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평균의 함정

아이루다 2014. 10. 7. 16:08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참 여러 가지 종류의 통계치를 작성하고 있다. 부부의 평균 부부관계 횟수부터 국민 총 생산량까지,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은 거의 다 통계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각 대상에 대한 다양한 통계치는 그것을 기반으로 한 평균값이란 개념이 만들어 진다. 즉, 한 달 동안 남녀의 평균 부부관계 횟수는 20대는 몇 회, 30대는 몇 회 라는 식으로 알려지고, 국민 총 생산량은 인구 수로 나뉘어서 평균적으로 각 개인이 일년간 얼마를 버는지에 대한 내용도 발표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 평균값들을 어떤 경우에 적용하여 사용하게 될까?
 
일단 이런 수치들의 가장 흔한 사용처는 일단 각 개인의 분야별 특성 값이 얼마나 표준에 가깝느냐를 따지는데 사용된다. 즉, 남녀 평균 키에 대한 값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키가 큰 편인가 혹은 작은 편인가를 판단하게 만드는데 사용되고, 일인당 국민 소득은 자신의 현재 수입이 다른 이들에 비해서 어느 정도 적당한 수준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겠다. 우리는 왜 이런 평균치를 통한 판단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실제로 생각보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쉽게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판단하는데 객관적인 자료로써 활용하는데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결혼 적령기를 맞은 사람들이 자시의 현재 수준이 얼마나 남들에 비해 '나은' 편인지 혹은 '모자란' 편인지를 판단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또한 키나 몸무게 등을 판단하여 자신이 살이 찐 편인지, 마른 편인지도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정보들이 좀 더 구체화 되는 병원 검사를 통해서 우린 자신의 건강 여부도 판별해 낼 수 있다. 이것은 각 개인에게 닥칠 미래의 불행을 예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평균치가 꼭 필요한 분야는 바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충돌이 났을 때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남자 친구의 키가 작다고 생각한 여자와, 다른 남자들에 비해서 그리 작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자 사이의 언쟁에서 만약 여자가 그것을 경험적으로 주장하게 되면 남자는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보니, 너의 키가 남들보다 작아 보이더라' 라는 말은 키가 작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남자 친구를 설득하기엔 매우 불충분한 정보인 셈이다. 하지만 만약 남자의 평균키가 173cm 인데, 너의 키는 170cm 이니 작은 편이라고 말하면 남자는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남자도 역시 여자의 가슴 크기를 가지고 동일한 원리를 적용시킬 수 있다. 대한민국 평균 여자들 가슴 크기가 얼마인데 너는 얼마이니, 너는 가슴이 작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니까 나의 키에 대해서 불만 갖지 말라고 경고를 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의견으로 언쟁이 붙었을 때, 평균치는 매우 큰 분쟁 종료자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또한 사회 과학적으로 작성된 통계치들은 우리 사회의 건강성 여부를 확인하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인구당 자살자 수나 범죄율 등의 정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에 놓였는지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고 신입사원 초봉이나 실업자 통계는 우리 사회가 어떤 경제 상황에 놓였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아무튼 통계치는 그 개념이 생긴 이래로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서 각종 분야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지수'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마 주가 지수일 것이다. 그리고 엥겔 지수나 지니 계수 등의 용어도 사용되고 있다.

 

이런 통계를 기반으로 한 지수들은 각자를 보기엔 너무 광범위한 대상을 특정한 공식으로 환산시킨 단일 값으로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현재 상태의 문제를 파악하고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만 보면 통계를 이용한 각종 형태의 응용은 무조건 좋은 것 같다.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각종 분쟁을 막을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미래를 계획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본 정보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단점 없는 장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통계치를 근거로 한 평균치는 분명히 단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우리 모두가 각자 가지고 있는 정상의 개념이다. 우리에게 보통 스탠다드(Standard) 라고 알려진 개념인데, 분명히 다양한 분포를 가졌기에 통계를 작성하고 평균치를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한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한 값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키가 140cm 도 안되거나 2M 를 훌쩍 넘거나, 체중이 30kg 미만 이거나 200kg을 넘게 되면 우린 그런 사람들을 비정상이란 용어로 칭하게 되다.
 
물론 이것이 평균치를 많이 벗어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이상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린 평균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을 아주 쉽게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 평균의 범위는 점점 좁아지고 결국 나중엔 여자의 경우, 100kg 만 넘어도 고도 비만자로 판단되기도 한다.
 
남자들 키 역시도 160cm 정도가 되면 아주 작은 남자, 남들 클 때 못 큰 사람으로 대접 받기 일수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는 평생에 걸쳐서 정상 범위에 속한 이들의 보이지 않는 따가운 시선이 늘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비정상적인 체형을 가진 이들에게 큰 상처가 된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나라의 경우엔, 이런 비정상적인 신체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래서 외국의 경우엔 거의 금기 시 되는 표현들이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표현되며, 그럴 때에도 주변에서 그리 제재를 하지 않는 편이다.
 
또한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서 많은 청소년들이 무리하게 정상 범위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는 늘 비교 대상이 되고, 머리가 크거나, 하체가 짧은 사람은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평균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인해 평생을 놀림을 받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각 개인의 열등감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각 개인의 몫이긴 하다. 하지만, 이미 타고나 바꿀 수 없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정상이란 개념을 들이대서 손쉽게 비정상자로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실제로 보통 사람들 중에는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이성이나 동성 모두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혼자 사는 스타일의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한 그 반대로 이성과 동성을 모두 좋아하는 양성애자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상 범주는 모두 이성을 좋아하는 것에만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외의 모든 존재들은 비정상으로 취급이 되며, 심하면 강한 적개심을 들어내는 경우도 생겨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꼭 성적 취향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은 이젠 비정상이란 말을 하나의 낙인과 같이 받아들이고 만다.
 
결국 우리 사회의 정상을 향한 단합된 모습은 성형 공화국, 화장을 예술로 승화시킨 민족, 키를 크게 하기 위해서 혹은 얼굴형을 예쁘게 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수술까지 마다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 때 정상은 연예인의 외모가 기준이 된다. 그래서 여자의 외모나 남자의 키 모두 TV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근거이다.

 
이것이 비단 외모적인 영역에서 끝날까? 그것도 아니다. 교육 과정 역시도 무조건 고등 교육과정을 마쳐야만 정상적인 과정으로 보는 시선이 당연해졌고 따라서 요즘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비정상자가 되어 버린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40대쯤 되면 자기 집 한 채 정도는 있어야 정상적인 삶을 산 것이고, 전세나 월세를 살고 있으면 인생 잘못 산것이라고 판단하곤 한다. 그리고 우린 꼭 결혼도 해야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 키워야 정상이라고 믿는다. 결혼 역시도 조금만 적령기를 넘으면 노처녀,노총각이란 딱지가 붙어서 터무니 없는 대접을 받기도 한다.
 
타고난 체질에 상관없이 술자리에 가면 소주는 기본 한 병은 비워야 하고,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상관없이 노래방에 다 같이 가게 되면 빠질 수도 없는 문화도 정상이라 범주로 강요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도대체 이젠 통계치도 없는 정상이란 개념까지 등장해버린 것이다. 혹은 어떤 강압된 쏠림 현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통계치를 통한 평균 값이 아예 비정상적인 결과값으로 도출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 일인당 술 소비량을 보면, 소주의 경우 연간 123병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거의 삼 일에 한 병 꼴로 술을 마셔야 정상인 셈이다. 하지만 술을 단 한 잔도 못하는 이들이 꽤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들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술을 강권하는 문화로 인해서 술을 잘 마시는 이들이 폭음을 한 탓에 만들어진 통계치가 결국 보통 사람들을 비정상적인 사람을 취급되게 만든다.
 
그나마 이것은 양반이다. 요즘처럼 빈부격차가 심한 대한민국에서는 일인당 국민소득이 거의 3만불로 향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에 4인 가족 기준으로 1년 연봉이 1.2억원 수준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평범한 가정에서 1.2억원을 버는 집이 어디 흔하겠는가?
 
이것은 연간 수입이 100억인 사람 하나와 천 만원이 사람이 10명이 모여서 101억의 총 수입을 11로 나눈 값인 약 10억이 평균 수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럴 경우 천 만원을 버는 사람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자신은 한 달에 겨우 백 만원 남짓 손에 쥐는데 수입이 평균이 한 달에 1억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타인의 눈에 극도로 민감한 시기인 청소년들의 경우엔, 특정 브랜드에 대한 집착 현상 등이 나타나면서 해당 브랜드의 옷을 입지 못하면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정말로 그들이 모두 그 브랜드 옷을 좋아하고 꼭 입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단지 '정상인'으로 보이기 위해서 수십 만원에 달하는 옷을 사 입어야 한다면 이것은 문제이다. 또한 스마트폰과 같은 최신형 고급 전가기기도 마찬가지다. 모두 고급 스마트폰을 쓰니, 예전엔 누구나 쓰던 오래된 폴더 폰을 쓰는 사람이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모두들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평균값 근처로 가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실제로 이것은 큰 문제이다. 개개인이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평균치에 근접하려고 살아간다. 그리고 삶의 목표가 정상인이 되어 버린다.
 
남들이 가니까 학교를 가고, 남들이 결혼을 하니 결혼을 한다. 요즘엔 또 반대로 결혼을 안 하는 문화가 퍼져 나가고 있으니 이젠 결혼을 안 하는 쪽으로 가려고 한다. 안정적인 직장이 좋다고 하니 노량진에서 모여서 수 년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 목표를 공무원으로 삼는다.
 
하지만 생명체의 진정한 힘은 다양성이다.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수 많은 다양한 형태의 체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서는 추위에 강한 이들이 있었고, 더위에 강한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키가 커서 살아남았고, 어떤 이들은 키가 작아서 살아남았다. 이런 다양함이 급변하는 환경에서 우리가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줬으며, 결국 그들이 후손을 남겨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
 
체형뿐만이 아니다. 생각도 그렇다. 다양한 생각과 그것에 따란 삶이 존재해야 한다. 국민 전체가 모두 공무원만 하려고 하면 이 나라는 망한다. 누군가는 공무원을 하고 누군가는 축구 선수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각자가 자신이 정말 하고픈 것을 찾아 열심히 하게 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기성 세대는 끝없이 통계치를 근거로 한 정상과 비정상 개념을 만들어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분류하고 그 사이에 칸을 만들어 놓는다. 모두 각자가 유일한 평균치여야 하는데 전체를 가지고 평균치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는 쳐지거나 모자란 이들은 비정상이라고 하고 골라내 버린다.
 
결국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말 그대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미래 세대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또한 어느 누가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말하면, 세상을 더 살아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젊잖게 조언을 한다. 그 자신은 정상인의 삶 이외엔 살아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 통계치는 우리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아마도 쭉 해야 할 일이다. 아이들이 시험을 보는 이유가 바로 현재 받고 있는 교육에 의한 발달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인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통계치를 이용해 정상적이냐 여부를 판단하고, 시험을 보고는 그 성적을 서열화 시켜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로 구분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정보가 현재의 상태를 구분하고 분류 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많은 이들은 자신의 키가, 자신의 성기의 크기가, 몸무게가 정상적인지 고민하고 살아갈 것이다. 또한 부부의 평균 섹스 횟수나, 월 수입이나, 평균 외식 횟수가 얼마나 정상 범위에 속하는지도 고민한다.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우니 외부로 드러나는 정보에 대해서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야 할 삶에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몸과 정신을 가진 타인의 것을 무리하게 끌어들여서 결국 자신의 삶을 자꾸 잘못 이해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끝없이 주변에 의견을 물어서 자신의 정상 유무를 확인 받으려 노력하면서 결국은 왜 그것이 필요한 지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결과에만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부부들이 부부싸움이 나면 상대의 정상적 행동 여부만 따져서 결국 누가 더 정상적인지만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 부부의 삶 그 자체여야 한다. 거기에서 누가 더 정상적인지 따지고 있다간 결국 둘이서 한 방향을 보고 저어야 할 노를 서로 반대로 젓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표준형이다. 또한 부부 역시도 그 부부 각자가 표준형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 역시도 각 자녀에게 유일한 표준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단 한 명도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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