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세가지 그릇

아이루다 2016. 6. 3. 08:51


흔히 사람은 그릇의 크기가 있다고 말해지곤 한다. 각자가 서로 다른 크기의 그릇을 가지고 있으며, 이 그릇의 크기로 인해서 감당할 수 있거나, 해낼 수 있는 대상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보통 그릇이 큰 사람은 큰 일을 해낼 수 있고, 그릇이 작은 사람은 작은 일만 해낼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한문으로는 대인배, 소인배 라는 말도 있는데, 이 의미는 앞에 정의한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아예 사람 자체의 성품을 칭하는 말로 사용되곤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원리로 대인배가 되거나 소인배가 되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누구나 소인배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소인배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쪼잔한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쪼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 소인배인 사람은 꽤나 많다. 원래 대인배가 훨씬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그릇의 크기가 어떤 식으로 정해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그릇의 크기를 결정하는 다른 요소들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바라보면, 거기엔 세분화 된 총 세 개의 그릇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세 가지 그릇은 각각 '능력의 그릇' '행복의 그릇' '성격의 그릇' 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성격의 그릇이 대인배와 소인배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그릇들 하나 하나가 독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즉, 성격적 그릇을 넓히는 것은 단지 그 그릇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개의 그릇은 서로 밀접하고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단, 행복의 그릇은 절대로 단독으로 채워질 수 없으며, 능력의 그릇은 거의 태어난 상태로 평생 동안 고정이 되기 쉽다. 그리고 이 셋 중에서 성격의 그릇만이 유일하게 후천적으로 변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능력의 그릇의 크기와 그로 인해서 행복의 그릇이 얼만큼이나 채워졌는지 여부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는 영역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림 1> 능력의 그릇과 성격의 그릇이 행복의 그릇을 채우는 원리


<그림 2> 능력의 그릇이 커졌을 경우, 일어나는 현상


<그림 3> 능력의 그릇과 성격의 그릇이 줄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



이 그림들에서 1번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각각의 그릇을 채우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일반적인 그림이다. 우리는 능력의 그릇 크기로 인해 행복의 그릇을 채우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이로 인해서 성격의 그릇도 영향을 받는다. 아무튼 2번 그림처럼 능력의 그릇과 성격의 그릇이 커질 때, 우리는 행복의 그릇을 가득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능력의 그릇이 커져서 행복의 그릇이 차게 되면, 성격의 그릇이 자연스럽게 커지는 경우도 매우 많다. 쉽게 말해서 잔치 집에 가면 인심이 후하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능력이다. 그래서 능력의 그릇이 크면, 우리는 행복할 가능성이 무척 높아진다. 멋지고 아름다운 외모, 큰 키, 좋은 인상, 뛰어난 두뇌 능력, 근력, 운동 능력, 손가락 사용 능력, 체력 등등 우리가 거의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난 능력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훨씬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준다.

 

물론 성형 수술을 하거나, 부단히 노력해서 남들보다 더 나은 몸을 가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의 일정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 타고난 사람은 그저 공짜로 얻은 것을, 얻지 못한 상태로 태어난 사람은 오랜 시간 많은 노력을 해야 겨우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완전히 똑같이 하기도 힘들다. 아예 지적 능력, 큰 키, 운동 능력노래 부르는 능력 등과 같은 것들은 현대 최신 기술을 모두 동원해도 얻기가 힘들다.

 

우리는 다양한 능력으로 행복의 그릇을 채울 수 있는데, 이것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은 외모가 무척 중요한 시대였지만, 100년 전만 해도 외모보다는 타고난 출신이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노비로 태어나거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면, 어떤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도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주 오래 전 인류가 동굴에서 살 때는, 육체적 능력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아무튼 미래로 갈수록 외모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그것의 한계를 좁혀줄 테니까 말이다. 대신 점점 지적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지만, 더 미래로 가면 그 조차 개발이 가능하게 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먼 미래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능력의 그릇은 시대에 따라 다르긴 해도, 우리가 살아가는 한 시기만 보면, 그 역할도 명확하고, 한계도 명확하다. 그러니 우리가 소인배가 아닌, 대인배로 살기 위해서 뭔가 해볼 수 있는 영역은 바로 성격의 그릇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능력과 행복의 그릇으로 인해 심하게 참견을 당하기 때문에 소인배의 삶을 극복하고 대인배로써 살아가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할까? 꼭 대인배로써 살 필요는 없지만, 찌질하고 성격 더러운 사람이 되어 사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너그럽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으니 말이다.

 

이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작동되고 있느냐에 대한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착각을 해서 불필요한 노력을 하거나,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지 않을 수 있다. , 당장 정답을 찾을 수는 없어도 적어도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생각한 결과를 살펴보면, 능력의 그릇이 고정되어 있고, 행복의 그릇이 어찌해볼 수 없다면, 우리는 오직 성격의 그릇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알건 모르건 간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시도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성격에 불만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자신에 대해 100%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다.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 마찬가지이지만, 사실 그것은 변하기가 힘들어서 포기하기 마련인데, 성격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도 그것을 권하기도 한다. 용기를 내라고 하기도 하고, 의욕을 가져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고, 남의 시선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질투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대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고, 타인에게 관대해지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변화는 모두 그 사람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우리가 성격을 바꾸려는 이유는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 성격의 그릇을 키우면, 행복의 그릇이 더 채워질 수 있다는 원리이다.

 

이 말이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격의 그릇은 어떤 면에서는 능력의 그릇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후천적으로 성격을 바꿀 수는 있지만, 과연 그것이 다른 것은 모두 놔둔 채로 성격만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성격을 바꿀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성격만을 바꿀 수는 없다. 성격을 바꾸려면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것을 바꿔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 성격적으로 변했다면, 둘 중 하나이다. 환경이 바뀌었거나 혹은 나이를 먹은 것이다. 오직 이 둘만이 성격을 바뀌게 만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가 우리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방법은 원래 우리의 목적이었다. , 목표가 수단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기계가 필요한데, 기계를 살 돈이 없다.

 

우리는 행복하면 성격이 바뀐다. 그런데 성격을 바꾸는 이유가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배가 불러 행복한 호랑이나 사자는 온순하다. 사실 거의 모든 육식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유순해진다. 반대로 배가 고픈 동물은 어떤 종류이든 사나워진다. 인간도 똑같은 원리로 동작된다. 우리는 만족스럽고 행복할 때 유순하고 너그럽다. 그래서 대인배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불만이 가득하고 불행하면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소인배가 될 수 밖에 없다.

 

마음이 넓어 보이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고난 능력이 뛰어 났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행복을 찾은 사람들이다. ,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보이는 대부분은 사실 조건부이다. , 행복한 조건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우리들에게 어떤 기회가 있음을 알려준다. ,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기만 할 수 있다면, 즉 행복의 그릇만 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격의 그릇에 영향을 줘서 더 행복해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순환이다. 행복해지면 성격이 좋아지고, 성격이 좋아지면 더 행복해진다. 물론 반대로 가능하다. 불행해지면 성격이 날카로워지게 되고, 날카로워지면 더 불행해진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것을 잘 살펴봐야 한다. 자신의 성격이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그것은 단지 배가 고파서 그렇거나,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거나혹은 아프거나 하는 등의 불행의 요소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를 의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문제점을 언제나 합리화 하려고 한다. 화를 내더라도 그것의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다그래서 정당함을 얻으면 만족해한다. 하지만 화를 내서 기분이 나빠진 것은 도대체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이것이다.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자신이 실제로 잘났음을 증명 받으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매일같이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험담하고 비난하고 뒷담화 하고 질책을 한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 목적이 바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남들을 깎아 내린다고 해서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인의 행복 그릇을 줄이는 행위이지, 내 행복 그릇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흐름을 끊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불행함이 나쁜 성격을 만들고 있다면, 그것을 끊어야 한다. 그냥 끊기는 힘드니, 일단 행복 그릇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줘야 한다. 더 채우지는 못해도 적어도 물결을 일으키긴 해야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능력 그릇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그럴 수 없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개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능력은 타고난 것이긴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는 늘릴 수 있다. 단지 그럴 때 새대나 다른 사람을 기준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자신의 능력 그릇만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면 된다. 그냥 달리기라도 하는 것도 좋다.

 

뭐든 흐름을 끊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단 흐름을 늦출 수 있거나, 운 좋게 아예 멈출 수 있다면, 이젠 반대로 행복해져서 좋은 성격으로 가는 흐름으로 갈 수도 있다. 이것이 좋은 것은 흐름을 변경하긴 참 힘들지만, 한번 흐름을 타면 같은 원리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결코 그냥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반드시 실제적이다. 책을 읽고 머리 속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결코 얻을 수 없다. 오직 경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해 보지 못한 일을 시도하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가거나, 용기를 내 보거나, 자기와 한 번쯤 싸워본 경험이 필요하다.

 

이런 실제적 경험을 통해 흐름을 바꿀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강연을 들으러 다니고, 심리 상담을 받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직접으로 한 경험만이 변화를 가져온다. 이론은 방향만을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이론이 중요하긴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경험이 없는 이론을 탁상공론이라고 한다.

 

우리가 성격을 바꾸길 바란다면 행복의 그릇을 채워야 한다. 같은 환경과 같은 나이일 때, 행복해지지 않고 성격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질투하지 않고 싶다면, 주변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만 채우든가, 나이를 충분히 먹든가 해야 한다. 그 이외에는 오직 행복해져야만 질투심이 사라진다. 우리는 배가 부르면 유순해지는 호랑이로부터 힌트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행복의 그릇을 채우길 바란다면, 무엇보다도 실제적 경험을 해야 한다. 무엇이든 간에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타고난 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지금 불행하다면, 타고난 능력의 운이 없었던 것이다. 혹은 살면서 다양한 운도 없었을 것이다. 능력이 타고나도 운이 좋지 않아서 불행한 사람들도 많으니 말이다.

 

아무튼 운이 없는 것이다. 운이 없으니 불행하다. 그런데 그 상황을 비관하고 저주스러워 하면서 살지, 아니면 그 운의 한계를 극복해보려고 할지는 오직 각자의 판단에 달렸다.

 

어떤 삶이 더 나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는 명제는 절대적으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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