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 그리고 세상

아이루다 2016. 5. 27. 08:33


 

이 세상을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나눈다면, 어떻게 나누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까?

 

그것을 공간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으로 나누면 될까? 아니면 우주적 기준에서 지구와 외계로 나누면 될까? 아니면 빛을 기준으로 밝음과 어둠으로 나누면 될까?

 

사실 어떤 식의 분류도 제법 진실과 가깝게 느껴지긴 하지만, 정말로 솔직하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을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어떤 것들로 나누고 있을까?

 

언뜻 들으면 어려울 것 같은 질문이긴 하지만, 사실 이 질문의 답은 매우 쉽다. 단지 우리가 이 답을 바로 생각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타고난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바로 ‘나’를 기준으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이 세상은 '나' 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 이 둘로 나뉜다. 그 크기나 가치 혹은 의미 등으로 따지면 엄청난 불균형이긴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세상을 나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그렇게 나눈다고 해서 다 똑같은 마음은 아니다. 똑같은 생각도 아니고, 똑같은 감정도 아니다. 즉, 지식을 기반으로 한 이성과, 느낌을 기반으로 한 감정 모두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과 우주의 종말을 같은 선상에 두고 고민을 할 수 있다. 즉, 정말로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완전히 동급이거나 혹은 자신이 더 중요하게 느끼는 경우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우주의 종말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한 점의 고민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즉,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 중에서 이 세상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방금 설명한 두 경우에 마지막 말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앞의 경우는 느꼈고, 뒤의 경우는 생각했다.

 

즉,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나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 자신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최초에 일어나는 본능적인 감정 반응이다 . 우리는 모두 자신의 죽음을 너무도 두려워하는 탓에 당연히 그런 반응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모든 생명체의 천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감정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이 생겨난다.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만약 우주의 종말이 온다면, 자신도 결국 죽게 되지 않을까 라는 당연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아니 설령 우주의 종말이 온 후, 자신만 혼자 살아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과연 그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소중한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자신이 즐겼던 모든 것도 사라지고, 모든 의미와 가치가 사라진 세상에서 과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너무도 합당해서 누가 이 생각을 안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 질문은 전혀 납득되지 않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죽으면 끝인데,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 우주를 왜 지켜야 할지 의문이 들만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마구잡이 식으로 마녀사냥 하듯이 이기적이고 못된 존재라고 비난하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의 말에는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능이 하고 싶은 마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단지 우리들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원초적 두려움의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도대체 비교하기 힘든 두 가지 이지만, 우리는 이런 비교를 해보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나와 나 이외의 세상’으로 나눠 보는 것에 매우 익숙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을 옆에 지나가는 사람과 나머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으로 나누어 보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쉬운 말로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에 대해서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는 것은 늘 한결같이 현실 속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하게 해야 할 있다면, 그 일은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모든 신경은 그 일에 쏠린다. 그때는 그 어떤 중요한 일도 그것보다 더 우선될 수 없다.

 

달이 지구를 도는 것보다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보다도, 원자들이 결합하여 분자가 되는 것보다도, 바닷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는 것보다도 지금 당장 반드시 합격하고 싶은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신을 믿고 그 존재를 향해 무엇인가를 비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수 많은 우물에 수 많은 동전들이 쌓여있고, 우리나라의 수 많은 장소에 작은 돌탑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끝없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복을 빈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빈다.

 

즉, 신은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로써 정의된다. 신이 이 우주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신의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써 가치가 있어진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 신을 믿는 우리들의 미래를 좀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세상을 그런 식으로 분리하고, 그런 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내가 행복하지 않는 세상은 사실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다른 모든 존재가 행복하다고 해도 내가 불행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그렇다면 그렇게 행복한 사람들이 부럽거나 질투가 날 뿐이다. 이것이 바로 타인에 대한 증오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된다.

 

그나마 내가 불행하더라도 그들이 나로 인해서 행복해졌다면 받아들일 만 하다. 그래서 나를 기념하는 동상을 만들고, 역사책에 인류를 구한 의인으로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전혀 관련 없이 행복하고, 나는 그저 불행하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의 행복이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는 이 세상을 나와 나 이외의 세상으로 분리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 둘 중에서 '나' 가 '나 이외의 세상'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다수이다.

 

이것은 생명체의 고유 특징이다. 그러니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 즉 제품, 자연, 생명체, 우주 기타 등등 모든 존재들을 인식하는 방법이 늘 '내가 느끼는 세상’으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즉, 무엇인가를 인지했다면, 그것은 그것들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여기까지도 크게 문제가 없다. 아니 당연하다. 실제로 문제는 그 인식조차도 나를 기준으로 되기 때문에 생겨난다. 어떤 대상을 봤다면, 그 대상을 머리 속에서 해석을 한다. 그런데 그 해석이 대상에 대한 해석으로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대상으로까지 확대된다.

 

즉, 멋진 자연 풍경을 봤다면, 그 멋진 자연 풍경을 그대로 인식하고 깊은 감동을 느껴야 하는데, 그 풍경이 가진 아름다움을 자신의 사진을 찍기 위한 배경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변형 시킨다.

 

즉,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일단 우리 내부로 대상을 해석하는 '인식'의 행위인데,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로 자신을 위한 부속품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와 아름다운 풍경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바로 나를 위한 소유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식으로 자연을 보고 그 자체를 느끼는 것과, 자연을 보고 그것을 자신을 위한 배경으로 이용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매우 다른 행동이다.

 

만약 우리가 어느 멋진 풍경을 가진 바닷가에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써 인식했다면, 우리는 그 바닷가에 있는 것이 된다. 즉, 우리는 우리와 동등한 입장인 한 대상을 느끼면서 그 존재의 영역에 우리가 들어간 것이 된다.

 

반면에 우리가 나를 중심으로 그 바닷가 풍경을 봤다면, 나의 몸은 비록 바닷가에 있지만, 실제로 나는 바닷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늘 페이스 북이나 카카오 혹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자신이 자주 방문하는 SNS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고, 바닷가는 그곳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서 필요한 연출 도구로써 그 역할이 한정된다.

 

이것은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인식이다.

 

비록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나와 나 이외의 세상' 이란 점은 동일하나, 나 이외의 세상을 나와 동등한 주체로써 바라보느냐, 나를 위해 존재하는 종속적인 존재로써 바라보느냐는 아주 큰 차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심지어 대상의 가치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까지도 생겨난다.

 

대상이 우리들에게 종속적이 될 수록,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상이 것들이 바로 나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로 여긴다. 반면에 각자 주체적이 될 수록, 그것은 각자가 인정해야 하는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 서로 다른 태도는 상대의 소중함이나 상대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하는 방법 자체를 다르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차이가 바로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는 아주 중요한 기준점으로 이용된다.

 

그렇다면 이런 두 가지 형태의 인식 방법을 나와 물리적으로 동등한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어떨까?

 

인간관계에 이 원리를 적용하면, 우리는 '나와 나 이외의 인간' 혹은 '내 가족과 다른 사람들' 같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이때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법이, 나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와 비슷한 존재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느냐로 나눠질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사람마다 고유한 특징이다. 어떤 사람은 극단적으로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기도 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극단적으로 평등하게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성격이 이기적이다 혹은 이타적이다 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본적으로는 이기적이다. 즉, 우리는 아무리 나와 이 세상을 평등한 입장에서 보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우리들 자신에게 추가 기울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와 이 세상은 사실 처음부터 비교불가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비교 대상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심하게 한쪽에 인위적으로 가치를 부여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최대한 평행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더욱 더 자신 쪽으로 기울게 만드느냐에 따라서는 차이가 난다. 특히 이런 특징은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 그리고 환경 등에 의해서 끝없이 변화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나 이외의 모든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한 종속적 존재라고 여길 때 그것은 어떤 문제를 일으킬까? 사실 문제될 것은 그리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잘 눈에 띄지 않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터무니 없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정말로 인식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한 번 살펴보기는 해야 한다.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범위는 바로 내 자신이 된다. 즉, 이 넓고 광대한 이 세상이 언제나 나 하나의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 거기는 단지 내가 있는 곳이 될 뿐이다.

 

산에 오르면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른 산을 본다. 그래서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남긴다. 산을 찍지 않고, 나를 찍는다.

 

바다에 가면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온 바다를 본다. 그래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서 증거를 남긴다. 바다를 찍지 않고 나를 찍는다.

 

계곡에 가도 마찬가지다. 동굴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늘 똑같다. 우리는 그곳을 간 것이고 그것의 증거를 남긴다. 그래서 대상을 찍지 않고, 나를 찍는다.

 

이 지구 모두를 돌아다닐 수 있지만, 우리는 늘 자신의 기준으로 한정적으로만 경험한다. 이것은 사실 좀 슬픈 일이다.

 

우리가 어느 멋지고 광대한 장소에 가면 숨 막힐 듯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대상을 그 대상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거대한 것들이나, 오랜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장소들이나,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것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모두 비슷하다.

 

우리는 대상을 오직 독립적인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을 나를 위해 필요한 연출 물로 강등시키면 감동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것들은 그저 누군가 연출한 무대 장치에 불과해진다. 그 대상이 어떤 의미를 가졌든지 간에 그것은 오직 배경으로만 의미가 있다.

 

앞에서 말한 신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신을 내가 복을 비는 대상으로 보면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은 이 거대한 우주를 만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신이 만든 우주를 볼 때 조차도 그 어떤 감동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사실 종교에 깊게 들어가게 되면, 기복은 사라진다. 사실 종교 조차도 사라지게 된다. 그 존재가 누구이든 간에 우리가 어떻게 호칭하든 간에, 이 우주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숨이 막힐 정도로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진정한 신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우리가 결코 넘보지 못할 그 어떤 위대한 영역에 있는 대상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신에게 기도 등을 통해 복을 비는 것이나, 연못에 동전을 던지는 행위나, 작은 돌탑을 쌓는 행위는 모두 대상을 나를 위한 종속물로 간주하는 행위들이다. 즉, 신조차 나를 위한 부속물화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이 나를 기준으로 돌아가서, 나에게만 복을 주길 바라는 행위이다. 하지만 나에게 복이 온다면, 다른 누군가에겐 불운이 찾아올 수 밖에 없다. 내가 시험에 합격하면, 누군가는 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이상,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의 한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과 이 우주의 종말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단지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그 시작으로 어딘가에 갔을 때, 의식적으로라도 그 대상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일까? 잠시라도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는 일을 중지하고, 잠시라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송하는 일을 중지하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으면 안될까?

 

이것은 단지 대상을 보는 행위만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를 나 자신에서 광대한 우주로 확장시킬 수 있는 행위이다.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살다가 죽을지, 아니면 이 우주 속에 속한 하나의 구성원으로 살아갈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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