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음 속의 희망

아이루다 2016. 4. 29. 08:28

 

빨간 머리 앤 이란 이름을 가진 소설이 있다. 그 소설을 읽을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서양 쪽에서는 빨간 머리를 좀 좋지 않은 이미지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소설의 주인공 앤은 자신의 빨간 머리를 싫어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앤에게는 빨간 머리인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키워주는 사람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아예 남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키우게 된 티를 숨기지 않는 아주머니와 그녀를 아껴주긴 하지만 무뚝뚝해서 잘 표현을 하지 않는 아저씨와 함께 살았다.

 

그런 그녀가 그런 환경을 버텨내고 밝고 긍정적으로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앤의 상상력이었다. 현실과 다른 그 어떤 것, 책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앤은 힘들거나 뭔가 상심할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만의 상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치유를 받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런 일은 사실 앤만이 겪는 일이 아니다. 우리들 모두도 그런 행동을 한다. 잠자기 전에 잠이 잘 오지 않으면, 자신만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주로 행복할 때보다는 불행할 때 더욱 많이 하게 된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상상은 우리가 불행함을 버텨내는 힘일지도 모른다. 잠이 오지 않는 것도 일종의 불행이니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가 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들에게는 상상력이란 것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때가 있고 불행할 때가 있다. 행복과 불행은 주기적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사람을 살만하고 즐겁게도 해주거나 혹은 지금 이 순간 왜 살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고 삶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모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 위해서 매일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가 불행하다면 미래는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현재가 행복하다면 그 행복이 유지되길 바란다.

 

그러면서 삶이란 과정에서는 행복과 불행이 늘 교차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평생 행복한 사람도 없고 평생 불행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오고 아무리 예쁜 꽃도 결국 지고 만다는 식으로 인생사 자체를 새옹지마로 여기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인해 현재가 불행하더라도 미래는 행복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일어난 다수의 사례를 듣기도 한다. 또한 운이 좋다면 그 자신 경험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불행을 참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희망' 이라고 한다.

 

원래 희망은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쇼생크 탈출에서 엔디가 레드에게 했던 말이다. 이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들의 생각보다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불행이 자리 교체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슬픈 일이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보통 평생 행복하게 사는 편이고, 불행한 사람들은 보통 평생 불행하게 산다.

 

물론 커다란 불운으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급격하게 불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반대로 불행하던 사람이 행복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겪는 사람이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후,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생각보다 훨씬 일정한 패턴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기별 질곡은 있을지언정,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 자체가 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어린 시절, 즉 10대, 20대는 변화가 좀 있다. 그렇지만 30대를 넘어서 40대 정도에서는 변하는 정도가 확연히 줄어든다. 삶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할 수도 있다. 지금 불행한 사람은 평생 불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금 행복한 사람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지금의 행복이 미래에도 유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돈이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행복이나 불행 자체도 일종의 유산처럼 내려 받게 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어떻든 간에 불행한 사람이 언젠가 미래의 어떤 날 결국 행복해질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각자 개인이 그 희망을 도대체 어떻게 품고 있느냐에 따라 차라리 희망이 없는 것이 더 나을 뻔한 상황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크게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역할과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역할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 부정으로써의 역할을 가진 희망은 삶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분류에 따르면, 앤의 상상력은 좋은 희망이다. 그것은 실현 불가능하지만, 앤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다. 앤에게 있어서 상상 속 세계는 그저 힘든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진 희망이다. 그것은 마치 엄마의 품과 같은 것이다. 엄마의 품은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깊은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이 위로가 현실을 버텨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희망도 있다. 그것은 지금의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용되는 희망이다. 실제로 일어날 수 없거나 혹은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 자신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임에도, 본인에게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 듯 말한다.


단지 직접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믿는 희망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회사에서 일을 못해서 매일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회사에 다니는 것 자체가 불행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좀 더 어울릴 직업을 찾아서 돈을 많이 버는 목적 보다는 즐겁게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삶에서는 적성을 찾거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다니는 직장은 힘들지만 자신의 최종 목적이 아니기에 버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너무 힘들면 언제든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날엔 지금 자리가 자신의 목적지가 아니니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하지만 직장에 다니는 동안 그 이야기만 하다가 만다. 앤의 상상력 속의 세상은 이뤄질 수 없음을 알고 있어도 그 안에서는 행복하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적응하지 못하는 직장에서 겪는 힘듦을 없애는 방법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희망을 이용한다.

 

사실 그는 자신의 깊은 내면에 깔린 본심을 안다. 자신이 그 회사를 결코 그만둘 수 없음을 말이다. 정말로 그만둘 수 있다면, 이미 그만뒀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나 적성을 찾기 보다는 돈과 안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짤려야만 그 회사를 떠날 수 있다. 그때는 마치 스스로 나가는 듯 나간다.

 

그가 그런 상태인 징조는 여러 군데 나타난다. 사람들과 억지로라도 잘 지내려고 하고, 흔하고 평범한 삶을 계획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꿈을 이루고 싶다면 이런 부분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그냥 하는 것도 아닌 정말로 제대로 하고 싶다면 말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갈등하지만, 사실 이미 결정은 내려졌다. 그럼에도 평생 동안 그것을 꿈꾼다고 믿는다.

 

이 사람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희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는 현재의 불행을 없애주기 위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남자 친구가 없어서 결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여자는 자신의 이상형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 남자를 잘못 만나는 것은 자신의 문제이기 보다는 자신에게 딱 맞는 누군가를 만날 행운이 없어서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남자가 갖춰야 할 조건을 매우 비현실적으로 정해둔다. 그래야 자신이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스스로도 믿는다. 자신의 희망이 현실 속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제시한 조건이 현실적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조건을 갖춘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알고 있음에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희망한다.

 

이 여자 역시도 현실의 불행을 부정하는 용도로 희망을 가지고 있다. 남자가 적성에 맞고 돈도 잘 버는 직업을 꿈꾸듯이, 여자는 이상적이면서도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꿈꾼다.

 

물로 이 둘은 조금 극단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이 두 사람과 같은 면을 가지고 있다. 혹은 앤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현실이 힘들 때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버텨내야 한다. 그것이 앤의 행복한 상상 속 세상이든, 두 사람이 겪은 현실 부정의 상상의 방식이든 그것은 개인적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있다.

 

희망은 아예 이루기 불가능하거나 이룰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면 반드시 제대로 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아닌 희망은 사실 망상이며 현실 회피 용도로만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당사자의 삶을 좀 먹는다.

 

이것이 현실 부정이 가진 아주 나쁜 영향이다. 현실은 개차반인데, 그것을 부정하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게 된다. 적어도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당연히 무척 힘들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힘든 노력을 참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의 희망은 다른 이들의 머리 속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지만, 그는 2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그것을 실현해냈고, 결국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노력하는 희망이다.

 

우리는 아플 때 약을 먹는다. 아플 때 약을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기 위해서는 병의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 쓰인 약은 약이 아닌 독이기 때문이다. 사실 약은 독이기도 하다.

 

혈압이 떨어진 사람에게는 혈압을 높이는 약을 줘야 한다. 이것을 잘못 줘서 혈압이 떨어지는 약을 주면 그 사람은 죽는다.


약은 제대로 먹거나 원인을 알 수 없으면 단지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마약을 먹는 것이 낫지, 잘못된 약을 쓰면 독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약을 먹기 전에 반드시 제대로 된 진단해야 한다. 즉,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스스로 문제점을 즉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병은 의사가 있지만, 우리가 현실 속에서 겪는 다수의 문제들은 그것을 진단해줄 사람이 없다.

 

친구들에게 말해보지만, 그들은 모두 엉터리 의사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엉뚱한 진단을 내놓거나 단지 위로만 해주려고 한다.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그냥 말없이 안아주는 것보다도 못하다.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위로를 해주거나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문제 삼지 말라고 말하는 격이다. 이것이 마음의 위로는 될지 모르지만, 병을 치료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 부정의 역할을 가진 희망은 바로 제대로 된 진단을 하는 절차를 막는다. 즉, 현실을 인지하고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그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생기는데,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을 상상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회사에서 일을 잘 못해서 적응하기 힘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 삶을 꿈꾼다고 생각한다. 사실 귀농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시골의 삶도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실패한 사람은 시골에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실 부정이 이 판단을 엉뚱하게 내리게 한다. 현실을 피하고자 선택한 것은 결국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무척 높다.

 

너무도 아픈데 원인을 알 수 없다면, 엉뚱한 약을 쓰기 보다는 차라리 마약을 쓰는 것이 낫다. 그러면 몸이 덜 아파서 운동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위로가 가진 힘이 바로 이런 것이다. 힘든 것은 똑같은데, 잠시 그것을 덜 힘들게 해준다.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발버둥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작은 노력들이 긴 시간과 결합하면, 엔디가 쇼생크 감옥에 파 놓은 길고 좁은 구멍이 되는 것이다. 즉, 언젠가 그곳을 탈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듣는 불행함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행복에 도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 이야기 하나 나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노력과 시간의 기록이다. 그들은 결코 로또를 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장 현실을 부정하고 싶으니, 로또를 사는 선택을 한다. 그것은 즉시 혹은 일주일 만에 자신이 가진 문제를 모두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단지 지갑에 있는 만 원짜리 한 장 꺼내면 해결이 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자신은 어떤 희망을 품고 그 불행을 대하고 있는지를 파악해봐야 한다.

 

그것이 단지 불행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가진 희망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루고 싶어서 매일 조금씩 실천하고 있는 희망인지, 아예 이루기 불가능해서 그저 마약이나 앤의 상상 속 세상처럼 잠시 힘든 일상을 잊게 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이룰 가능성이 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거나, 사실 아주 약간의 행동만 하면서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면, 이것은 실제로 현실 회피 용도일 뿐이다. 그저 그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결국 좀먹는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런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 불행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평생 불행하게 살아가는 원인이 된다. 사실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힘든 노력일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정말로 힘들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문제를 하나 하나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무척 힘들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불행한 사람은 평생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과 성찰과 통찰  (0) 2016.05.09
정체성에 대하여  (0) 2016.05.05
나만 재미가 없나?  (0) 2016.04.25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0) 2016.04.24
0에서 1, 1에서 2  (0) 201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