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체성에 대하여

아이루다 2016. 5. 5. 07:11


 

일반적으로 정체성이란 단어를 정의하자면, '내가 나인 이유' 정도로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조금 애매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들으면 대략 이해는 간다.

 

예전에 본 하우스 라는 미드에서 귀가 안 들리고 그로 인해서 말을 거의 못하는 환자가 나온 에피소드가 한 편 있었다. 그 편에서 하우스는 환자의 귀가 안 들리는 직접적인 원인을 밝혀낼 수 있었고 그것을 치료하여 평생 처음으로 소리를 듣게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리를 듣게 된 환자는 어느 날 소리를 듣기 위해 귀에 설치된 장치를 스스로 뜯어 버리고 만다. 도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같이 귀가 안 들리는 여자 친구와의 어떤 간극이 생기는 것이 싫어서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더해서 귀가 안 들리는 상태에서 평생 수화를 하면서 지냈던 자신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사람처럼 되는 것이 뭔가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와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귀가 안 들리는  장애를 극복하고 나름대로 잘 자란 자신이, 귀가 들림과 동시에 청력은 얻었지만 자긴만의 고유한 특징은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귀가 안 들리던 특별한 사람에서 귀는 잘 들리지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 에피소드를 보던 사람들은 대부분 귀가 잘 들렸을 것이니, 이 환자가 정말로 이상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 편의 에피소드는 통해서 한 가지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내가 나인 이유', 즉 자신의 정체성에 얼만큼이나 집착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보통 귀는 잘 들리기 때문에 귀가 안 들리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마다 자신만의 정체성을 정의해 두고 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이 순간,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 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은 스스로 정의한 정체성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역시도 모를 뿐이지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는 정체성 없이는 생존하기가 힘들 정도로 정체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잘 모르는 사람도 꽤나 된다. 아니, 제 삼자 입장에서 관찰하면 분명히 명확하게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을 쉽게 아는 방법은,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평소에 은근히 자랑하든, 아니면 대 놓고 자랑하든 상관없이 틈만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 종류는 뭐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멋진 외모, 뛰어난 운동 능력, 좋은 머리 등과 같이 삶에서 중요한 것들도 있지만, 뜨거운 것을 잘 먹는 것,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 것,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것,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미세한 것들 감지하는 것, 귀신을 본다고 믿는 것, 뭔가 감이 뛰어나다고 느끼는 것, 손 재주, 인터넷 검색 능력, 게임 잘하는 능력, 명품을 알아보는 눈 등등 사실 정말로 다양하고 많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것들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가 왜 정체성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도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정체성을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주 단순한 욕구에서 시작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들 모두는 누구나 기껏해야 인간 중 한 명 이다. 반대로 주관적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른 그 어떤 존재로 인식한다. 이 두 시점의 차이로 인해서 우리는 그것을 해결해 줄 뭔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가능하다면 자신의 잘남을 증명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즉, 가지고 있는 능력들 중에서 남들과 다른 그 어떤 무엇인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남들과 다른 나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내가 나인 이유' 는 '내가 남들과 다른 이유' 라는 말로도 치환이 가능하다.

 

자신이 남들과 다른 뭔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즉 타인과 명확히 구분이 되는 자신에 대한 욕구, 그것이 정체성이 필요한 가장 기본적 심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심리를 갖게 되었을까? 왜 남들과 다른 내가 되고 싶어할까? 우리는 왜 흔한 존재가 되길 거부할까?

 

그것은 바로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만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만약 어떤 집에서 키우는 아이의 입장에서, 자신이 부모가 자신을 다른 아이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이는 정말로 큰 두려움을 느끼고 그로 인해서 부모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을 가질 수 있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 아무나 와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직장의 자리에 대해서 불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대체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남들과 구분될 수 있는 나에 대한 욕구가 발생한다. 그래서 정체성은 최종적으로 내가 세상에 필요한 이유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위에 나열한 것들이 각자의 존재 필요성을 직접적으로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가진 조그만 장점들을 통해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만든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것들을 가지고 남들에게 '내가 이 세상에 살아 남아야 할 이유' 를 설명할 수는 없다. 잘 생겼다고, 키가 크다고, 노래를 잘한다고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 정도까지 되려면, 그 정체성은 아주 특별해야 한다. 특별하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그것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때 정체성도 같이 깊이 숨겨진다.

 

결국 우리는 정체성을 통해 자신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서 걸음을 빨리 걷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기엔 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소소한 능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래서 자신도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체성은 '내가 살아 남아야 할 이유' 까지는 진행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각자에게 '내가 나인 이유' 까지는 설명이 된다. 자신이 남들과 얼만큼 다른 지를 설명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정체성의 최종 목적이 '남들과 확실하게 다르기 때문에 필요해진다'를 지향하고 있지만, 중간에 멈추더라도 정체성에 대한 욕구는 변함이 없이 유지되는 것이다.

 

원래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 살아가야 할 이유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더해서 살아야 할 필요성 역시도 중요한 것이다. 전자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이고, 후자는 남들에게 증명 받는 이유이다. 이 모두가 충족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스스로 왜 사는지 모르고, 남들에게 너는 왜 죽지 않고 사느냐는 말을 듣게 되면, 삶은 지옥과 같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정체성의 존재는 무척 중요하다.

 

정체성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일관성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일정한 사람이 길 바란다.  왜냐하면 변죽이 심한 사람은 인간 사회에서 신뢰에 대한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일관성을 만들어 두려고 한다.

 

그래서 한 번 싫으면 죽을 때까지 싫어하기도 하고, 한 번 좋아하면 죽을 때까지 좋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태도는 자신의 좋고 싫음에 대한 정당성도 부여한다. 어제는 좋아했다가 오늘은 싫어한다면 어떤 이유를 대도 변명에 불과하다고 느껴지게 된다.

 

만약 어제 좋아했고, 그것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댔다면, 오늘도 그것이 좋아야 하고 같은 이유로 좋아해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체성은 자신의 존재의 필요성과 신뢰의 필요성, 즉 크게 두 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체성을 정의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는 없을까? 좋기만 한 것일까?

 

당연히 문제가 있다. 그것도 심각한 수준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그 문제들은 뭘까?

 

우연이 어린 시절에 축구를 하게 되어 평생 축구를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직업으로도 축구를 했고, 선수 생활을 끝낸 후 축구 감독이나 해설자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혹은 나중엔 축구 협회 관계자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축구는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축구가 몸에 매우 해롭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해보자. 물론 이것은 가정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그때부터 축구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그는 귀가 들리게 된 환자처럼 다른 사람들이 내 놓은 연구 결과를 부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축구를 부정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축구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완전히 구축했기 때문에, 축구는 바로 그 자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아마도 수 많은 인터뷰 등을 통해서 자신이 축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끊임없이 얘기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정치에 대한 각자의 견해 역시도 마찬가지다. 어떤 계기로 인해서 갖게 된 정치적 견해를 평생 동안 절대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이나, 주변, 환경, 부모의 입장 등에 의해서 결정되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한번 옳다고 믿게 되면, 정치적 견해를 자신의 정체성화 시켜 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를 정의한 정체성은 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육체적으로 정의된 정체성은 그 변화가 심하다. 잘생긴 외모, 몸매, 근육, 뛰어난 운동 능력 등은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한번 자신의 정체성으로 정의한 것은 결코 내려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집착으로 이어진다. 계속 귀가 안 들리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해롭다고 알려져도 계속 하려는 마음, 늙어가는 외모를 계속 유지하려고 무리하게 수술을 하는 행동, 시대와 배경에 상관없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평생 유지하려고 하는 마음 등이 바로 모두 집착이 된다.

 

원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 자체는 큰 문제 없을 수 있으나, 정체성에 집착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정체성은 우리들 각자의 일관성을 지켜주는데 큰 역할을 하긴 하지만, 사실 일관성이나 정체성 모두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나 좋은 것이지, 그것이 똥 고집이 되면 답이 없다.

 

물론 어떤 정체성들은 평생 딱히 바꿀 필요가 없다. 요리를 잘한다든가, 남들과 잘 지내는 정체성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정체성이다. 그러니 그냥 살아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많은 정체성들 중에서는 사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데, 정체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결코 버리지 못한다. 심지어 그것을 버리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우리는 각각 잘 생긴 얼굴로, 예쁜 몸매로, 긴 머리로, 뛰어난 암기 능력으로, 정치적 견해로, 가진 종교로, 사는 지역으로, 먹고 사는 직업으로, 평생 해온 운동으로, 자신의 가족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 유지한다.

 

그런데 정말로 깊게 생각해보자. 과연 이런 것들이 정말로 우리들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과연 이것들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일까?

 

아니다. 우리의 이름, 외모, 지능, 성별 등은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름을 바꾸는 개명은 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명조차도 스스로 결정한 일은 아니다. 남들의 이목과 조언이 경험되었기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직업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다. 가족조차도 그렇다.

 

우리의 정체성의 본질은 우리를 대표하는 그 어떤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들 중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는 우연이 어느 시대에, 어떤 나라에, 어떤 지역에, 어떤 가정에, 어떤 위치에, 어떤 성별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정체성을 가진 것이다. 파리에 태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파리지엔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것만큼 웃긴 일이 있을까?

 

사실 성별만큼 명확한 정체성도 드물다. 우리는 자신의 성에 대한 정체성을 몹시 중요하게 여긴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서로 성을 바꾸라고 하면 기겁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정체성을 가진다. 남자를 자신으로 여자를 자신으로 동급화 시킨다.

 

이 태도가 게이나 레즈비언 혹은 트랜스젠더 등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실 정체성이 가진 두 번째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정체성으로 인해 집착하고 또한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여기고는 마구잡이 식으로 배격한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비난하거나 설득하려고만 할 뿐, 결코 상대의 입장이 되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가 정체성이 가진 가장 좋지 않는 문제점이다.

 

이 집착과 배격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수 많은 다양한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할 수 있고, 해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수 많은 변화 가능성을 없앤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고정되고 딱딱해지기만 한다.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지만, 정체성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는 있다. 그래서 나를 축구로, 나를 귀먹은 것으로, 나를 빨리 걷는 능력으로, 나를 요리 잘하는 것으로, 나를 글을 잘 쓰는 것으로, 나를 그 무엇인가로 정의할 때 늘 경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결코 그렇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나' 를 정의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생명체일 뿐이다.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정체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찾을 수 없지만, 일단 태어났으니 최선을 다해서 생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행복하기 위해 각자만의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의 최종 목표는 분명히 행복이다. 그것들의 최종 목적은 정체성이 아니다. 노력해서 얻는 것들은 행복이어야지 나를 나답게 해주거나, 내가 나인 이유이거나, 나만의 특별함이 아니다.

 

이 착각이 우리를 고정시키고 만다. 원래 행복해서 한 일이, 우리를 정의하게 만든다. 축구가 좋아서 축구를 한 소년이, 축구가 얼마나 중요한 스포츠인지를 설명하는 강사가 된다.

 

우리가 하는 그 모든 행위는 오직 행복해서 한 것뿐이다. 설령 그것이 힘들었더라도 그것의 결과를 얻고자 한 목적이 있었기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자신을 만족하게 해줬기 때문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만족이 바로 행복이다.

 

우리는 오직 행복하기 위해서만 산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런 목적으로 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정의하려고 애쓴다. 그것이 우리를 대표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행복하지 않게 살려고 하는 듯 보인다. 귀가 들리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환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미 귀가 들렸던 사람들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 말이다.

 

그렇다면 그 환자만 그런 선택을 할까? 아니다. 우리들 모두가 그러고 있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정치적 정체성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정치인들을 지지한다. 건강함에 대한 정체성으로 인해 평생 병원을 안 가려고 하다가 큰 병을 얻기도 한다. 새로운 도구들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서 과거의 것을 고집하는 경우도 흔하다.

 

사실 이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것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모두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태도이다. 발달된 기술 문명을 거부할 것이라면, 과연 자신이 경험한 그 시대의 기술은 어떻게 받아들였단 말인가?

 

예를 들어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LP나 CD 그리고 요즘 나오는 mp3 모두 음악을 위한 소스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LP 한 가지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세 개 모두 듣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이상한 점은 처음에 LP는 어떻게 받아들여나 싶다. 가수를 데려다가 옆에서 노래를 시켜야지, 왜 LP 같은 기계 장치를 이용하는가 라고 되묻고 싶다.

 

과거의 것을 지키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현재와 미래의 것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백지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미 거부할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면, 그것이 좋아 보일 리가 없다.

 

가능하다면 정체성은 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러니 정체성은 최대한 범위를 좁혀놔야 한다. 또한 자신은 정체성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똥 고집임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똥 고집임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만 인식할 수 있어도, 정체성이 가진 아주 큰 문제 하나는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변화에 대한 거부이다. 무엇보다도 고정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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