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나는 누구인가?

아이루다 2016. 5. 20. 08:02


어떤 이유인지, 어떤 사연인지,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여자의 몸에서 운명적인 두 세포가 만난다. 그리고 둘은 하나가 되어 성장을 시작한다.

 

사실 이 순간, 이 세포의 존재를 생명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 세포 덩어리는 곧 어떤 형체를 갖춘다. 그리고 점점 더 뚜렷해져 간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인다. 희미하지만 어떤 자극에 반응을 하기도 하고, 가끔 스스로 움직이기도 한다.

 

이렇게 육체적으로는 변화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존재는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싼다.

 

그 단순한 삶이지만 이 존재는 행복할 것이 분명하다. 비록 엄마의 뱃속은 양수로 꽉 차있지만, 호흡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곳은 언제나 따뜻하고, 배가 고플 틈도 없다. 탯줄을 통해 엄마가 섭취한 영양분이 끝없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싸고 싶을 때는 언제든 싸면 된다. 그것을 참을 필요가 없다.

 

그곳은 이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장소이며, 최고로 안전한 장소이다. 그리고 이 존재는 서서히 인간으로 변해간다.

 

그런데 이 존재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은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미약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를 느끼는 주체가 있을 텐데 말이다. 자극에 반응하고, 행복을 느끼는 주체로써 그 존재를 부를 수 있는 적당한 용어가 필요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그 존재를 '원아' 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것이 제대로 된 명칭인지 따지지는 말자.

 

배속에 있는 원아는 모르고 있지만, 원아는 얼마 후 자신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겪을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피하고 싶다고 해도 피할 수 없다. 원아는 열 달 뒤에는 그 행복의 공간에서 무조건 나와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이제 몸이 너무 커져서 엄마의 배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힘들지만 출산의 과정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원아에게 이 경험은 매우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언제나 따뜻했고, 언제나 배불렀으며, 언제나 행복했던 그곳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젠 춥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힘들게 입으로 뭔가 먹어야 하며,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 적응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원아는 나오자 마자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다.

 

엄마의 뱃속은 원아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나왔어야 했다. 그래서 원아는 평생 자신이 쫓겨난 그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곳은 원아에게 있어서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나온 이상 다시 들어갈 방법이 없다. 그래서 원아는 이제 스스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원아는 성별에 따라서 언젠가는 자신이 또 다른 원아를 품어야 할 처지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태어난 원아는 그 순간에 새로운 능력을 하나 갖게 된다. 아니, 원래 미약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밖으로 나온 후 그 존재감이 뚜렷해졌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본능'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원아는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가로 두 개의 능력을 더 갖게 된다. 그래서 원아는 인간이 된 후, 총 세 개의 중요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일단 첫 번째로 갖게 된 본능은, 원아의 삶을 지속시켜주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이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얻어지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는 자연스럽게 엄마의 젖을 찾아 빨 수 있다. 또한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며, 똥을 싸기도 한다.

 

엄마의 뱃속만큼은 아니지만, 원아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당분간 먹고, 자고, 싸면서 존재한다. 이때도 행복하긴 하다. 단지 엄마의 뱃속에는 비할 바가 아닐 뿐이다. 그래서 원아는 틈만 나면 운다. 엄마의 뱃속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과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서 울고, 잠을 자기 힘들어서 울고, 뭔가 주변이 혼란스러워서도 운다.

 

원아가 제법 자라서 1년이 되어갈 쯤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즉, 원아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원아는 처음부터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해줄 돌보미의 존재가 필요하다. 보통은 부모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부모 이외에 가장 첫 번째로 접하게 되는 형제들이 있다. 형제들은 부모의 관심을 두고 경쟁을 해야 할 최초의 경쟁 대상이기도 하다.

 

인간이 평생 갖게 될 '관심 병'의 뿌리가 바로 이때 만들어 진다.

 

그나마 형제들은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서 만나게 될 수 많은 다른 경쟁자들에 비하면 정말로 좋은 경쟁자들이다. 기본적으로 부모를 두고는 경쟁자의 관계이긴 하지만, 수 많은 다른 외부 경쟁자들과의 싸움에서 내편을 들어 줄 몇 안 되는 우군이란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아무튼 그것이 형제들이든 아니면 외부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사람들이든 간에 상관없이, 원아는 어쩔 수 없이 경쟁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리고 관계 속의 경쟁은 원아로 하여금 처음 가졌던 본능 이외에 또 다른 능력을 습득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본능과는 달리, 관계와 경쟁이 없다면 꼭 만들어지는 능력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관계가 없이는 아예 생존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인간인 이상 무조건 갖게 되는 능력이다.

 

그것이 바로 '자아' 혹은 '에고'라고 부르는 능력이다.

 

자아는 나와 남을 구분하고, 나와 남의 순위를 결정하고, 나의 유일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자아는 나의 독특함을 정의함과 동시에, 나의 필요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해주고, 살아가면서 생존에 필요한 많은 종류의 경쟁에서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을 선호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원아의 생존에 크게 도움을 준다.

 

본능은 강렬하긴 하나 그저 욕구에 불구하다. 배가 고프면 그냥 먹는다는 생각 하나 뿐이다. 하지만 자아는 다르다. 자아는 본능에 비해서 훨씬 능력이 있다. 자아는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다. 그것을 위해서 관계를 잘 맺어야 함을 알고 있으며, 뛰어난 능력을 갖출수록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음을 안다.

 

그래서 자아는 뛰어난 능력을 갖길 바라며, 뛰어난 능력을 가질수록 자아는 더욱 더 커진다. 그래서 원아에게 있어서 본능이 차지하는 비중을 많이 줄여버릴 수도 있다. 즉,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좀 더 자라게 되면, 원아는 이제 세 번째 능력을 갖게 될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런데 사실 자아까지만 해도 거의 반드시 갖게 될 능력이지만, 이 세 번째 능력은 훨씬 선택적이며, 이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사람마다 극심하게 차이가 난다. 즉,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능력의 크기는 너무도 천차만별이다. 왜냐하면 이 능력은 지적 역량과 타고난 성격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시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상식과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규범과 도덕 등을 배우게 된다. 또한 어떤 일을 할 때 장기적으로 판단하는 안목도 갖게 된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프더라도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먹어 버리고 나면, 나중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

 

본능은 당장 무엇인가를 먹길 바라고, 자아 역시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모든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 번째 능력은 찾은 먹을 것을 다 먹지 않고 미래를 위해 남겨둘 수 있게 해준다.

 

그 능력이 바로 '초자아' 혹은 '슈퍼에고' 라고 부르는 존재이다.

 

여기까지 해서 원아는 '본능', '자아', '초자아' 세 가지의 능력을 갖췄다. 그리고 원아는 이 셋으로 인해 가려져서 거의 보이질 않게 된다. 우리는 이제 이 세 가지 능력을 다양한 조합으로 섞으면서 한 명의 인간이 된다.


그러자 우리는 원아가 아닌 그 능력들을 우리들 자신으로 동일시 여기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배가 고픈 자신, 배가 고픈 자신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는 자신, 자신이 먹을 것을 미래를 위해 남겨 두거나 혹은 옆에 더 배고픈 동료를 위해 줄 수 있는 자신으로 정의된다.

 

좀 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 능력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 케잌을 둘러싼 사람들 속의 능력들 ::

 

케잌을 8조각으로 잘랐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우연이 그 중 하나가 유난히 크게 잘렸다. 이 케잌을 먹을 사람은 총 8명이고, 모두 이 케잌을 먹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중 어떤 사람에게 유달리 큰 케잌이 눈에 띄었다. 이때부터 이 사람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본능은 케잌을 먹고 싶은 욕구 자체를 만들어 낸다. 본능이 지시하는 데로 따르면 원아는 행복해진다. 그리고 자아는 그 중에서 가장 큰 케잌을 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아가 시키는 데로 하면 원아는 더욱 더 행복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라면 그러겠지만, 다 큰 성인이라면 뭔가 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주체가 바로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자신이 그 큰 케잌을 집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비난을 예상한다. 즉, 당장 자아를 만족시키는 행위를 했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욕심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음을 경계한다. 하지만 자아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특히나 자신이 그것을 먹지 못해도, 자신이 늘 잠재적으로 경쟁 상대로 여기고 있는 누군가가 그것을 먹고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초자아는 자아와 협상하여 최종 결론을 낸다.

 

먼저 그 가장 크게 잘린 케잌을 들어서는 그 자리에 있는 제일 막내에게 주는 것이다. 막내니까 제일 큰 것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 행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득이 있다. 비록 자신이 큰 케잌을 먹지 못하긴 했지만, 자신이 약자인 누군가를 챙겨준다는 명분을 얻고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가 그 케잌을 먹지 못하게 했다는 승리에 대한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 행동은 매우 영리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럴 경우 주변 사람들은 어떤 어떨까?

 

첫 번째는 일단 동조 형이 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막내가 제일 큰 케잌을 먹는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그런 판단을 내린 사람에게 순순히 동조한다. 막내가 그것을 먹어야 맞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 케잌을 막내에게 준 사람의 마음 속에 순식간에 일어난 계산을 짐작조차도 못한다. 그냥 최종적으로 표현되는 명분에 승복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자아가 덜 발달한 사람들이다. 또한 초자아 역시도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그리 영리하게 굴지도 못하고, 약삭빠르지도 않고, 뭔가 복잡한 계산을 할 능력도 안 된다. 그래서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산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기엔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요즘 시대처럼 풍족한 시기엔 살아가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욕심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 주변 평가도 좋다.

 

두 번째는 하급 질투 형이다. 딱히 뭔가를 계산할 능력은 안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자신의 몫을 챙기려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흥미롭게도 케잌을 나눠 준 사람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케잌을 받은 막내를 향하게 된다. 그래서 준다고 사양도 안하고 덥석 받았다고 욕을 하게 된다. 또한 보통은 막내에 비해서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나중에 지나가면서라도 한 마디 한다.

 

"그렇게 혼자서 큰 거 먹으니 좋냐?"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자아를 가지고 있긴 한데, 그것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흔히 찌질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에 여기에 속하며, 삶이 우울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욕심은 많은데 그것을 이뤄낼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초자아는 거의 발달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불만 형이 있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크게 잘린 케잌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먹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다. 기회가 되면 먹고자 했으나, 누군가 선수를 쳐서 그것을 막내에게 줘버렸으니 얼마나 불만이 생기겠는가? 설령 먹지 못하더라도 기회라도 있어야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기엔 상대의 명분이 너무 좋다. 그래서 결국 속으로 삭히면서 겉으로는 동조하는 척을 한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평범한 수준으로 자아가 발달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초자아가 그리 많이 발달을 하지 못해서 케잌을 나눠 준 사람만큼 영리한 판단을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살아가는 삶도 평범하다. 하지만 보통은 자신이 가진 자아를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편이기에, 상대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기 쉽다. 즉, 욕심은 많은데, 실행할 능력이 부족한 경우이다.

 

네 번째 유형은 상급 질투 형이다. 이것은 나눠 준 사람의 영향력이 자신과 비슷한 경우이거나 비슷하다고 믿을 때 나타난다. 하급 질투와 같은 질투 이지만, 이때는 불만이 막내를 향하지 않고, 정확하게 나눠 준 사람을 향한다. 그래서 '지가 뭔데 저걸 나눠주고 그래. 자기 것도 아닌데 말이야'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행동을 먼저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후회도 한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자아도 어느 정도 발달하고 초자아도 어느 정도 발달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삶의 질은 가장 높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첫 번째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 원아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가? ::

 

이 단순한 예로 우리가 가진 세 가지 능력이 발휘되는 과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원아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엄마 뱃속에서는 존재했던 원아가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이 예뿐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생각해도 우리들 머리 속에는 원아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그 어떤 기억도 없다. 먹고, 자고, 싸기만 했던 신생아 시절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긴 한데, 도대체 그 시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런데 사실 원아의 존재는 지금도 명백하게 존재한다.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가 그리 어렵지도 않다. 우리가 그것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원아가 느낀 것을 다른 세 가지 능력이 마음대로 변형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세 가지 능력이 그 감정을 느낀 것처럼 착각이 일어난다.


원아는 최초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주체이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본능도 자아도 초자아도 아니다. 그 능력들은 원아의 생존을 돕는 유용한 능력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 능력들이 제 역할을 하면, 원아는 행복해진다.

 

오직 원아만이 감정을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한다. 제대로 되었다면 행복을, 뭔가 틀어졌다면 불행을 느낀다. 우리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분명히 본능과 자아와 초자아의 조합뿐이지만, 우리의 내부엔 언제나 원아의 존재가 있다. 우리가 각자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은 오직 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세 가지 능력의 활동 결과일 뿐이다.

 

우리 모두의 원아는 엄마의 뱃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존재는 당연히 아주 여리고 약하고 겁이 많다. 이 존재는 엄마 뱃속이라는 안전한 장소에서 나온 후로 언제나 두려움이란 감정에 지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행복이라고 느낀다. 반대로 두려움이 커지면 불행이라고 느낀다.

 

두려움이 갑자기 증폭되면 분노를 느끼고, 두려움이 현저하게 줄어들면 기쁨으로 가득 찬다. 상대가 두려움을 상기시키면 질투나 불만을 품게 되고, 상대가 두려움을 줄여주면 호감이나 사랑 등을 느끼게 된다.

 

원아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나옴과 동시에 두려움이라는 유일한 감정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원아는 평생 동안 이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애쓴다. 하지만 원아는 안다. 그 끝이 결국엔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의 소멸임을 말이다.

 

원아는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이 숨겨진 본질이다. 우리는 본능과 자아와 초자아의 활동으로 인해 마치 그것들로 인해 판단된 결과가 우리들 자체라고 착각하지만, 결코 그것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되는 모든 것은 바로 원아가 느끼는 감정을 최대한 두려움 없이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결과일 뿐이다.


배고픔으로 인해 원아가 두려움을 느꼈다면, 본능은 그것을 고통으로 변형시킨다. 그런데 자아는 그것을 비참함으로 변형하거나 혹은 먹을 것을 가진 존재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로 변형한다. 마지막으로 초자아는 그것을 시련으로 변형한다. 그래서 그것을 뛰어 넘어야 더 높이 올라 갈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해도 이 세 가지 능력의 발달 상태로 인해 전혀 다른 해석이 내려진다. 본능이 발달한 사람은 고통으로 느끼고, 자아가 발달한 사람은 비참함과 질투를 느끼고 초자아가 발달한 사람은 그것을 넘어 서야 하는 시련으로 느낀다.


단지 그 차이로 인해 다른 행동이 나타날 뿐이다. 이때 우리들 안에 있는 원아는 서로 전혀 다르지 않다. 그저 엄마 뱃속에서 있을 때를 그리워하는 그런 약하고 겁이 많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여리고 약하고 겁이 많다. 세 가지 능력의 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남는 우리들 본질이 그렇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아무리 약한 사람도 모두 같다. 단지 우리는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갖게 된 세 가지 능력으로 인해 얼마나 두꺼운 갑옷을 입었느냐 만 차이가 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는 본질적으로 불쌍한 존재이다. 우리는 끝없이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아무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이 원초적 두려움은 언제나 함께 있다.

 

단지 세 가지 능력이 발달하면 발달할 수록 두려움은 제법 희미해져서 마치 없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즉, 원아의 존재가 사라진 듯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용감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감정을 느끼는 이상, 원아는 전혀 달라짐이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약 정말로 원아가 사라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이 사라진 인간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거꾸로 로봇에게 감정을 심어주고 싶다면,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들면 된다.

 

원아의 존재는 인간의 본질이며 한계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는 엄마 뱃속의 태아로부터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다. 이것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좀 더 용감한 척, 좀 더 겁이 없는 척, 좀 더 센 척 하지만, 사실 이런 행동이 우리가 겁이 있다는 것을 방증할 뿐이다. 우리가 두려움과 겁이 없다면, 용감한 척을 할 필요가 없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겁과 두려움이 없는 척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충분히 가진 것은 관심이 없다. 공기는 생존에 너무도 중요하지만, 누구도 공기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부족한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한계이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영속성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얻었을 때이다. 방법은 상관없다. 신을 믿든지, 이성을 믿든지, 아니면 스스로 로봇이 되어서 부품만 갈아 끼우면 영생할 수 있게 만들어도 된다.

 

원아는 존재의 영속성을 보장받았을 때, 두려움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 그래서 완전히 행복한 상태가 된다. 최고의 행복인 셈이다.

 

물론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이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러니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

 

우리는 모두 불쌍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 몸은 컸고 지식도 늘었지만, 언제나 우리의 본질은 엄마 뱃속에서 쫓겨난 원아일 뿐이다. 우리는 두렵고 짜증나고 화가 나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불쌍하다. 그러니 서로 비난하기 보다는 따뜻하게 안아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세 가지 능력이 자꾸 그것을 가로 막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좀 더 잘하고, 서로가 서로를 좀 더 불쌍히 여길 수 없게 만든다.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에게서 더 많이 뺏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겼다는 생각이 들면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겨우 자아의 능력으로 원아가 가진 두려움을 조금 잊게 해준 것뿐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없애는 법은 이 방법만 있는 것도 아니다.

 

더 나은 방법들이 훨씬 많다. 우리는 서로를 보살피고, 서로를 걱정해주며, 서로 등을 지켜줌으로써 두려움과 싸울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를 경계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원아는 더욱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삶의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원아를 기억해 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결국엔 원아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들 마음 속에 다른 존재들에 대한 관대함이 생겨난다. 나와 똑같이 여리고 불쌍하고 두려움에 떠는 원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솟아 오른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이 된다.

 

원아는 만족스럽게 웃을 수도 있고, 심술이 나 있을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삐져 있기도 하고, 불안함으로 인해 긴장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어린 시절을 경험하기에, 원아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는 각자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근원이 두려움이라고 해도 어른이 된 후, 원아의 상황은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 뭔가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이 있고, 자기 비하에 빠져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남들에게 쉽게 화를 내고, 질투심에 사로 잡힌 사람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남에게 폭력을 쓰기도 한다. 상처받고 뒤틀리고 고통받고 있는 원아들은 언제나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수 밖에 없다.


조금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원아를 불쌍히 여기자. 잘나 보이는 남들도, 성공한 듯 보이는 남들도 모두 다를 바 하나도 없다. 우리들의 원아는 모두 같다. 그저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니 자신을 조금 덜 괴롭히길 바란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돈이 적다고, 미래가 불투명 하다고, 케잌이 더 작은 것을 골랐다고 해서 스스로에게 너무도 심하게 뭐라고 하지 말자. 겁많은 원아는 금세 두려움에 빠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래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다. 두려움에 사로 잡힌 모든 존재는 반드시 외부에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를 꺼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원아의 보호본능이다.


조금만 더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면 한다. 그리고 남들에게도 조금만 더 관용을 베풀었으면 한다. 그것이 우리가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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