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사회의 건강함

아이루다 2014. 11. 8. 07:30

 
사람은 그 모인 숫자만큼 시끄럽다. 1명이 있으면 한 명의 목소리만 나오지만 100명이 있으면 100명의 목소리가 나온다. 물론 말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또한 말이 많은 사람도 많아서 결국 100명 중 단 10명만 떠들어도 이 10명이 하는 말이 마치 100명이 떠드는 효과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말을 하는 사람들 의견 중 하나를 지지하기에 조용히 있을 뿐이다. 만약 지지하는 의견이 없다면 그들도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귀찮다면 아예 관심을 끊고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우리 인간이 말이 많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 어떤 간단한 사건이나 생각이라고 해도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일만 봐도 어떤 것을 먹어야 할지, 어디에서 먹어야 할지, 언제 먹어야 할지, 무엇을 같이 먹어줘야 할지, 어떤 순서대로 먹어야 할지, 먹는 중 대화를 해야 할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지, 밥알을 입에 물고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 혹은 말을 해도 될지, 먹고 나면 트림을 해도 되는지 아니면 하면 안 되는지 모두들 다른 기준점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는 단지 100명 단위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만 해도 거의 천 만에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숫자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가질만한 것만 골라서 언론을 통해 소개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 그것을 경험한 것이 아닌, 기자가 쓴 의도대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기사는 단 한 명의 기자만이 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많은 언론사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중에서 누군가는 우호적으로 누군가는 비판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의견이 생겨나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그래서 우리 사회는 많이 시끄럽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말로 '다양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다양함은 언뜻 보기엔 한도 없고 끝도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어느 사회나 마지노선은 반드시 존재한다. 즉, 이 말은 우리가 다양한 의견을 갖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범위적 한계점은 반드시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 한계점은 매우 불명확한 경계지점이다. 그래서 그 한계점에 다다른 듯 보이는 의견이 제시되면 그것으로 인해서 사회 내부에는 양쪽 편에서 강한 반발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자신이 믿는 상식의 범위에 따라 각자 다른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지구 상에는 매우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회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 모든 사회들이 각자가 어디 까지를 경계지점으로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인권이 보장되는 어느 서유럽 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공공연히 벌어지기도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들었던 이야기에 의하면,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들은 일본 군인들의 가미가제식 자살 공격을 보고는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아니 원래 군인은 그런 마음 자세로 전투에 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자살 공격을 한다는 점을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그런 행동을 국가를 위한 충성스럽고 용기 있는 결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시끄럽다는 의미는 보통 갈등을 의미한다. 우리는 싸울 때 시끄럽다. 그래서 갈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사회도 조용했으면 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주 그리고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또한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시끄러운 사회, 즉 다양성이 많이 드러나는 사회보다 조용한 사회, 즉 획일성이 더 드러나는 사회를 선호한다. 무질서한 것보다 질서가 잘 잡힌 사회를 선호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끄러운 다양성이 특징인 사회와 조용하고 획일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다양성의 최대 단점은, 시끄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끄러운 것은 갈등이며, 의사결정이 되는 과정이 매우 느리다는 뜻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으로 인해서 그 사회는 매우 비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 비용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획일성의 최대 단점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다수의 의견이 모아졌다고 해도, 다수가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로부터 그것을 끝없이 배워왔다. 그리고 소수가 여론을 이용해 군중을 통제하는 것도 매우 쉽게 가능해진다. 이것은 반드시 소수의 의도된 독재로 가게 되어 있다.
 
쉽게 이 둘을 비교하려면, 원로원 체제의, 로마와 황제 체제의 로마를 떠올리면 된다. 원로원 시절 로마는 단 한 명에 의한 휘둘림을 피할 순 있었지만, 그 느린 의사결정으로 인해서 결국 전시가 될 때마다 단 한 명의 독재자를 선출하곤 했다. 즉, 전쟁 시에는 빠른 의사 결정이 정말로 중요했기 때문에 만든 제도인 것이었다.
 
다양성이 최대 장점은 느리지만 집단 지능이 발휘되어서 늘 합리적인 방향을 향하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 경우도 지식과 정보 부족으로 인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고 해도, 언젠가 또 다른 시끄러운 의견들에 의해서 다시 방향을 틀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느리지만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획일성의 최대 장점은 빠르고 효율적이란 점이다. 그래서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제도보다 우월한 결과를 낼 수 있다. 군대 조직문화가 경직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군인들은 전쟁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양립할 수 없는 이 둘 중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까?  실제로 이 답은 현대 사회가 발전해가는 방향을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답은 바로 다양성이다.
 
실제로 획일화는 효율적이지만 반드시 문제를 가져오게 되어있다. 그것은 마치 무거운 물체를 단 하나의 기둥으로만 받치고 있는 것과 같다. 실제로 어떤 넓고 무거운 물체를 안정적으로 받치기 위해서는 하나의 두꺼운 기둥이 아닌, 얇은 수백 만개의 기둥이 훨씬 안정적이다.

 
그래야 실수로 하나가 부서져도 나머지 기둥으로 버티는 것이다. 또한 바람이 들어간 풍선이 둥근 모양을 유지하는 것도 같은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바람이 가득 들어간 풍선 안에는 수 많은 공기 분자들의 마구잡이 식 움직임이 그런 아름다운 둥근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는 실제로 역사적 사실로도 증명이 된다.
 
1800년도 중반쯤, 아일랜드에서는 감자가 가장 잘되는 작물 중 하나였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은 다른 종의 작물을 재배하기 보다는 모두 감자만을 심었다. 그런데 감자 마름병이란 병이 돌면서 재배 중이던 감자가 모두 썩어 버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 많은 아일랜드 인이 굶어 죽었는데, 그 숫자가 백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대기근의 실제 원인은 지주들의 착취였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 아일랜드는 경작지의 1/3이 감자를 재배했고 그 중 대부분을 사람들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염병이 돌아서 감자 재배를 제대로 못하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굶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개의 기둥을 세운 꼴이 된다.
 
이런 원리는 주식과 같은 투자 종목에서도 나타난다. 그 분야에서는 그것을 포트폴리오라고 부르는데, 자신이 단일 종목에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종목에 골고루 분산시켜 투자를 함으로써 위험을 최소화 시키는 기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다양성의 장점은 더 많다. 그렇지만 이 다양성은 분명히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통신의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는 오늘날처럼 민주주의를 하기에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물론 과거 고대 그리스와 같은 경우에 성인 남자들이 아고라에 모여서 옳고 그름에 대해 토론하는 정치 시스템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그것은 작은 도시 국가이기에 가능했던 제도였던 것이다.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환경에서 다수의 의견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하는 행위는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만약 외적이 쳐들어왔는데, 의회가 모여서 군대를 파견하기로 의결하게 되는 그 느린 의사 결정 절차를 밟고 있다가, 그 사이 적은 모든 땅을 점령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시대엔 거의 실시간으로 의사전달이 가능하기에 이런 문제를 겪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들은 대통령제를 통해 긴급한 상황에 대비해서 최종 의사 결정권자를 정해두고 있는 편이다.
 
획일화 된 사회는 빠른 의사 결정은 가능하지만 그 사회의 미래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다양한 사회는 상대적으로 느리지만 미래를 위한 안전한 걸음걸이를 디딜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세계의 나라들은 한참 발전될 당시엔 어느 정도 독재 정권이 들어서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결정된 세상은 반드시 문제점을 남길 수 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가 겪는 수 많은 사회 문제는 바로 독재 정권을 지나오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우리를 빠르게 발전시키긴 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결국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다.

 

과정보다는 성과 우선주의, 지역 갈등, 극한으로 치닫는 이기주의, 끝없는 경쟁 심리, 돈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행복관, 순진한 것는 바보로 취급 받는 문화, 정직함이나 법을 잘 지키는 것에 대한 무 가치성, 획일화 된 가치관, 대화와 타협보다는 대립과 끝없는 분열 등등 현재 우리나라가 앓고 있는 거의 모든 대한민국 병이 바로 그 시절을 통해 만들어 졌다. 그리고 갈등이 심화된 사회는 다양성의 사회보다 훨씬 더 더디게 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갈 미래가 아닌, 우리의 후손이 살아갈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당장 내가 좀 더 편하다고 해서 그것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 땅은 분명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자연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갈수록 이끌어야 한다.
 
다양함은 멸망을 막는 가장 효율적인 대비책이다. 그래서 우린 다양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대 사회가 기본적으로 개인적 다양함을 우선시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한계 지점, 즉 다양함이 인정되는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 인가이다.
 
이 한계가 좁게 형성되면 다양하긴 하지만 결국 어느 정도는 획일화된 사회가 되며, 반대로 이 한계가 너무 넓게 형성되면 도대체 인간의 머리 속에서 나온 생각인지를 가늠하기도 힘든 생각이나 행동들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을 잘 조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봐야 할 점은 바로 한계지점을 처리하는 사회적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의 그 사회의 건강함을 알려주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을 때, 문제를 안 일어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리 예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난 후 수습하는 것이다. 우린 보통 예방을 선호한다. 전염병 같은 경우엔 이것이 참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에 대해서는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도대체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저런 이들은 모두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믿기도 한다. 그래서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게 된다.
 
결국 이런 우리의 태도는 그것이 좋든 나쁘든 다양성에 제제를 가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모아지게 된다. 즉, 사회가 가진 허용 범위가 좁아지고, 그것을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 서서히 이 경계는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장엔 좋다. 왜냐하면 좁아질수록 이상한 말과 행동에 덜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잘했다고 판단되면, 이젠 우리는 결과적 기준이 아닌, 예측적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즉, 우리는 문제가 안 일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젠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을 주는 의견이 나오면 그것은 결국 좋지 않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의견을 처단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경계지점에 아슬아슬한 의견을 내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처벌이 되고, 좁아진 범위로 인해서 의도하지 않게 새롭게 좁아진 경계지점에 선 사람들은 처벌이 된 사람들을 보면서 입을 다물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획일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한 번 이것이 좁아지기 시작하면 계속 좁아지기만 할 뿐, 넓히기란 정말로 힘들다. 넓힌다는 것은 한계지점을 벗어난 의견이 자주 나와야 하는데, 그때마다 처벌이 되어 버리니 결국엔 누구도 그것을 하려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양함이 사회는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다양함을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획일화된 사회는 가만히 있어도 유지가 된다. 즉, 사회는 기본적으로 다양함에서 획일화된 형태로 바뀌는 것이 본질적이다. 이 특징으로 인해서 우리는 어떤 형태가 더 나은지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이 다양함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함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다양함을 지키는 것에 가장 큰 목표를 둬야 한다. 설령 그것이 정말로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소리라고 해도, 그것이 다양함이 가진 단점이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의견이 나오지 않도록 막지 말고, 나온 후라도 사회적으로 정화를 시키면 된다.
 
어느 사회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있고,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인간들이 나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올 경우라면 그것을 다른 많은 이들이 현명하게 대처해서 결국 그런 의견은 자연스럽게 묵살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사회는 그런 비정상적인 의견이 힘을 얻는 사회인 것이다. 과거 히틀러에 세뇌된 독일 국민들이 그랬고, 현재 김일성에 세뇌된 북한 주민들이 그렇다.
 
어떤 사회의 건강함은 두 가지 요소로 판단을 할 수 있다. 하나는 다양함이며, 두 번째는 그 다양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를 처리하는 사회의 태도이다.
 
우리는 집단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해 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인터넷 게시판에 미친 인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강경한 제지가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 게시판은 충분히 건강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나왔을 때,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때, 그것이 가진 문제를 쉽게 객관적으로 보질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그것에 대해 말하곤 한다. 이것은 소수의 의견이지만,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의견들이 우리 사회의 건강함을 지켜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빛과 소금과 같은 의견들인 것이다.
 
 

 

'인간·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것, 나쁜 것  (0) 2015.02.24
기자 정신  (0) 2014.11.24
현실 이야기  (0) 2014.11.03
평균의 함정  (0) 2014.10.07
성공의 이유  (0) 2014.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