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불행해짐을 대처하는 법

아이루다 2016. 5. 11. 08:18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불운 혹은 불행을 경험하게 된다. 멀쩡하게 길을 가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지갑을 잃어 버리거나,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잘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나기도 하는 등등 그것들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불행이나 불운이 닥칠 때마다 가능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물론 이때 가장 흔하게 시도하는 해결책은 마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리라. 그리고 가장 괜찮은 해결책은 해결하는 과정은 매우 어려웠지만, 그것이 운 좋게 전화위복이 되어서 불운이 행운으로, 불행이 행복으로 변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결과가 늘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결국 포기하거나 받아들이는 방법을 써야 할 경우가 많다.

 

아무튼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하는 것 자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아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할지를 찾는 일이다.

 

이때 보통 '왜' 라는 질문은 문제의 원인을 분석해서 알려고 하는 것에 해당되고, '어떻게' 라는 질문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을 알아내는 것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쉬운 예로, 지진이 일어날 때, 지질학자들은 왜 그 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언제쯤 일어날지를 예측한다면, 지진이 일어났을 때 실제로 그 여파를 감당해야 하는 소방서나 정부 기관 같은 곳에서는 지진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고, 그 재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더 관심이 많다.

 

이 예를 통해서, '왜'와 '어떻게'는 누가 더 중요한지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모두 중요하지만, 사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왜' 보다는 '어떻게' 가 훨씬 더 관심 있게 다뤄지는 편임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보통 원리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해결책을 아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선호도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당연히 해결책이 훨씬 더 당장 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왜 일어나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어디로 피신을 해야 하고, 안전을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즉, 안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 같지도 않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알면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을 알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왜' 를 외면할 수는 없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지진이 자주 난다면, 왜 그 지역에 지진이 자주 날 수 밖에 없는지를 알아야 그 지역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갈지, 아니면 그냥 그 지역에 계속 살아도 될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우 수동적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사는 곳을 떠나 이사를 가는 것도 꽤나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사는 것이 꽤나 두려운 일도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진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외의 다른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하게 된다. 우리는 '왜' 라는 본질적 질문과 '어떻게' 라는 현실적 질문을 던지지만, 실제로는 주로 '어떻게' 에 집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들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원래 삶 자체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즉 행복할 때는 그런 질문들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불행한 삶을 살아갈 때 삶에 대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즉, 우리는 자신의 불행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즉, 이렇게나 불행함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 지, 그것을 극복하고 싶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고 싶어한다.

 

이 중에서 그나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적용 가능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종교에서만 왜 사는지에 대한 절대적인 입장의 답을 내줄 수 있다. 하지만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런 답을 얻을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왜 사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각자 사는 이유가 있다. 즉,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원리는 바로 그 답을 개인적인 입장, 즉 상대적인 입장에서 답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아이의 엄마가 사는 이유는 바로 아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아빠가 사는 이유는 자신이 꾸린 가정의 울타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이 사는 이유는 공부를 잘해서 대학교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여름에 갈 해외 여행을 가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누군가는 지금의 불행을 모두 이겨내고 밝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못해 본 것들이 너무 많아서, 누군가는 지금 너무 행복해서, 누군가는 아이를 낳아 키워보기 위해서, 누군가는 죽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각자만의 삶의 이유가 있다. 즉, 우리는 '왜 사는가' 에 대한 질문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답들은 모두 정답이 아니다. 이 답은 각자에게 맞을 뿐, 결코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어떤 원리를 알고 싶다면, 그것이 절대적이어야 합당해야 한다. 조건부로 합당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딱히 그것을 알지 못해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우리는 자신만의 사는 이유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지 만 고민해도 충분하다.

 

이미 지진의 예를 들어서 말했듯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알 필요는 없다. 우리는 주로 방법론인 어떻게 살아갈 지, 어떻게 대처할 지 정도만 알고 살아가도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결국 '왜' 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많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시도한 끝에 결국엔 아무런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가 바로 그때이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결국 다 실패하고 나면, 우리 앞에 남은 질문은 '어떻게'가 아니라 이젠 '왜' 인 것이다. 즉, '왜 행복 하려고 할까' 를 알아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불행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불행한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선택한 것일까? 아니다. 그들도 역시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를 끝없이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이다. 단지 그것을 찾지 못한 상태일 뿐이다.

 

물론 아직 시도하지 못한 많은 '어떻게' 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앞으로 꾸준히 시도를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도할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즉, 답이 없는 질문인 셈이다.

 

보통 어느 정도 행복하다가 갑자기 불행해진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 가고자 열심히 노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슬프게도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팔 다리가 잘렸다든가, 치유 불가능한 병에 걸렸다든가, 회사에서 쫓겨나 일용직으로 살아가고 있다든가, 가족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든가, 평생 모은 돈을 사기 당한 후 다시는 찾을 방법이 없다든가 하는 등의 불운은 도대체 복구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행복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원래 위치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혹은 서점에 가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을 찾아 보게 된다.

 

그런데 사실 어떻게 행복할까에 대한 답은 오히려 너무도 많아서 문제가 될 만큼 많다. 서로 각자 자신이 행복한 것을 추천하기에 바빠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고르는 것이 힘들 지경이다.

 

누군가는 음식이, 누군가는 여행이, 누군가는 영화 보는 것이, 누군가는 책을 읽는 것이, 누군가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누군가는 탁구를 배우는 것이,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누군가는 요가를 하는 것이, 누군가는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이, 누군가는 술을 마시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끝도 없다. 세계 여행을 가거나, 우주를 탐험하거나,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등의 조금 난이도가 높은 것들은 있지만, 결국 누구나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에 추천하는 것은 동일하다.

 

문제는 그들이 추천하는 행복이 나에게 맞느냐이다.

 

지금은 불행하지만, 한때 행복했던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을 행복하게 해줬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돈, 신체, 건강 등등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서 불행해졌다면, 결국 그것이 다시 돌아와야 행복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번 잃어버린 것은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따라 해봐도 원래 행복했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있을 수도 있다. 열심히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지를 시도하다가 보면, 우연이 자신에게 잘 맞는 행복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시간과 조건과 돈의 제약을 받는다. 즉, 모든 행복을 시도해볼 수는 없다. 그래서 선별적으로 자신이 할 만한 것만을 시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어떻게 행복할까’를 시도했다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뿐이다. 그것이 바로 '왜' 라는 질문을 떠올려야 할 차례인 것이다. 어떻게 해서도 안 된다면, 이젠 그것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 과정은 몹시 어렵다. 관성적으로 ‘어떻게’를 시도해 온 사람들이 어느 날, '왜 이렇게 하지' 라는 질문을 떠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이사를 해도 계속 지진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이제 잠시 멈춰서서 왜 지진이 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해야 한다. 원인 파악 없이 '어떻게' 라는 해결책만 찾아서는 결국 불운이 겹쳐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즉,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불행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신이 왜 행복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과거처럼 계속 어떻게 행복할지 만 고민하다가는 결국 시간과 돈과 기회만 날리는 꼴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힘들지만 어떤 면에서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왜 행복하려고 할까?' 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사느냐 라는 질문과 유사하다. 우리는 그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냥 타고난 성향이다.

 

그럼에도 왜 행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던져야 한다. 답이 없어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우리가 행복 하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DNA에 새겨진 본능이다. 이것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 하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히 어떤 기준점이 있다. 즉, 행복은 감정이지만, 자신이 행복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이성적이다. 그러니 자신의 행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점, 즉 행복 기대치에 대한 부분은 결코 본능적인 것이 아니다. 이 기준점은 시대별로 다르고, 문화별로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다.

 

즉, 우리가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거나, 자신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 자체는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과 우리가 행복하다고 판단하는 것 중 누가 더 중요할까? 물론 분명히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좀 더 본질적인 것이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행복한 삶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행복한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판단이 훨씬 더 중요하다.

 

즉, 왜 행복하고 싶어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의 답을 찾을 때 우리가 우연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는 왜 각자 자신만의 행복 기준점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에 대한 성찰이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 기준점은 건강이 된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예비 대학생에게는 등록금에 해당되는 돈이다. 누군가는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가는 것이고, 누군가는 국내 여행이라도 한 번 떠나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기준점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고, 대부분은 자신의 처지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일 년에 한 번씩 해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국내 여행을 한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각자만의 기준점을 정하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럴 수 있으니까 그렇다. 즉, 그런 행복 기준점을 가질 만큼 능력이 된다는 뜻이다.

 

둘째로 주변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렇다. 즉, 자신의 행복 기준점이 비슷하게 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만들어 지고 있다.

 

셋째로 자신에 대한 기대치이다. 즉, 현재의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그 정도의 행복은 누려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허영심이 될 수도 있다.

 

넷째로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믿어서 그렇다. 그 근거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이라면 경험해 봐야 한다고 믿는 것들이 기준점의 대상이 된다.

 

이제 불행해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기준점들을 다시 살펴보자. 과연 합당할까?

 

첫째로 그럴 수 있다면 맞다. 그런데 그럴 수 없을 때 그러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과거엔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하지 못하게 된 것들을 포기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니 불행하다.

 

둘째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세운 기준점은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우리는 우연이 그런 주변 사람들을 두게 된 것뿐이다.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옮기거나 모임에 빠지면 지워질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 동안 수 많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 자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힌트를 얻었다. 그런데 다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젠 버려야 할 때가 아닐까?

 

셋째로 자신에 대한 기대치는 처음부터 허영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노력하는 사람은 열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노력 없이 얻고자 한다.

 

넷째로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믿는 근거는 모두 TV 드라마, 영화, 친구, 이웃, 친척, 소설 등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즉,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모든 기준점은 실제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저 마음 속에서 만들어진 것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하고 불행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바꿀 수만 있다면, 똑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불행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으로 바뀔 수 없을까?

 

당연히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기준점을 스스로 정했기 때문에, 기준점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다. 문제는 기준점을 바꿀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사실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존에 만들어 놓은 기준점은 의식적으로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정해진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할 수 있거나, 할 가능성이 높은 욕망들을 만들고 그것을 실현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준점이 생긴 것이다. 매년 해외 여행을 가는 사람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조건이 되고 상황이 되니까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어느 날 가진 돈을 다 날려서 더 이상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면, 그때 갑자기 기준을 바꿔서 자신은 해외 여행은 못 가더라도 국내 여행을 즐기면서 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안 된다.

 

그럼에도 힌트는 있다.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초기화, 즉 리셋이 필요하다.

 

사실 행복하다가 오랜 시간을 불행했다가 다시 행복해지는 사람이 겪는 과정이 바로 이것이다. 삶의 행복 기준점을 리셋 시킨 사람은 다시 원래 조건을 되찾지 못해도 행복해질 수 있다. 단지 리셋을 하기 위해서는 포기라는 고통스러운 과정과 받아들인다는 어려운 난제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왜 행복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가치 있는 정보이다.

 

행복하다가 불행해졌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리셋 시켜야 한다.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노력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집착이고 한없이 어리석은 행동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행복 기준점을 초기화 시키지 못하면 남은 생은 결국 불행함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가능하다면 행복한 것이 낫지 않을까?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면서 평생 불행하게 사는 것과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느냐를 결정하는 것 중 과연 어떤 삶이 더 나을까?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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