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집중과 몰입

아이루다 2016. 6. 13. 09:13

 

집중이란 단어가 있고, 몰입이란 단어도 있다. 이 두 단어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사실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긴 하다.

 

기본적으로 이 두 단어는 모두 무엇인가에 대해서 온전히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둘의 차이점이라면 집중은 조금 의지적인 면이 있고, 몰입은 좀 더 무의지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래서 집중은 하는 것이고, 몰입은 되는 것으로 표현되곤 한다. 그리고 순서상 보통 집중을 하다가 보면, 몰입이 일어나는 순으로 발생된다.

 

이 두 단어의 차이에 상관없이, 집중과 몰입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뭔가를 해내고 싶을 때, 집중과 몰입은 특히 중요해진다. 집중하지 못한 채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대부분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나 특별하거나 난이도가 높은 일일수록 집중과 몰입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특히 몰입은 행복과도 아주 큰 관련이 있다. 집중은 무엇인가를 이뤄내는데 큰 도움을 주어서 행복 가능성을 높여준다면, 몰입은 그 자체로도 완전한 행복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우리가 집에서 누워서 TV로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관까지 가서 표를 끊어서 영화를 볼 때, 두 장소의 차이점은 단지 화면 크기나 혹은 음향 효과만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과 행동의 제한이 존재하는 장소로부터 발생하는 강제적 몰입의 차이다.  영화관과는 달리 집에서는 영화를 보다가 보면 언제든 중지할 수 있다. 그래서 집에서는 몰입을 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몰입 상태로 영화를 볼 때, 그 영화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감정의 일체화를 통해 훨씬 깊은 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감동과 재미와 행복을 아주 크게 증폭시킬 수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영화가 잘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필요하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흥미와 재미 그리고 집중을 만들어 내고 결국 몰입을 이끌어 낸다. 반면에 영화가 재미가 없으면, 집중과 몰입이 일어나지 못해서 결국 졸리게 되어 있다.

 

영화관뿐만 아니라 몰입은 아주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서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심지어 재미가 없는 회사의 일조차도 몰입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이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집중과 몰입을 행복하게 사는 법으로 소개한 책도 꽤나 된다.

 

문제는 무엇인가에 몰입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나 하고 싶지 않는 일에 몰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회사 일을 하면 스트레스 받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대로 집중과 몰입은 온전히 좋기만 한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좀 엉뚱하긴 한데, 이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믿음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평생 동안 무의식 상태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아주 가끔 그런 의식적 상태가 될 뿐이다.

 

우리는 매일 현재를 살아가면서 두 가지 일을 한다. 하나는 정보를 기록하는 일이고 하나는 감정을 기억하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뭔가를 기록하고 기억하기만 할 뿐, 순수한 의미에서는 결코 현재를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일정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기록된 정보와 기억된 감정을 떠올리면서 그것들을 통해 현재의 현재가 아닌, 과거의 현재를 재구성한다. 즉, 자신의 과거가 유익한 시간이었는지,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의미 있는 시간이었는지, 극적인 순간이었는지, 얼마나 화나는 상황이었는지, 신났던 시간이었는지를 그 당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건들이 과거로 변한 지금 현재에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의 현재 대부분은 현재를 위해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과거를 판단하는데 쓰인다. 물론 우리는 또 다른 시간의 시점인 미래를 생각할 때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미래의 자신을 꿈꾸거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예측하기도 한다. 그래서 걱정도 하고 기대도 하면서 지금을 보낸다.

 

그래서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과거의 회상 속에 잠겨 있거나, 혹은 미래에 일어난 일을 예측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는 현재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우리는 반드시 과거가 된 후 기억되거나, 일어날 가능성을 가진 미래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매일 매 시간 현재를 살아가는데, 그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와 미래뿐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거의 모든 시간에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꽤나 의식적으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매 순간 우리는 사실상 무의식일 수 밖에 없다. 사실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운전을 할 때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초보일 때 우리의 모든 신경이 곤두선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의식적이다. 하지만 운전에 익숙해질 수록, 우리는 편하게 운전을 하긴 하지만, 결국 무의식적으로 운전을 한다.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몹시 피곤한 일이다. 회사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일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을 하고 나면 몹시 피곤할 수 밖에 없다. 그냥 별 다른 생각 없이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는 늘 그런 것을 좋아한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하려고 하는 것을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집중을 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는 의식적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의 뇌는 몹시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것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일 때는 더욱 더 그렇다. 그래서 공부를 하려고 하면 늘 잡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결국 그래서 우리는 어떤 힘이 필요하다. 집중력이라는 말이 그래서 만들어졌다. 의지적으로 이뤄져야 하기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이번엔 몰입이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잊고 무엇인가에 완전히 빠져든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무의식이다. 더군다나 완벽히 무의식이다. 몰입된 뇌는 그 어느 때보다 무의식적이다. 시간의 흐름도 잊고, 자신이 어떤 공간에 있는지조차 잊는다.

 

즉, 우리가 행복의 열쇠로 꼽는 '몰입' 은 우리가 완전히 무의식 상태일 때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행복했던 순간들은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더욱 행복할 수록 그렇다. 주말에 시간이 빨리 가는 것도 그렇고, 놀이 공원에 가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는 금세 밤이 되어 버린다.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면 그 시간은 너무도 빨리 간다. 반대로 불행한 시간은 정말로 느리게 간다. 왜냐하면 그 순간마다 의식하기 때문이다. 몸에서 고통이 느껴질 때, 시간은 정말로 더디게 간다.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시간은 느리게 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말처럼 시간을 정말 천천히 보내고 싶다면, 하루 종일 시계만 바라보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정말로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금세 시계에서 벗어나 잡생각에 빠진다. 우리의 뇌는 그런 능동적 의식 상태를 몹시 꺼려한다.

 

우리의 뇌가 왜 의식 상태를 피하려고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생존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의식적일수록 뇌가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해서 그런지 모른다.

 

우리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그런 것들은 그냥 몸에 익어서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과연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철학적 의문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평생의 무의식 속에서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면,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산 것일까? 너무도 행복해서 늘 무의식적 속에서만 존재한 어떤 사람이 죽는 순간에 자신의 삶에 대해 유일하게 의식적으로 되었다면, 이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무엇을 했든지 간에 태어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죽을 때가 되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다양한 행복한 기억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다가 올 죽음으로 인해서 금세 사라질 것이다. 물론 영혼이 있고, 사후 세계가 있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없다면?

 

그리고 이 사람의 삶이 어느 깊은 산골에서 살아가다 죽은 토끼나 고라니나 바퀴벌레의 삶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이 사람의 삶을 기억해주는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괜찮은 것일까? 자식을 남겼으니 다른 것일까? 아니다. 이 역시도 몇 백 년만 지나면 사라질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의 삶일까? 우리가 그리도 꿈꾸는 평생 행복만 한 삶을 살았는데, 그 삶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의문이 든다. 이것은 뭔가 이상하다.

 

원래 이런 질문들의 결코 답은 쉽게 낼 수는 없다. 어렵기도 하지만, 뜬구름 잡는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행복하면 된 것 아닌가 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은 삶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가지 주의 깊게 볼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의식' 이다.

 

사실 의식은 이렇게나 발전한 현대 과학 기술로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의식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의식만이 온전히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무의식 상태일 때,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보더라도 사실상 무의식이다.

 

우리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서 안보이던 주름을 발견했을 때 잠시 동안 의식적으로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후로 하는 생각과 행동들은 모두 무의식적이다. 누군가는 주름을 없애는 방법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이 늙어가고 있었음을 아주 잠깐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식을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할까? 사실 이 글을 읽는 어떤 분이 있고 그 사람이 만약 이 글에 어떤 흥미를 가진 채 몰입해서 읽고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은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 글을 읽는 것은 맞다. 하지만 몰입했다면 사실상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행위이다. 그래서 이 글을 다 읽은 후, 이미 기록된 정보를 복기하면서 글을 읽을 때 느꼈던 감정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중에는 결코 현재에 의식적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지루하고 별로 흥미가 없다고 해서 그것은 의식적일까? 그 역시 아니다. 그것도 일종의 또 다른 무의식이다. 그리고 더 좋지 않은 점은 그때 우리의 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잡생각들이다. 어제 일어났던 사건, 어제 누군가 말했던 이야기, 일주일 전에 기분 나빴던 일, 자신의 실수, 내일 준비해야 할 과제, 1년 후 떠날 여행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글을 의식적으로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글 뿐만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의식적으로 하는 것은 몹시 힘들다. 설령 잠깐 동안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1분도 되지 않아서 우리는 금세 다양한 자신만의 잡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혹은 몰입 상태로 변한다.

 

사실 잡생각에 빠진 상태도 일종의 몰입이다. 단지 그 몰입의 대상이 계속 바뀌는 것이 문제이며 또한 그러다 보니 금세 그 몰입이 깨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스마트 폰을 볼 때도 집중과 몰입을 한다. 그래서 내릴 역을 지나칠 때도 있다.

 

잡생각에 빠진 상태가 가진 문제점은 바로 집중과 몰입이 가진 또 다른 장점인 어떤 일의 긍정적인 결과, 즉 성공적 수행이 안 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즉, 무엇인가를 제대로 하려면 집중하고 몰입해야 훨씬 유리하다. 그 일에 몰입하지 못하고 다른 잡생각에 몰입한 채 그 일을 하게 되면,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제 다시 의식이란 말로 되돌아가보자. 일단 의식은 우리의 뇌가 결코 선호하는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우리가 과거나 미래 속에 있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식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 의식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를 인식하는데 쓰인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의식은 현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의식의 현재는 오직 기록과 기억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인식과 해석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에 일어난 일이 현재에 해석되지 못하고 기록되고 기억되었다가 미래의 의식이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매일 반복된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만약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면서 현재를 인식하거나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현재를 사는데, 실제로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닌 것은 문제이다. 심각한 경우, 자신이 살았다는 것 자체도 모른 채 죽는 어떤 사람과 같다. 이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 문제가 있어 보인다. 다행인 것은, 우리는 아주 가끔 그것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하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미 고정된 과거를 떠올리거나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생각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결정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아무런 것도 인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피부에 닫는 공기의 느낌, 눈에 보이는 풍경, 코로 들어오는 어떤 냄새 등을 전혀 감응하지 못한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고서 냄새를 맡지만, 그 순간조차 자신이 꽃을 보고 냄새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그것을 인식되고 있다. 즉, 누군가 몰래 찍은 사진처럼 그렇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타인의 현재를 의식적으로 볼 수는 있다. 단지 우리는 자신의 현재를 의식적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남을 보듯이 나 자신을 현재에 의식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일까?

 

아니다. 그건 아닐 것 같다. 그 원리는 단순하다. 자신을 남처럼 보면 된다. 나 자신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가능해진다. 마치 자신의 사진을 찍는 사람처럼, 자기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말은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다. 우리는 객관적이기가 몹시 힘들다.

 

비슷한 원리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아니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능성은 있다.

 

나 자신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서 완전히 의식적으로 되는 것, 이것을 흔히들 명상이라고 한다.

 

명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건 간에, 그냥 인간이라면,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완벽한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 죽는 단세포 생물처럼 살기엔, 인간은 뭔가 좀 더 있어야 할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최대한 무의식을 원한다. 이미 말했듯이 행복한 시간 자체가 바로 극도의 무의식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마약에 취해서라도 행복한 것처럼 그렇다. 우리가 마약을 피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영구적이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부작용도 없고, 100년 동안 살 수 있으면서, 늘 마약에 취해있는 상태처럼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정말로 고민해봐야 한다.

 

인간의 형상을 타고 태어나서 인간이 아니라, 정말로 인간이고 싶다면 그런 고민을 해야 할 필요는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는 우리를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장치가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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