요청하는 연설문과 편지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글들에서 유태인이 세계적으로 부당하게 당하는 박해와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특정 민족에 대한 증오로 교묘히 위장시켜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를 유대민족에게 쏠리게 하는 행태에 대한 강한 불만과 걱정을 담았다.
 
아무튼 유대인으로써 그 민족이 말하는 신을 믿지는 않은 아인슈타인이지만 자신이 속한 민족이 당하는 부당함과 인류 최대의 잔인성을 들어 낸 전쟁 범죄에 대해서 만큼은 확실하게 의견을 표명했다.
 
그리고 1세기가 지난 후 2014년, 얼마 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공습했고 그로 인해서 수백 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번과 같은 사건은 과거에도 수 없이 반복되었던 흔한 일 중 하나였다. 누가 자신의 땅에 갑자기 들어와서 나라를 세우고 담을 친 나라를 그냥 바라보겠는가? 거기에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종교 색이 강한 나라이며 새롭게 들어간 이스라엘 역시도 종교 색으로 따지면 세계 1위가 서러운 민족이었는데 말이다.
 
중동의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 지역을 덥고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라고 쉽게 표현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곳은 세계의 중요한 삼대 종교가 발생한 지역이다. 그것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이다. 어쩌면 동양권에서 믿어지는 불교나 힌두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의 근원지인 셈이다.
 
그런 화약고 같은 곳을 국제적 여론과 막후 협상을 통해 얻어 들어간 이스라엘이 제대로 정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화와 타협이 아닌 폭력과 학살이었을 뿐이었다. 순수한 이성을 가진 아인슈타인은 분명히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동 번영을 꿈꾸고 있었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과거 유럽 역사를 보면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은 곳곳에서 발견이 된다. 16세기에 극작가로 활동한 세익스피어가 남긴 '베니스에 상인' 에서 보면 고리 대금업자 샤알록은 피도 눈물도 없는 유대인으로써 돈을 빌려주고도 그 합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가 된다. 그래서 그는 가해자가 되어 버린다.
 
그를 평생 경멸한 주인공에게 돈을 빌려주고 제 시간에 갚지 못했을 때, 살 1 파운드를 받기로 한 그의 복수극은 그래서 남자의 현명하다고 알려진 여자에 의해 무참히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결국 돈만 아는 괴물이 되어 그 무대를 떠난다.
 
유럽인들이 믿는 예수를 밀고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이 민족의 역사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이 완전히 다른 신이 선택한 선민이란 종교관으로 세계 어디에 살아도 그곳에 동질화 되지 못하고 분리된 채 자신들만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가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또한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이방인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아마도 전 세계적인 유대인 증오 현상을 가져온 근본적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다른 민족에 의해 상상하기 힘든 핍박을 당한 이 민족은 지금 중동의 한 지역에서 패권자로 군림하면서 과거 그들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한 짓을 반복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그들이 가자 지구 폭격 장면을 언덕에서 의자를 가져다 두고 바라보는 장면이 담긴 사진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악할만한 정신 세계에 대한 비판을 불러오지만 실제로 그런 것들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폭력적 근원은 뺄래야 뺄 수 없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나쁘게 살아야 할 만큼 절박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배부른 사자일 뿐, 연약하기에 착해 보이는 사슴은 아닌 존재이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이스라엘의 태도를 두고 히틀러 재평가 설을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히틀러가 잘못 한 것은 유태인 600만을 죽인 게 아니라 다 못 죽인 것이 아니냐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심하게 뒤틀린 생각이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의 전쟁은 실제로 우리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사상자 수를 가지고 양측이 서로 옳다고 말하는 정의를 객관적이란 이름으로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둘이 시비가 붙어 싸웠는데 한쪽이 실력이 좋아서 다른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이유로 약자가 더 옳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실력은 옳고 그름과는 상관이 없다. 단지 실력 있는 자가 실력 없는 자에 대한 배려를 해줘야 한다는 점에서는 나름 옳은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알다시피 배려는 의무가 아니다. 당사자가 배려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반대로 피해자도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는 스스로를 절대로 가해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지만 그런 스스로에 대한 착각은 정말로 의미 없고 무책임한 생각일 뿐이다. 우린 언제든 악당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의 창시자로만 알려진 아인슈타인은 국제적 평화와 인류 번영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인간의 악함을 초 인류적인 관점에서 제어할 수 있는 범 국가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끝없이 주장했었다. 그것은 현재의 UN과 같은 조직인데, 문제는 그 국제 조직이 소수 몇 국가의 이득으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 아인슈타인 박사는 인간을 너무 선하게 본 듯 하다. 그가 꿈꾼 시오니즘이 가져온 가지 지구 폭격과 그가 이상적으로 여긴 국제 조직의 행태 및 미국의 현재의 탐욕스러움을 그가 다시 살아나 보게 되었을 때 과연 그는 어떤 말을 할까?
 
어떤 면에서 우리 인류는 분명히 미래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특히나 유럽 쪽 사회는 그런 면에서 정말로 부러운 사회이다. 하지만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과거의 모습보다도 훨씬 더 타락하고 못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개인의 목표가 되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방관하고 있다.
 
누군가는 현재 자본주의를 최고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고 내가 아는 한 아인슈타인 역시도 그런 면에서 비슷한 언급을 했었다.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가 인간을 가장 타락시킨다고 했었다. 그리고 현 시대에 어떤 이들은 앞으로 수십 년 내로 자본주의는 그 생명을 다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난 모르겠다.
 
나는 그리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거기에 미래를 볼 줄 아는 지식인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 우리 인간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살아갈지 감이 안 잡힌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온순하고 훨씬 더 행복해졌을지도 모르고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여 더 이상 심각한 에너지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회가 과연 정말로 옳은 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 문명이 어느 날 멸망했다면 그 과정은 모두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간 중간이 단기적 관점에서는 옳았을 모르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멸종 했다면 그 길은 모두 잘못된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현 시대에서 가장 나아 보이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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