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인간의 미래, 진화

아이루다 2016. 4. 1. 07:53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현재 생명 창조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충돌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 충돌은 사실 매우 확고해서 서로 절대로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각각 과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진화론과, 기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창조설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창조설을 창조론으로 칭하지만, 사실 창조설은 이론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진리라고 해도 이론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거기엔 단 하나의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말이란 뜻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알 수 없음' 상태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왜 매일 해가 뜨고 지는지를 알지 못했다고 해서, 내일 해가 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그런 것이다. 사실 해가 뜨는 것에는 증거가 필요가 없다. 그냥 그런 것 뿐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믿는 분들이 진화론에 대한 불편한 입장을 갖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근거가 성경책이라면 더욱 큰 문제라고 본다.

 

원칙적으로, 우리 인간은 이 세상 모든 대상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사실 인식이란 절차 자체가 외부의 정보를 내부의 이해 가능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대상을 재해석 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오해는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인간이 이해한 모든 종류의 지식은 바로 이런 식으로 기술이 된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생산하고 있는 정보는 모두 이런 특징에 종속되어 있다. 즉,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인간의 인식 범주를 넘어 설 수 없다.

 

사실 설령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인식과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말하고 쓴 글을 듣고 보는 사람이 자체가 인간인데, 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넘어선 표현을 할 수 있겠는가? 한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에서 창조설의 근거로 믿고 있는 성경책은 이미 시작부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존재를 인간의 이해 범위로 한정 지어서 적었기 때문이다. 설령 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적었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신의 역할이 아닌, 우리 인간의 몫이다.

 

그러니 아무리 신이 진리를 말씀해주셔도,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턱이 없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명백한 한계이다. 어린 아이에게 사탕보다 만 원짜리 지폐가 더 좋은 거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 아이는 언제나 사탕을 원할 뿐이다.

 

신의 존재 여부는 개인적으로 알 수가 없다. 단지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이해력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초월적 존재이어야 한다. 즉, 우리 이해 범주를 훨씬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신을 이해한다는 듯 말한다. 그렇게 신을 자신의 이해 수준으로 끌어 내린다. 얼마나 광오하고 어이없는 생각인가 싶다.

 

그러니 신의 존재를 믿는 분들이라면, 경전의 한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경전은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매뉴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필기 노트이다. 우리 자신이 쓴 것이 아니기에, 그냥 참고만 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신은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

 

신은 오직 직접적인 경험 속에서만 현존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각각 경험하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 경험과 이해가 말과 글로 옮겨지는 순간, 그 경험과 이해는 변질되고 만다. 설령 당사자는 제대로 말을 했어도 듣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내부적 인식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최근에 들었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전율이 느껴질 만큼 강력한 워딩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누가 '진리'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과연 누가 '자유'라는 말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말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단어 두 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저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싶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가져다 쓴다. 그러니 그 해석은 100% 오해이다. 사람들은 그저 신을 믿으면 자신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가지신 분이 있다면, 더 이상 진화론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셨으면 좋겠다. 사실 생명체가 진화를 했든 신이 만들었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신은 그저 신이다.

 

신은 진화론이 증명되거나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해서 부정될 존재가 아니다. 또한 성경책의 한계에서도 벗어났으면 한다. 성경책은 과거 어떤 사람들이 신의 말씀을 그 시대의 이해 수준으로 적어 놓은 글이다. 그들의 이해이다. 남의 필기 본이다.

 

이제는 신에 대해서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유일한 인식과 이해와 필기를 남기실 준비를 했으면 한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아무튼 오늘의 글 주제는 인간의 진화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진화를 멈췄다. 원래 환경의 변화는 진화를 촉진시키는데, 우리는 요즘 매우 급격한 환경 변화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의 속눈썹이 길어지는 이유가, 공기 오염이 심해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진화를 멈추었을까? 단지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멈춘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이 진화를 멈출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는 바로 우리 이제 더 이상 우리 몸을 바꿔서 환경에 적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있다.

 

스모그나 황사 등으로 공기가 탁해져서 호흡이 힘들어진다면, 인간은 원래 코털이 매우 무성해지거나 콧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와서 호흡기를 보호하는 쪽으로 진화되어야 옳다.

 

하지만 우리는 마스크를 만들어서 그것을 보완한다. 더군다나 무성한 코털과 콧물이 질질 흐르는 외모는 경쟁에서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가 진화할 까닭이 없다.

 

원래 진화는 큰 방향성을 갖지만, 진화 자체는 아무런 의지가 없다. 진화론을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말하는 가장 흔한 착각이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 세대 수 많은 돌연변이를 만들어 낼 뿐이고, 그것이 우연이 그 당시의 환경에 적합하면 그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는 것이다.

 

벌이 꿀을 먹게 진화된 것이 아니라, 우연이 꿀을 먹을 수 있었던 능력을 타고난 벌이 더 번성한 것이다. 그리고 운이 없게도 꿀을 먹을 줄 모르는 벌은 도태되어서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자연 선택설이다. 환경이 돌연변이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지, 돌연변이가 환경에 적응하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공기 오염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들 후손들은 아마도 코털이 매우 무성하고 콧물이 수시로 나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지금 세대에서 그런 경향이 많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좀 더 호흡기 질환을 덜 앓게 됨으로써 후손을 남길 기회가 더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우리 인간 세상에서 외모가 주는 경쟁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코털이 코를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자라고, 콧물이 수시로 나오는 사람은 아이를 낳는 것은커녕 결혼도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이제 진화를 멈춰야 할 시점일까?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는 많은 것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진화의 기회를 날리고 있긴 하다. 이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진화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는 일단 먹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풍족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지구 상에서는 굶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비만으로 인해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전체적으로 보면, 인류는 기아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이 되었다. 단지 그것이 제대로 분배가 되지 않을 뿐이다.

 

아무튼 먹을 것이 풍족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살이 찌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일이다. 사실 이해는 간다. 우리나라만 해도 50년 전만 해도 먹을 것이 부족해서 굶는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이런 풍족함이 온 시대는 이제 겨우 한 세대를 지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 미래로 갈수록 인류는 많이 먹어도 덜 찌는 체질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몸은 아직도 못 먹던 시대를 생각하기 때문에, 먹기만 하면 모두 몸의 지방으로 만들어서 보관하려고 애쓰는데, 이제 좀 덜 그래 줬으면 한다.

 

두 번째는 심심함을 참아내는 능력이다. 이것 역시도 오래된 생활 습성에서 나타나는 문제인데, 우리들 대부분은 좀처럼 심심한 상황을 참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인류 전체적으로 잉여 시간은 꾸준히 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배부른 소리이지만,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결국 잉여시간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

 

이때 생겨난 시간이 지루하고 심심하게 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지루하고 심심한 것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도록 진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스위치를 끄듯 잠시 정신을 꺼두는 단계로 진화될지도 모른다. 일종의 잠이지만, 그냥 시간만 보낸다는 점에서 잠과 다른 그 무엇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진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스크를 만들 듯, 이미 잉여시간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보낼지에 대해서 매일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장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심심한 시간을 잘 지내기 보다는, 수 많은 외부 자극을 통해 이것을 극복할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는 생식 능력이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잘해야 한 두 명의 아이를 낳는다. 더군다나 안 낳거나 못 낳는 사람들도 많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30년 가까운 시간을 매달 일주일씩 생리를 한다. 그리고 남자들 역시도 수 많은 사정을 통해서 아이를 낳으려고 노력한다.

 

그나마 남자들은 덜 하지만, 여자들 입장에서 아이 한 둘을 낳기 위해서 생리에 대한 수 많은 불편함을 참아내야 하는 처지는 정말로 달갑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 몸이 워낙 민감해서 생리가 없어지는 갱년기 증상이 수시로 나타나서는 안되겠지만, 아무튼 임신을 원하는 시기에만 난자를 배출하는 형태로 진화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피임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이런 진화도 거의 불가능할 듯싶긴 하다.

 

네 번째는 고통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 몸이 어떤 병에 걸려서 큰 수술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이때는 어쩔 수 없이 살을 가르게 되는데, 이것을 회복시키는 과정이 꽤나 힘들다. 실제로 상처 말고, 외부의 살을 가른 부위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이성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 치료하기 위해서 살을 갈랐음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 몸은 한결같이 고통을 호소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싶다.

 

물론 우리는 마취제가 있고, 진통제가 있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너무도 많은 진통제를 쓰면, 몸의 회복이 느리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딱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처방해준다. 그러니 고통은 늘 존재한다.

 

몸을 더 낫게 하기 위해서 살을 갈랐을 때, 우리는 좀 덜 고통스러워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딘가 홀로 조난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다리가 부러진 채 조난되었다면, 안 아파야 한다. 구조될 가능성도 없으니 고통은 스스로에게 불리할 뿐이다.

 

원래 우리의 몸은 고통을 통해 치료를 요구한다. 우리가 만약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불에 타 죽어도 모르고 타 죽을 수 있다. 고통이 있어야 몸에 불이 붙었을 때 빠르게 끌 수 있다. 그래서 고통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모든 상황이 치료 불가능하다면, 고통은 계속 전달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도움은커녕 해만 된다.

 

우리는 고통이 너무 심하면, 죽고 싶어질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원한 결과가 아니다.

 

다섯 번째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는데, 왜 죽는지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물론 세포적인 단계에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왜 그런 형태로 진화되어 왔는지 알 방법이 없다. 물론 죽음은 필요하다. 설령 영생이 가능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래도 이것이 스스로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늙는 것도 그렇고, 죽는 것도 그렇다. 그럴 이유가 없다. 우리는 어느 시기에 몸의 시계를 멈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는데, 왜 몸은 계속 늙고 죽어가고 있을까?

 

물론 불사의 몸으로의 진화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 인간은 언젠가 스스로를 불사의 몸으로 바꿀 기술을 습득할 것이다. 사실 얼마 남지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말했던 진화의 방향 중 대부분이 해결이 되고 만다.

 

먹을 것, 생식, 고통, 죽음은 쉽게 해결이 되는 것이다. 단지 지루함만이 숙제로 남을 뿐이다. 그 역시도 기계가 된다면 스위치를 끌 수 있겠지만, 문제는 다시 켠다고 해서 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풀기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리셋 스위치를 만들지도 모른다. 모든 기억과 경험을 한꺼번에 날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처럼 되어서 또 그렇게 신기하고 즐거운 세상을 경험하려고 할지 모른다.

 

이런 생각도 든다. 사실 우리 스스로가 로봇화 되어서 기계의 몸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진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생체 단계에 머물고 있는 우리로써는 그런 상상이 나름 끔찍하지만, 사실 그것이 진화의 단계 중 하나라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아니긴 하다.

 

더군다나 이것은 지구상의 생명체가 겪을 수 있는 진화 중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변화일 것이다. 그것은 눈이 생긴 진화보다도, 다리가 생긴 진화보다도, 직립 보행을 한 진화보다도 더 큰 변화일 수 있다. 적어도 죽음을 극복했다면 그런 평가를 받을 만 하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은 아니다. 그럼에도 단지 궁금할 뿐이다. 그런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며, 삶에 대해서 또 어떤 관점을 갖게 될 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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