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생각과 성찰과 통찰

아이루다 2016. 5. 9. 08:38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조언인 듯 보이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빠지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말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하거나 혹은 어떤 행동을 너무 무계획적으로 해서 각종 실수를 할 경우에 듣기 쉽다.

 

이렇듯 이 조언은 기본적으로 책망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듣기가 좋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우리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없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라는 조언을 듣기엔 이미 너무 과다하게 생각을 하고 산다. 체중이 100kg이 넘는 사람에게 말랐으니 좀 더 먹어라 하는 꼴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차라리 생각을 좀 덜 하고 살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이 나을 지경이다.

 

이 말이 잘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이라면, 지금 이 순간 1분만 아무 생각 없이 있어 보려고 시도해보면 된다.

 

하지만 불가능 할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 즉 1초나 2초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30초만 지나도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는 등의 온갖 생각이 난다. 혹은 방금 읽은 이 글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지난 1분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의식적이었기에 기억에 남지 못한 것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거나 듣게 될까?

 

이런 표현이 쓰이는 이유는, 생각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가 상당히 광범위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를 생각하는 것부터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생각하는 것까지, 아예 차원이 다른 대상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즉, 우리는 생각이란 행위를 하긴 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로 별로 의미 없고 어떤 연결고리가 없는 단편적인 생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잡생각' 혹은 '사념'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구분법은 애매한 경향이 있다.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왜 잡생각이 아니어야 할까? 알아내면 부와 명예가 생기니까 그럴까? 아니면 인간의 오랜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줘서 그럴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인간 전체에게 유리하거나 한 개인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그것은 잡생각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과연 이것을 어떤 기준에서 나눌 수 있을까? 잡생각과 잡생각이 아닌 생각을 말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즉, 같은 대상을 생각해도 누군가에게는 잡생각이고 누군가에게는 잡생각이 아닌 것이 된다.

 

이 우주가 어떤 원리로 운영되고 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라면, 그것은 결코 잡생각이 아니겠지만, 평범한 어떤 사람이 그냥 우연이 그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그저 잡생각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즉, 같은 생각의 대상이라고 해도 그 생각의 결과를 얻어 낼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 우리는 생각을 잡생각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주관적이다. 그래서 뭔가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이제 잡생각이 아닌 생각들, 예를 들어서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다른 용어를 붙여보자. 지금부터 우리는 그것을 '통찰'이라고 부를 것이다.


물론 통찰이 아니라고 해서 모든 생각이 잡생각인 것은 아니다. 생각에도 종류가 있다. 우리는 잡생각도 많이 하지만 사실 삶에 필수적인 생각들도 많이 한다. 하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그것은 생각이라기 보다는 계산 과정이다. 즉, 어떤 것이 자신에게 더 유리할 지 판단하는 과정인 셈이다.

 

생각과 통찰은 각각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 둘은 모두 머리를 써서 여러 가지 대상에 대한 다양한 두뇌적 활동을 하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이란 단어는 단발적이고 즉흥적이며 실제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조차 모를 가능성도 높을 만큼 무의식적이다. 즉, 과정은 무의식적이고 결과는 금세 지워진다.

 

반대로 통찰은 장기적으로 이뤄지는 행위이며 상대적으로 체계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찰을 한 결과는 거의 다 기억에 남아 있게 된다. 즉, 그 과정은 의식적이고 결과는 사라지지 않아서 기억으로 남는다.

 

이것을 이해하고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라는 말을 다시 해석해보자. 우리가 이 말을 쓸 때는 단지 생각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생각보다는 통찰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통찰이란 단어를 조금 무겁게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통찰을 하고 살아라 라는 표현을 쓰기엔 좀 부담스럽다. 그러니 그냥 편하게 다른 단어로 대체한다. 즉,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들의 생각이나 기분을 고려하거나, 남들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것을 통찰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무겁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마음씀씀이나 혹은 배려 같은 단어로 표현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밑에 깔린 본질적 행위는 바로 통찰이다. 나와 남 그리고 인간과 삶 그 자체 모두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사고, 이것이 바로 통찰을 통해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행위를 통찰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무겁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그 무거움이 생겨나는 원인이 따로 있다. 즉, 생각이 통찰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붙어야 한다.

 

통찰이란 단어의 뜻에는 반드시 포괄적이거나 전체적이거나 본질적인 이해를 동반해야 한다.

 

즉, 생각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결론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그 결론이 터무니 없거나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혹은 전혀 잘못된 방향이 아니라, 적어도 객관적이면서 진실에 가깝게 평가될 수 있거나 혹은 진실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 정도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이 이해를 목적으로 할 때 이것은 '성찰' 이란 단어로 표현되곤 한다. 즉, 성찰은 통찰을 향한 과정인 셈이다. 우리가 생각을 진행시켜 성찰을 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다면, 그것이 바로 통찰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통찰은 생각 그 자체와 그 결론으로써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모두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인 생각을 하다는 것만으로는 성찰이란 단어는 쓸 수 있지만 통찰이라는 단어를 쉽게 붙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통찰이란 단어를 자신과는 거리가 먼 단어로 인식하기 쉽다. 즉, 그런 것은 특별한 어떤 사람들만이 하는 행동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선입견일 수 있다. 즉, 통찰은 생각보다 가깝게 있다.

 

우리는 흔히 통찰을 많은 공부를 하고, 많은 책을 읽고, 유식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 가진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근거는 있다. 통찰은 기본적으로 지식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접한 사람들에게 유리하긴 하다.

 

하지만 이것은 통찰력을 가지고 싶을 때 갖춰야 할 조건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것은 많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많은 책을 읽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상식 선에서 판단할 줄 알고, 남의 고통을 공감할 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된다.

 

차라리 어설픈 지식과 책으로 사람을 이해한 사람이 훨씬 더 어리석은 판단을 하기 쉽다. 즉, 생각은 많이 하는데, 결국 생각만 하고 마는 것이다. 생각이 성찰로 전환되지 않으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다 이해하는 듯 굴기도 하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단점을 지적하는데 많은 시간을 쓴다. 왜냐하면 자신이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자신은 거의 하지 못하는 축구 경기를 볼 때도 선수들을 욕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가 있다. 그 어떤 통찰력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결코 제대로 된 결론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과학적 통찰은 좀 다를 것이다. 그것은 자연 세계의 법칙을 발견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 과정 조차도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동반해야 한다. 화성으로 사람을 보낼 때도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만큼 더 중요한 생각 대상은 없을 것이다.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 인간에 대한 이해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하다가 생겨난 학문, 철학이 그리 오래된 이유도 바로 그런 원리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주에 대한 이해 조차도, 인간의 존재에 대한 시작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할까? 왜 모든 통찰이 인간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할까? 그 이유 역시도 정말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는 모든 이유가 바로 행복하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원래 행복 자체가 바로 인간을 기준으로 한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의 행복도 관심을 갖긴 하지만, 그 역시도 우리가 행복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각자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다.

 

 이런 가장 본질적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위에서 위대한 통찰의 업적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위대한 인간으로 칭송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자신의 삶은 그리 행복하기가 힘들다. 그는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 자살로써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우리는 뛰어나지만 불행한 삶을 산 천재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이들의 삶을 불행하지만, 평범한 우리들에게 어떤 영감을 준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단지 생각을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성찰을 통해 결국 통찰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상도 어려운 물리학 공식도 아니고, 수학의 원리도 아니고, 언어를 잘하거나, 많은 책을 공부해야 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그저 대상에 대한 꾸준한 노력이며,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끝없이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도 충분히 달성 가능하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다. 즉, 통찰력을 위해 갖춰야 할 조건 중 하나인 연속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의식적인 생각이 가장 중요하긴 하다. 무의식과 의식이 바로 생각과 성찰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의식적이라고 해도 거기에 연속성이 없다면, 그것은 다시 생각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

 

아무리 지능적으로 부족해도 충분한 시간 동안 인간에 대한 이해, 삶의 원칙, 수 많은 가치들에 대한 평가,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 등을 통해서, 즉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서 얼마든지 통찰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열쇠이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이 잘나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더 가능성을 있게 만들어 준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질 때는 주로 부족해서 그렇기 때문이다. 잘난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잘났기 때문에, 평생 그 잘남을 이용해서 편하고, 인정받고,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행복도 거기로부터 만들어 진다. 그리고 잘났기 때문에 대부분 그것을 얻어 낸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가 잘난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잘난 사람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이다. 부잣집에 태어난 아이는 길거리 음식의 행복을 알기가 쉽지가 않다.

 

잘난 사람들은 특별한 인생의 굴곡이 없는 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기회가 없다. 우리는 정답을 맞춘 문제는 다시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틀린 문제를 다시 본다. 그래서 삶이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을 때,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물론 이런 특징은 어떤 면에서는 슬픈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잘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늘 단점만은 아니다.

 

물론 이 기회를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에게 잘나서 자신을 돌아 볼 기회가 없는 것과 잘나지 못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있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대부분은 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런 선택을 선호한다고 해서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그런 선택의 순간조차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미 거의 대부분이 결정되어 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우리의 99% 이상이 결정되어 있다. 우리의 머리, 우리의 신체 능력, 우리의 외모, 우리가 가진 재주, 부모, 국가, 지역, 언어, 문화 등이 거의 모두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래서 타고난 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잘나지 못하게 태어났다고 해서 불행하게 살아갈 필요는 없다. 우리는 1%의 가능성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이미 잘나지 못하게 태어났다면, 잘나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보내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싶다.

 

시험문제를 틀렸다면, 기왕 틀린 김에 그 문제를 좀 더 확실히 파고들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깊은 이해를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잘난 다른 사람들은 100가지 문제를 이해하고 풀겠지만, 우리는 단지 10가지 문제라도 제대로 풀어내는 능력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쉽지 않지만, 결국 시간이 그것을 이뤄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로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만약 이런 행동을 통해 어떤 대상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마치 자신의 선택인 마냥 여기게 되는 태도를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잘났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을 잘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해놓고는,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화 시키면서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구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난 존재와 못난 존재 중에서 결코 못난 존재를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 중에서 결코 불행을 선택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선택한 듯 굴고 있다면, 이것은 이미 처음부터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잘남을 끝없이 자랑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잘난 구석이 있다면, 그것을 자신과 동질화 시킨다. 즉, 의지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을 했다면, 자신을 통찰력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의 밑으로 깔아 본다.

 

열등감은 반드시 우월감을 만들어 낸다. 단순한 원리이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끝없는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깊은 사고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할 때 느낄 수 있는 자기 만족감에 대해서 충분히 경계를 할 수 있는 성찰까지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이 중 하나가 빠지면, 성찰은 통찰로 진행되지 못하고 다시 생각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

 

우리들의 99%는 모두 결정되어 있다. 이제 남은 1%는 생각을 성찰로 그리고 통찰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에 대한 결정뿐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것이 각자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또한 어떤 조건을 타고 났는지에 상관없이 유일하게 자신의 삶을 의도할 수 있는 선택이 될 것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론과 실제  (0) 2016.05.22
돈과 만족  (0) 2016.05.15
정체성에 대하여  (0) 2016.05.05
마음 속의 희망  (0) 2016.04.29
나만 재미가 없나?  (0) 201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