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그것은 욕망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루다 2016. 5. 13. 10:47


우리 인간에게는 평생 살아가는 동안 풀어야 할 숙제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해지기' 이다. 이것이 숙제인 이유는, 행복해지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는 왜 행복해지기가 쉽지 않을까?

 

거기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이 문제는 사실 아주 오래된 것인데, 아무리 오랫동안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와도 도대체 풀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바로 행복을 얻는 방법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주로 행복을 얻는 방법은 사실 단순하다. 그것은 어떤 다양한 원인들로 희망 혹은 소망 혹은 원하는 것 등등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모두 욕망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총 동원해서 그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행복해진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점점 희미해진다.

 

배가 고파지면, 먹을 것을 찾고, 먹은 후, 포만감으로 행복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행복은 얻는 방법은 단순한데, 문제는 어떤 계기로 인해 품게 된 욕망을 도저히 실현할 수 없거나, 혹은 그 욕망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결국 실패해서 원하던 행복을 얻지 못했을 때 생겨난다.

 

이런 식으로 이루지 못한 욕망은 좌절을, 실패한 욕망은 분노를 생성한다. 이 둘 모두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 불행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행복을 얻으려고 했다가 행복은커녕 불행해지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건너야 할 가장 큰 방해물이다.

 

인류는 그래서 그 동안 나름 많은 생각을 해 왔다. 철학자들도 과학자들도 그냥 일반 사람들도 모두 행복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을 했다. 그리고 이 집단 지성은 어떤 결론을 내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욕망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조절하지 못하면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란 경고를 했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조차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어느 정도 선에서 조절하려고 애쓴다. 가능하다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욕망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행복해지기 위해서 알려진 또 다른 조언이 있다. 그런데 이 조언은 앞의 조언과 완전히 반대이다.

 

그것은 바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욕망을 품고 그것을 위해 도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욕망을 줄이는 것과 욕망을 향해 달리는 것, 이 전혀 다른 두 개의 해결책이 각각 행복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떤 장소를 가는데 서로 완전히 반대인, 동쪽으로 가거나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 행복해지고 싶은데 욕망을 줄여야 할까? 아니면 욕망을 향해 달려야 할까?

 

사실 욕망을 줄이는 것은 수동적인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일을 벌이기 보다는 수습하는 방향으로 살아간다. 반대로 욕망을 향해 달리는 것은 능동적인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일을 정리하기 보다는 끝없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난이도로 따지면 이 둘 모두 쉽지 않다. 욕망을 줄이기도 힘들고, 욕망을 향해 달리기도 힘들다. 우리는 그냥 행복해지고 싶어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세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노력할 필요도 없고, 수동적으로 욕망을 줄일 필요도 없다. 그것은 바로 재미를 추구하는 삶이다.

 

사실 재미는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지만 순간적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신나게 웃는 것처럼 그렇다. 방송을 보는 중에는 즐겁지만, 끝나면 남은 것은 없다. 우리는 이때 채널을 돌림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한다. 또 다른 채널에서는 또 다른 재미 있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

 

TV는 100개 이상의 채널에서 24시간 방송이 나오고, 영화는 매주 개봉하며, SNS는 초 단위로 글이 올라온다. 도대체 하루 종일 그것만 잡고 있어도 다 즐기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재미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재미를 추구할 때 당연히 즐겁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임시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것도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근원적인 행복을 원한다.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고, 조건에 상관없는 행복 말이다.

 

재미가 우리를 완전히 책임져주지는 못한다.

 

물론 재미있게 사는 것도 행복일 수 있다. 하지만 재미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미 알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지를 말이다. 그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이다.

 

현대 사회가 딱 여기까지 와 있다. 재미는 늘었지만 외로움은 커졌다. 과거나 현재나 불행은 동일하지만, 그 불행함의 종류가 달라졌다. 예전에 여럿이서 불편했지만, 요즘은 혼자서 외롭다.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제 원래 해결책으로 돌아가야 한다. 욕망을 줄이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을 줄이면 행복할 방법도 없다. 행복 자체가 욕망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방법은 반쯤만 맞는다. 욕망을 줄이면 불행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능동적인 해결책인 욕망을 향해 달리는 방법을 써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것은 열정을 말하는데, 열정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고나야 한다. 뭔가 꽂히는 것이 있을 때 열정이 생겨날 수 있다. 자신이 가치를 느끼는 대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또한 위험 요소가 있다. 달리면 넘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천천히 가야 덜 위험한데, 달리기만 했다가는 언제 넘어질지 모른다.

 

열정만 가지고 살았다가는 자신의 삶이 망가질 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해결책 모두 실제로 제대로 된 답이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할 수 있지만, 현실에 적용하기엔 문제가 너무 크다. 욕망을 줄이고 행복하지 않게 살거나 욕망을 추구하다가 큰 시련을 겪을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정말로 그 어떤 방법도 없는 것일까?

 

다행히도 해결책이 하나 있다. 하지만 난이도가 무척 높다. 욕망을 줄이는 것이나 욕망을 향해 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행복 위에 올려 놓은 것들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원래 행복을 그 자체로 끝내지 않는다. 우리는 행복을 느낄 때 그 위에다가 자부심, 우월감, 권리 의식 등을 얹어 놓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더욱 더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행복한 경험을 남들에게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SNS 등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한 순간을 기록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기 위해서 서로 만난다.

 

이것이 문제이다. 사실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욕망은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소망, 희망, 바램, 꿈 등으로 포장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욕망은 원래 모습으로 재해석 되어야 한다. 오히려 욕망은 정말로 좋은 것이다.


욕망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의욕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야 요리를 한다. 배가 부르면 그저 누워있길 바란다. 욕망은 인간 행복의 가장 기본적 출발점이다.

 

실제로 정말 문제는 욕망을 이루고 난 후의 우리들의 행동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욕망을 추구한 후, 행복을 얻으면,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 한다. 즉, 어떤 행복을 얻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나고, 그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만들고 그리고 가장 큰 문제인, 그 행복에 대한 권리 의식이 만들어 진다.

 

즉, 나는 이 정도의 행복은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 믿는다.

 

특히 자신의 행복 경험을 남들에게 이야기 하면 더욱 문제가 커진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기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살다가 세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가서 집들이를 한 사람은, 다시 두 칸짜리로 이사를 했을 때 사람들을 초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 사람들에게 기대치가 생겼고, 자신에게도 이미 세 칸짜리 집에 대한 권리 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두 칸짜리 집에서 세 칸짜리 집은 행복이지만, 세 칸짜리 집에서 두 칸짜리 집은 불행이 된다.

 

우리는 욕망을 늘리는 것은 쉽지만, 줄이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 욕망을 이뤘을 때 얻는 행복을 자신과 동일시 시켜놨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이 커지면 자신도 커지고, 집이 줄면 자신도 준다.

 

시장에서 떡볶이를 먹든,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든 사실 각각 맛있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스테이크에 대한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은 스테이크 정도는 먹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그 다음엔 무엇을 먹어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고, 이것을 해결하면 행복해지기는 무척 쉽다.

 

욕망을 가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아니, 욕망이 없어서 의욕이 없는 증상을 우울증이라고 할 만큼, 욕망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단지 욕망을 통해 행복을 얻었다면, 그것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 그냥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즉, 그 어떤 욕망도 행복으로만 끝을 내야지, 그것을 자신과 일치화 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 행복을 즐기는 자신에 대한 우월한 평가, 가치, 당연함 등을 없애지 못하는 한, 그 어떤 해결책도 무용하다.

 

즉, 진정한 해결책은 욕망을 줄이는 것이나 욕망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순수한 자신만의 행복으로만 환산 시켜야 한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고 싶어서 올랐다고 해도, 그 자체로 만족하고 끝을 내야지, 그것을 계기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우리는 앞 산만 올라갔다 와도 오늘 게으른 자신을 극복하고 운동을 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첫 번째는, 이미 말했듯이 자신의 행복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입 밖에 내면 행복은 증폭된다. 증폭되는 이유가 바로 자부심을 갖게 하고 가치화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은 행복을 증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인정은 기대치가 된다. 당연한 것이 된다. 해외 여행을 한번이라도 한 사람은 더 멀고 더 비싼 곳을 향해야지, 가깝고 싼 곳을 가면 왜 그런 곳에 가냐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더 먼 곳을, 비싼 곳을 찾으려고 한다. 이것이 여행 자체의 행복을 망친다.

 

두 번째는, 자신을 끝없이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자아실현은 언뜻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사실 무척 위험한 말이다. 자아는 에고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행복 일치화를 통해 에고를 만족시킨다. 그러니 그것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꼭 필요하다.

 

세 번째는,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정말로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무엇인가를 하는데 과정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의심을 할 필요가 있다. 원래 행복한 일은, 하는 중에도 행복해야 한다.

 

네 번째는, 욕망의 결과, 즉 원했던 행복을 얻지 못함에 대해서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 물론 원했던 행복을 얻지 못해서 기분이 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남들에게 자랑할 기회를 잃었다든가, 남들이 알면 얼마나 자신을 비웃을까 하는 등의 생각을 하면 더욱 더 문제가 커질 뿐이다.

 

더군다나 이미 남들에게 잔뜩 자랑을 해 놨다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느낄 좌절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바뀔 수 밖에 없다. 조용히 했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살인을 부를 만큼 심각한 일이 되기도 한다.

 

다섯 번째는, 욕망을 얻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하기에, 온갖 방법을 다 쓰게 된다. 그것이 거짓말이기도 하고, 반칙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그 결과만을 원하는 것이다. 과정을 통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행복의 결과를 통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자신과 일치화 시켜서 행복 하려는 것이다.

 

그러기에 힘들어도 참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결과로 얻는 행복이 아주 크기 때문에 힘듦과 양심의 가책 조차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욕망이 순수하게 그런 행복을 주기는 불가능하다. 그 행복이 일치화 되어 자신을 좀 더 나은 존재라고 느끼게 할 때만 가능하다.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은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자신 그 자체로 여긴다. 어느 행복까지 경험했는지 여부를 두고 자신을 평가한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겁도 많이 난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도 된다. 우리가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된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가나 원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떤 길을 갈지는 원래부터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맞는 길을 가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길을 가고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지, 길가에 서서 자신을 응원해줄 사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여정을 끝낸 후 신문에 기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순수한 욕망만이 행복을 위한 유일한 열쇠이다. 이것이 아이들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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