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무게 줄이기

아이루다 2016. 6. 4. 08:18


 

우리는 보통 처음에 3kg 정도의 무게로 이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체중이 불어난다. 아마 최대치로 따지면 500kg, 즉 0.5 톤 정도까지도 살이 찔 수 있는 듯 하다.

 

물론 보통 성인은 대부분이 100kg 이하이다. 아무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들은 평생 이 체중을 유지한다. 여기에서 유지한다는 말은 사실 조금 단순하게 표현된 경향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 자신의 체중과 싸우는 경우도 제법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들이 그렇다.

 

아무튼 우리는 운동을 하거나, 굶거나, 딱히 다른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그 체중을 유지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늘어나는 무게는 몸의 체중만이 아니다. 물론 관념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몇 가지 더 있다.

 

첫 번째는 삶의 무게이다. 뭐라고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감과 의무 정도라고 설명 가능할 것이다. 이 무게는 어린 아이 시절과 어른이 된 시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무게는 무거울수록 삶이 힘들다.

 

그럼에도 이 무게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무게로 인해서 우리가 각자의 삶을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듦의 대상이기도 하고, 힘듦을 버텨내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게가 늘어나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성난 물살을 건널 때 무거운 돌을 품에 안은 상태에서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자기 한 몸 가누기도 힘든데 그 무거운 돌을 품에 품고 강을 건너는 것은 무척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돌은 무거울수록 우리가 물살을 버텨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우리가 삶을 포기하거나 혹은 운명의 장난에 마구 휘말리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 된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아이를 위해서 온갖 힘든 일을 다 경험해야 하고, 참기 힘든 굴욕도 버텨내야 한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실 아이는 엄마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다. 즉, 아이가 없는 엄마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두 번째는 존재의 무게이다. 이 역시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무게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설명했던 무게들 중에서 이 무게가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 무게는 평생 동안 늘기만 할 뿐, 결코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게는 삶의 무게와 달리 늘어나는 것이 결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물론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체중이 느는 것은 보통 단점만 존재한다. 하지만 몸의 무게는 힘들어도 다이어트를 하면 줄일 수 있다. 삶의 무게가 느는 것은 아예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점도 있다. 우리를 버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의 무게는 평생 동안 커지기만 하고, 커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살다가 보면 어떤 경우에 이것이 작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찌그러진 것에 불과하다.

 

이 무게는 존재감과 자존감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또한 평판이나 명예를 통해서 측정된다. 사실 인간이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거의 모든 가치들과 관련되어 있다.

 

더군다나 앞의 두 무게, 즉 체중과 삶의 무게는 홀로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존재의 무게는 오직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무게감 자체가 바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측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무게를 늘려나가고 있을까? 사실 딱히 그것을 늘리려고 노력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왜 평생 동안 늘어나기만 할까? 그리고 어떤 기회가 와도 그것이 줄어들지 못하고 찌그러들고 말까? 이 무게만 왜 그렇게 특별할까?

 

이 무게가 늘어나는 과정을 살펴보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한다. 또한 다양한 위치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다양함 속에서 우연히 자신이 경험했던 어떤 것을 우리들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일류 대를 다니는 학생은, 자신이 다닌 학교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 이 사람은 평생 동안 어떤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동문회에 소속되며, 동창회에 나가기도 한다.어떤 회사의 사장은 사장이란 자리에 오른 후, 잠시 어색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자리를 자신과 동일시 한다. 이런 특징은 높은 지위에 있었던 공무원도, 정치인도, 동네 작은 가게 사장도 마찬가지다.

 

5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그 아파트를 자신과 동일시 한다. 비싼 외제차를 타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은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는 자신을 동일시 한다. 비싼 음식을 먹거나 기타 수 많은 나름대로의 특별한 경험을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는 자신을 그것과 일치 시킨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 할 수 있어서 한 것이고, 앞으로도 쭉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사실 유지만 된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1%도 없다. 설령 돈은 유지가 되더라도 결국 건강은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누구나 왕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시기 중에서 가장 높고, 가장 찬란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시절을 우리들 자신과 동일시 여긴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반드시 지나가게 되어 있다. 사실 이 시기가 지나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가장' 이란 말이 붙을 수 있겠는가? 나쁜 시절이 있기에 좋은 시절이 존재하는 것이다.

 

50평대 아파트에 살게 되면, 우리는 50평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주변에 알려질수록, 우리는 그 크기의 아파트에서 떠나기가 어렵다. 실제로 가구가 많아져서 좁은 집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집의 크기를 줄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그 크기로 동일시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경제적으로 망한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모임에 나오질 않는다. 나오기도 힘들지만, 나오기가 싫기 때문이다. 그나마 망한 것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나 참석한다.

 

우리는 존재의 무게를 늘리는 것을 아주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할 때마다 주변에 알리기 바쁘다. 승진을 했거나, 집을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했거나, 최근 돈을 많이 벌었거나, 좋은 차로 바꿨거나, 기타 수 많은 형태의 늘리는 것들은 쉼 없이 자랑된다.

 

그리고 그 자랑 자체가 바로 그 대상을 우리들 자신과 일치된다고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것은 자신도, 그것을 듣는 타인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봐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으로 판단되지도, 성격으로 판단되지도,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도,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도, 최근 어떤 책을 읽었는지도, 아침에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도, 얼마나 행복한지로 판단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오직 우리를 정의하는 다양한 실제적 증거로 판단된다. 우리는 은행의 통장에 찍힌 돈의 액수로, 가지고 있는 부동산으로, 현재 사는 집으로, 타고 다니는 자동차로, 다니고 있는 직장으로, 그 안에서 직위로, 심지어는 사는 동네나 졸업한 대학교로도 정의된다.

 

물론 이런 것들은 한번 경험이 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종류에 따라 언젠가는 과거가 된다. 더해서 우리는 언제고 그 증거들을 잃을 수도 있다. 특히 돈이나 직업에 관련해서는 언제 변할지 모른다. 돈만 유지가 된다면, 우리를 증거해주는 다양한 것들이 유지되긴 할 것이다.

 

인간이 못 참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무시를 받는 것이다. 실제로 무시 받아서 사람을 죽였다는 기사가 자주 나올 정도로 무시는 무서운 것 중 하나이다. 무시는 존재감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것이며, 심지어 당사자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살아가는 동안, 그 삶을 부정 당하는 것을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인해서 존재의 무게가 줄어들 상황이 되면, 이것을 참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것은 대놓고 행해지는 무시는 아니지만, 결국 서서히 자신이 무시되는 상황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늙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것은 당장 직장에서 퇴직을 해야 하고, 자신을 그나마 알아주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집안에서도 역시나 뒷 방으로 밀려나야 할 처지가 된다. 우리는 점점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변해간다. 우리는 점점 노인이 되어간다.

 

누구나 인생의 정점이 있다. 운이 좋은 사람은 그 정점이 늘그막 하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은 젊은 시절이다. 그러니 그 후로는 내리막 길이다. 즉,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도 결국 끝없이 존재의 무게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러니 이것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계속 외부의 것을 끌어들여야 한다. 자신의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꾸 외부의 것으로 자신을 추가 정의해야 한다. 외부의 것을 자신과 동일시 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자꾸 거추장스러워진다. 체면이 생기고, 사회적 시선을 신경 써야 한다. 자꾸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살게 된다.

 

내가 행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해야 그 무게가 유지가 된다. 혼자 행복해서 하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오히려 무게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하지만 이 세뇌 과정이 워낙 은밀하기에 우리는 그것이 세뇌된 것이란 것 자체도 알지 못한다. 원래부터 그것을 좋아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아니면 누군가 알아주기에 하고 싶어하는 일인지 말이다. 이것은 단순하다. 그것을 무게로 여기느냐를 바라보면 된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못할 때 어떤 감정이 드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매년 해외 여행을 가던 사람이 그것을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냥 좀 아쉬울 정도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맞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존감이 상처 받거나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무게를 늘린 용도가 맞다.

 

전세 집에 살다가 자기집이 생겨서 행복한 사람은, 그 집이 어떤 상태여도 상관이 없다. 좁든, 더럽든 자기집이기에 행복하다. 하지만 넓은 집을 구입해서 행복한 사람은, 오직 다른 사람들보다 넓은 집이기에 행복하다. 만약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그때는 아무것도 안 해도 불행해지고 만다.

 

존재의 무게의 무서움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줄어들지 않고 찌그러든다. 그리고 이 찌그러짐은 바로 불행으로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것을 방지하고 계속 뭔가 외부에서 끌어들여야 한다. 더 넓은 집으로 가야 하고, 더 비싼 차를 사야 한다. 살아오면서 했던 것들을 끝없이 반복하려고 한다. 하지 못할 처지가 되면 그것을 비관하고 우울해 한다. 그냥 줄이면 되는데, 찌그러지니까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외부의 것들을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물론 그 당시는 기분이 좋다. 회사의 사장이 되고, 누구나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존경 받는 사람이 되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 모두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바로 우리의 족쇄가 된다. 그것들이 우리와 일치됨에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잃을 경우, 불행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돈이 많다가 적어진 사람을 보면 무조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에 비해서 불행할 것이라고 평가된다. 회사의 높은 자리에 있다가 지방의 어느 곳으로 발령이 나면 좌천이라고 한다.

 

외부 조건들을 자신과 일치시키는 것은 마치 강력 본드로 그것들을 자신의 몸에 붙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것이 떨어져 나갈 때, 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나와 동일시 하기 위해서 한 짓이, 그것을 잃을 때 단지 없어져서 불편해지는 수준이 아니라 나를 심하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편견이다.

 

물론 그렇지 않기는 무척 힘들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자랐고 그런 사고 패턴에 완전히 익숙하다. 그래서 안 그러고 싶어도 관성처럼 그렇게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기에 생각의 패턴이 바뀌기는 참 힘들다.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면 이것을 무척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성적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자신을 정의하는 많은 것들과 자신을 분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잠시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운이 좋았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다 보니 그런 것뿐이다.

 

어떤 자리에 있었거나 어떤 경험을 했거나, 어떤 상황 속에 놓였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랬던 것이다. 대통령이 될 수 있었든지,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되었든지 상관없다. 그것은 그저 운이 좋은 것뿐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수 많은 불운 또한 우리들의 몫이 아니다. 그것들도 역시나 우연히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래서 불편한 것만 감수하면 된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 자기 비하를 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삶을 저주할 필요가 없다. 다리가 잘려도, 눈이 보이질 않아도, 돈을 사기 당해도, 사업이 망해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이 그러지 않을 때 자신과 동일시 여기지 않았다면, 그것을 잃을 때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치 남의 일이 되어 버리고 만다.

 

물론 불가능한 말이다. 어떻게 자신의 다리를 자신과 동일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단지 어떤 목표이다. 만약 자신의 눈을 자신과 동일시 여기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갑자기 맹인이 되었다고 해도 단지 불편하기만 할 뿐일 것이다. 적어도 찌그러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삶을 비관할 필요도 없다.

 

존재의 무게가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삶, 이것이 바로 행복을 지키는 유일한 열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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