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론과 실제

아이루다 2016. 5. 22. 06:54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국가간 대항이나 혹은 중요 이슈가 걸려 있는 경기를 관람할 때,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매우 비슷한 패턴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화면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경기의 감독이 된 듯, 선수들의 몸놀림 하나하나에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주 중요한 득점 찬스에 우리 편 선수가 실수라도 하는 경우가 생기면, 손에 쥔 리모컨을 TV를 향해 던질 듯한 동작을 하면서 화를 주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TV 속에서 듣지도 못하는 선수들에게 그리도 크게 화를 낼까?

 

아니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서, 사람들이 경기를 실제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 그렇게나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근거는 무엇일까? 도대체 축구를 얼마나 잘 알기에 상황을 이해하고, 선수들의 동작 하나 하나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칭찬을 할 수 있을까?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그런데 진짜로 그럴 자격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축구에 대해서 많이 안다.  축구의 규칙, 전술, 선수 운용, 심지어 감독의 역할을 맡겨도 될 만큼 전문가적인 사람도 있을 지경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지식이 바로 모두 이론적이란 점이다.

 

비록 이론적이라고 해도, 골대 앞에 서 있던 선수가 절묘한 패스를 받아 골을 넣을 기회가 생겼을 때, 그 선수가 어떻게 그 공을 처리했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골키퍼가 절대로 못 막을 위치로 가볍게 차거나 혹은 강하게 찼어야 했다. 혹은 더 좋은 위치에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했어야 했다 정도를 아주 빠르게 판단해 낼 수 있다. 그러니 경기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부터 공만 찼던 선수가 그 단순한 하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속이 타겠는가? 소위 프로 선수라는 사람들이 공을 헛발질을 하거나, 골문과 전혀 엉뚱하게 차거나, 제대로 차긴 했는데 골키퍼 정면으로 차는 실수를 했다면 그 행동이 얼마나 어이없겠는가?

 

그런데 선수의 실수로 인해 크게 흥분한 관람객에게, 사람은 원래 실수를 할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선수들을
 비난하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
 

"제가 그런 실수를 할 수는 있지만, 평생 밥만 먹고 공만 찬 선수가 저러면 안되죠. 실수도 한 두번 해야 말이죠. 저 정도 실수를 했으면 감독은 분명히 선수를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저 선수는 뭔가 좀 이상했어요. 감독이 뭔가 저 선수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을 하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해요."

 

라고 말할 것 같다. 분명히 이론의 한계는 있지만, 이들의 말은 그냥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근거는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고의 컨디션에 있는 선수들을 각자 자신이 가장 잘 소화해내는 포지션에 넣어서 그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어서 결국 경기를 승리로 이끈다' 라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이론을 근거를 가지고 감독의 용병술을 평가한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틀린 구석이 전혀 없다. 너무도 잘 맞아서 도대체 반박할 틈이 없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다 일까? 이론적으로 완벽하다면 그것으로 끝일까?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이 이론을 근거로 한 주장에 의해 숨겨진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들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결코 이론대로만 흘러갈 수 없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비단 축구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축구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이론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하는 법도 알고, 게임을 하는 법도 알고, 요리하는 법도 알고, 여행을 떠나는 법도 알며, 좋은 제품을 잘 사는 법도 알고, 화장을 잘하는 법도 안다.

 

설령 그런 지식이 좀 부족하더라도 요즘 시대엔 인터넷이 있다. 우리는 부족한 정보를 금세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될 만큼 많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이런 이론들이 그대로 결코 실제가 될 수 없음을 안다. 차를 처음 몰고 시내에 나가보면, 운전을 늘 정석대로 할 수 없음을 금세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과속을 하지 않고 운전을 하거나, 신호등을 완전히 지키거나, 무조건 보행자 우선으로 운전을 하거나, 운전 중 절대로 졸지 않거나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키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자격증 시험에 통과했다고 해서 해당 분야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경력이 쌓이지 않은 사람은 일반 사람에 비해서 단지 이론적 지식만 가진 것에 불과하다.

 

이렇듯 이런 특징은 대상이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이론적으로 잘 알아도 실제로 경험하거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많은 주부들이 요리책을 보고 따라 하다가 요리를 망치는 이유이다. 아무리 잘 준비를 했어도 여행을 망치는 경우도 그렇다. 아무리 운전에 대해 잘 알아도 사고가 나는 이유이다. 아무리 훈수를 잘 둬도 자신이 직접 바둑을 두면 지는 이유이다. 아무리 많은 대비를 했어도 결국 사고가 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실수를 했을 때, 그것에 대해 책망하거나 비난할 때는 왜 이렇게 이론적 근거를 내세우게 될까? 분명히 현실이라는 실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경험을 했고, 그래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이론적인 입장에서만 비난을 하는 것일까?

 

정말로 그 이론대로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일까? 그들이 그런 실수를 하거나 그런 사고를 일으킨 것이 정말로 이론대로 하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이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가 이론적 근거로 상대를 비난할 때는 뭔가 불순물이 섞여 들어간다. 어떨 때는 그 불순물이 훨씬 더 큰 경우도 있다.

 

그 불순물은 바로 어떤 이유로 인해 지금 화가 났기 때문이다. 상대의 실수나 상대의 판단 착오로 인해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었거나 기분이 상했다면, 그것을 자신의 탓이 아닌, 다른 사람의 탓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화에 대한 정당화 명목이 필요하다. 즉, 자신의 화를 정당화 시키고, 상대를 비난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론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를 이해해줘야 할 때가 있다. 손목 부상을 당해서 타자를 느리게 치는 동사무소 직원으로 인해 떼고 싶은 증명서 발급이 늦어져서 화가 났다면, 왜 공무원이 자기 몸 관리를 못해서 손목 부상이나 당하는지를, 왜 저런 직원을 대체하지 않는지를 따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제까지만 해도 공무원 숫자가 너무 많아서 줄여야 한다는 말에 동조했던 사람일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화가 났기 때문에, 그것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한 명의 인간, 그리고 한 명의 사람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이 평소에 믿던 생각까지도 부정하면서 이론적 근거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축구를 보다가 화가 났다면, 그 화를 유발한 선수에 대해 온갖 욕을 하고, 또한 이론적으로도 그런 욕을 할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스스로도 납득이 되고, 주변에서도 그 화에 대해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모든 행위의 배경엔 무엇이 옳은지를 주장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이유로 화를 내게 되었다면, 그 화를 정당하게 평가 받고자 하는 목적이 훨씬 크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자신의 평소 생각과 반대되는 이론이라고 해도 당장은 끌어 들여서 합리화 시키려는 것이다. 그 이론이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하냐의 여부보다는, 자신의 주장이 근거를 마련하는데 모든 목적이 집중된다. 그래서 자신의 분노가 합당한 것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이론은 중요하다. 우리가 이론을 만든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방향성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힘들지만, 최소한 이론에서 가리키는 방향을 향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이론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게끔 해주는 몸에 맨 밧줄과 같다.

 

그래서 이론은 이런 목적으로 중요해야 한다.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근거로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이론을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이론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그 축구 선수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아무리 축구에 대해 잘 알아도, 그 선수만큼 알 수는 없다.

 

설령 우리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완벽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결정적으로 실전 경험이 없다. 이것은 아주 큰 차이를 만든다.

 

일단 이론과 실제의 차이는 적을수록 좋긴 하다. 그렇지만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에 실제는 결코 이론과 같아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 둘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혹은 이것을 관대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약 실수를 한 축구 선수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자식이거나 오빠나 형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비난할까? 아니다. 우리는 반대로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수가 요즘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주변에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즉, 그 누구보다도 유연하고 관대한 입장을 보일 것이다.

 

반대로 오늘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후, 집에 와서 기분을 풀려고 축구를 본 사람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그는 리모컨을 TV를 향해 던질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진짜로 화가 난 이유는, 회사에서 업무 실수로 인해 깨진 것인데, 그 화가 그날 우연히 실수를 한 축구 선수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리모컨을 던져서 TV가 깨졌다면, 더 강한 이론이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실제로 피해까지 입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것을 합리화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이론적 근거를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자신처럼 분노하는 사람들이 적은 댓글을 보고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런 댓글을 달 것이다. 심지어 깨진 TV의 모습을 인증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분노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얼마다 순수하고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 인간은 원래 이론과 다르게 하여 결국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이니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진 좋은 면이다. 우리는 서로의 실수를 조금 더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화가 나지 않았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만약 화가 났다면 그것은 즉시 불가능해진다.

 

즉, 내가 행복하면 자신이 아는 이론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관대해진다. 반대로 내가 불행하면 칼날처럼 날카롭게 된다. 그리고 이때 자신이 아는 이론은 모두 무기가 된다.

 

요즘 우리나라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면 점점 이론화 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서로 팩트에 근거해서 끝없이 이론적으로 상대를 비난한다. 왜 그럴까?
 

같은 이유이다. 단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똑똑해지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점점 관대함을 잃고 증오로 끓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변해가고 있을까? 이 답을 찾기 위해서는 동물의 세상을 살펴봐야 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은 단 두 가지로 인해 싸운다. 하나는 먹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짝짓기이다. 즉, 인간의 입장으로 보면 경제력과 결혼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떨까? 우리에게 닥친 문제 역시 바로 이것이다. 요즘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경제적 풍요로움이나 혹은 결혼 아니 데이트 조차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했다. 즉, 경제적으로도 많이 부족하고, 결혼을 꿈도 꾸기 못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늘어났다.

 

그러니 화가 안 나고, 싸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만약 우리가 법으로써 제어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외모 지상주의에 밀려서 결혼을 할 기회는 고사하고 데이트 조차 하기 힘들다. 남자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한 탓에 역시나 마찬가지로 기회를 놓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화가 나게 된다. 그러니 증오심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점점 이론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니 걸 그룹 멤버에게 역사적 상식을 요구하고, 여자는 남자를 혐오하고, 남자는 여자를 혐오하게 되고 있다. 노인은 젊은이를 혐오하고, 젊은이는 노인을 혐오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면서 화를 품고 증오 지수를 상승시킨다. 이럴수록 점점 더 화가 난다. 그냥도 화가 났는데, 상대의 태도를 보면 더 화가 난다. 그래서 그 화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이론을 끌어 들인다. 그러다 보니 이젠 그 이론들이 서로 충돌이 되기도 한다.

 

평소엔 공무원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공무원이 다쳐서 자신의 일 처리가 늦어지면 왜 대체 인원이 없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그 비난이 화가 났거나, 열등감을 느꼈거나, 상처를 받아서 하는 것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옳고, 당연한 권리이며, 정상적이기에 비난한다고 스스로도 믿고 싶어한다.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변해갈 때 가장 득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반대로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당연히 강자가 이득을 본다. 인간의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적개심을 강하게 품으면 품을수록 강자는 더욱 더 이득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세계가 될수록 강한 자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손해는 약자가 본다. 아이와 여자와 노인이 그 손해를 다 입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팍팍해질수록 약자는 배려 받지 못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신사도라는 것도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도 각자가 일단 살고 나서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론으로 사실로 무장한 채 상대를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리기에 조금도 쉬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정당성이 얻어졌다면 과연 무엇이 달라질까? 우리는 서로 더 공격하고, 더 비난하고, 더 이론적으로만 말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우리가 그런 짓을 해서 무엇을 얻을까? 물론 자신의 화의 정당성을 획득했기에 감정적으로 시원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 말고 정말로 우리 손에는 무엇이 쥐어졌을까?

 

돈이라도 생겼을까? 좀 더 안전한 세상이 되었을까? 약자가 배려 받는 세상이 되었을까? 사회 정의가 실현되었을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행복해졌을까?

 

그나마 행복해졌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 행복조차도 누군가의 불행을 깔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 우리가 얻은 것은 리모컨에 맞아서 깨진 TV일뿐일 수 있다.

 

우리는 정말 위험한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서로에 대한 증오가 넘쳐서 높은 담을 쌓고 사설 경호원을 두지 못하면 밖에 나서기도 힘든 세상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세상을 바라는가? 아니다 누구도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누구도 자식을 키우면서 매일 마음 조리면서 무사히 집에 오길 바라는 심정으로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옳기 보다는 그저 좀 더 안전하고 좀 더 서로에게 관용적이면 충분하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고 편안해질 것이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눈 앞에 있는 나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인 바로 이 사회 그 자체이다. 이것은 개인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전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이론을 가지고 상대를 비난하는 짓을 좀 멈춰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은 남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중한 사람  (0) 2016.05.31
나 그리고 세상  (0) 2016.05.27
돈과 만족  (0) 2016.05.15
생각과 성찰과 통찰  (0) 2016.05.09
정체성에 대하여  (0) 2016.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