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두 개의 질문

아이루다 2016. 5. 18. 06:26

 

철학적 입장에서, 인간에 대한 두 개의 본질적 질문이 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아마도 철학이란 학문이 시작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첫째는 '왜 사는가' 에 대한 질문이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이다. 이 두 개의 질문은 중요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각자 중요하며, 또한 그 답을 찾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도 이 두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들 각자의 존재 이유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존재의 정의에 대한 만족할 수준의 답을 요구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 두 개의 질문에 대해 모두 답을 찾게 되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나는 어떤 존재이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만약 정말로 이것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한없이 참 평화로울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왜 사는지를 알고 산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 많은 갈등 상황이나 혹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대략 그럴 듯 한 수준의 설명이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개의 질문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이 두 개의 질문이 결코 같은 종류의 질문이 아니다는 점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왜 사는가를 묻는 질문과 나는 누가인가를 묻는 질문은 이렇게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까지의 설명을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사실 이 두 개의 질문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렇다면 이 두 질문은 과연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일단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 즉 존재적 이유에 대한 질문은 존재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이 어떤 가치가 있기에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왜 하는가를 궁금해 했다면, 그것은 바로 그 행동의 의미나 가치 혹은 영향에 대해서 생각한 것이 된다는 뜻이다. 즉, 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은 해야 할 합당하거나 혹은 적절한 원인을 찾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왜' 라는 질문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가치 부여의 의미가 된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종교적 입장이 아닌 경우라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왜 사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우리들도 그랬고, 우리 부모들도 그랬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랬다. 우리는 모두 그저 태어나서 자라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가 죽는 과정을 세대를 통해 무한히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결국 모두 무의미한 존재라는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해 온 모든 과학적, 역사적, 철학적 결론이 그것이다. 종교만이 유일하게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준다. 즉, '왜' 라는 질문에 답을 해준다.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든가 혹은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라는 말을 해준다.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개인적 입장이며, 또한 그것이 옳고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도 개인의 입장이다. 그래서 종교적 입장에서의 개인의 가치는 아직까지는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적어도 우리는 스스로 홀로 가치 있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신이라도 그것을 보장해줘야 한다. 물론 서로가 서로를 가치 있어서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끼리 서로 가치 있어 하는 것은 분명하게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나를 가치 있어 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죽고, 내가 가치 있어 하는 사람도 언젠가 죽기 때문이다. 둘 모두 죽으면, 있던 가치는 사라지고 만다.

 

이런 식으로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은 기본적으로 외부를 향하고 있다. 즉, 우리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때, 결코 홀로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가 함께 해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이유로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서는 그 답을 낼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외부와 관계를 맺거나 혹은 외부로부터 적절한 답을 얻어야 한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일단 가치 부여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물론 이 질문조차도 가치 추구의 의미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국회의원이다. 나는 사장이다. 나는 돈이 많은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자신을 정의 내린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질문은 그런 단편적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한 명의 인간으로써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일단 그것은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무리 훌륭한 철학자도, 정신적 지도자들도, 종교적 선구자들도 그 질문에 대신 답을 내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그들이 나를 정의해줬다면, 그것은 오직 피상적 정의가 될 뿐이다. 그래서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당신은 밝은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등의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나를 정의하기엔 너무 단편적이다. 나는 결코 그렇게 정의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질적 특징이다.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사람조차도 몇 마디 말로 정의될 수 없다. 아니 좀 더 과장해서 표현하면, 우리는 아예 인간의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는 과정은 탐구의 과정이라는 말을 한다. 즉,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반드시 그 결론에 도달할 필요가 없는 과정이다. 또한 오직 혼자서 떠나야 하는 여행이기도 하다. 물론 가끔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잠시라도 함께 하는 동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혼자서 가야 하는 여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내부를 향한 질문이 된다.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이 외부를 향하고 있다면,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내부를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왜 사는가 라는 질문과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가진 근본적 차이점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입장에서 우리는 더 이상 왜 사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사실 매우 불필요한 과정이다. 쓸데없이 많은 혼란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들만큼 왜 존재하는지가 명확한 것들이 없다. 자동차는 자동차대로, 숟가락은 숟가락대로, 가방은 가방대로 모두 그 용도가 명확하다. 즉, 너무도 왜 존재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서, 그 질문을 물어 볼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 목적이 없는 제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에게 자꾸 왜 사는가를 묻는 것은, 마치 자신을 하나의 제품화 시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우리의 용도를 알고 싶어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때는, 우리는 스스로 딱히 어떤 용도가 없음을 인정하는 상황이 된다.

 

물론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제품화 시키고 싶어 할까?

 

아마도 우리가 그런 짓을 하는 가장 합당한 이유는, 뭔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럴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렇게나 존재의 이유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럿이 사는 세상 속에서 도태되지 않고, 버림받지 않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그럴 것이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이 생에 전체에 걸쳐서 목메는 것이기도 하다. 사장은 사장대로,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 이길 바란다.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더 영향력이 큰 위치에 올라가고 싶어한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돈이 많아질수록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향력, 지배력, 역할, 가치, 효용성, 의미 있는 존재,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 중요도, 필요한 사람, 자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 등으로 표출된다.

 

이것들은 우리가 평생 추구하는 가치들이다. 엄마는 아이에게 가장 첫 번째가 되길 바라고, 아이는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 이길 바란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그것을 원한다. 그리고 죽을 때는 자신의 주변에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길 바란다.

 

그렇게 평생 동안 찾기 때문에 당연히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만족시킨다. 즉, 이 과정을 다시 표현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제품화 시켜서 그 쓸모가 명확해질 수록 강한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간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중요 부품으로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짓을 할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공동체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생겨난 것이다.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가졌거나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수 많은 존재들이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의 이유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즉, 이것은 완전히 에고로부터 출발하는 질문인 셈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어떤 용도로 필요하다는 특징 말고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제품은 기본적으로 생각을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설령 생각을 할 줄 알아도 이미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질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미 왜 만들어졌는지 완전히 알고 있는데, 자신의 본질에 대한 추가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다. 그래서 어떤 종교를 믿고, 그 종교의 신으로부터 신이 우리를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 완전히 믿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된다. 매우 불필요한 질문이다. 신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우리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은 너무 무의미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만 던져서 답을 구하고 난 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앞에서 말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이 되는 것이다. 그 용도가 너무도 명확해서 더 이상 추가적인 질문이 나오질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제법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는 있으나, 생명체의 단계에서 무생물인 제품의 단계로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접어 두고, 아니 아예 잊어 버리고, 이제부터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탐구를 해야 할 것이다.

 

설령 종교적 입장이라고 해도 신조차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우리들 스스로 찾아야 하는 답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이 아닌 인간이라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설령 그 답을 찾지 못해도 질문 자체는 던져야 한다. 그리고 삶은 평생 동안 그것의 답을 찾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왜 사는지에 대한 답만을 추구한다. 자신의 존재 이유만 찾으면 뿌듯함을 느낀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에서,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연인의 표정에서, 자신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회사에서, 자신을 보고 허리를 굽히는 부하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돈 앞에서 한없이 비굴한 사람들의 표정에서, 자신에게 제품을 팔기 위해 끝없이 미소 짓는 매장의 직원 앞에서 그것을 찾는다.

 

이것들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에고를 충분히 만족시켜서 행복하게는 해주지만, 사실 완전히 허상일 수 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자신이 아무리 중요해 보여도, 백 년만 지나면 그 존재조차 사라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는 잘해야 어딘가 화려한 무덤 속에서 썩어가고 있을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제품이 아닌 오직 생명체만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특히 오직 인간만이 이것을 해 낼 발달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결국 우리 인간만이 이 질문을 던지고 탐구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돈을 쓰고, 차를 타고,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고, 우주를 나가서 인간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을 수 있는 역량과 기회가 있기에 인간이란 뜻이다.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어려운 질문도 아니다. 또한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생 동안 마음 한 구석에 이 질문을 품은 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바쁘게 살 때는 잊을 수도 있고, 삶이 우울할 때는 한쪽 구석에 미뤄 둘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좋은 봄날에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볼 때,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 볼 때, 오랜만에 올려다 본 밤 하늘에 별을 발견했을 때, 친구가 슬퍼서 엉엉 울 때, 어딘가 낯선 곳을 여행 갔을 때,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질문을 꺼내 보면 된다.

 

뭔가 구체적으로 답을 낼 수 없어도 될 것이다. 아니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과정은 어렵지 않으나, 그 결론을 내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작은 힌트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맹목적인 삶에 대해서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그 오랜 시간 무의식 속에서 살아 온 삶에서 아주 잠시라도 진정한 의미의 의식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즐겁게 웃고 있는 그 순간에 자신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그 순간에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상이나 사진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지금 행복하니” 라고 물으면, 자신이 행복한지 여부를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응” 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작은 경험도 매우 놀라워서 스스로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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