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피해의식, 두 번째 이야기

아이루다 2016. 5. 2. 10:11

 

행복하고 싶다. 그런데 행복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가끔 행복하긴 하다. 그런데 행복하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을 때도 제법 된다. 어떨 때는 신나고 즐겁고 흥분되며 아무 근심이 없는 듯 밝지만, 어떨 때는 스트레스를 받아 있고 화가 나 있고 주변의 온갖 것이 다 걱정이 되고 신경도 쓰인다.

 

행복함과 불행함은 매일 매 순간마다 교차하는데, 도대체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인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잘 생각해보면 뭔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는데, 어떤 이유들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고 싶은 일들을 언제든 할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더 많이 행복해질지 모르겠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해서 지금껏 언제나 하기 싫은 일만 해 온 것도 아니다. 지난 삶 돌이켜보면, 최대한 하고 싶은 일을 해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니?' 라는 질문 앞에서 잠시 멈칫하게 된다. 우리는 왜 행복하다고 생각하기가 힘든 것일까? 도대체 왜?

 

그것은 아마도 불행한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매일 매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너무 자주 발생하고 반복된다.

 

어디를 가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은 존재하기 때문에, 신경은 언제나 날카롭게 서있게 된다. 하도 익숙해져서 이젠 그것이 경쟁으로 인한 긴장임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이제 그저 그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처음부터 왜 경쟁을 시작 했는지를 잊어 먹어 버리고 말았다. 행복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데, 이젠 돈이 있으면 행복하다.

 

또한 끝없이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는 언제 손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그래서 늘 경계를 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의도를 자꾸 의심해야 하며, 서로가 그래야 한다고 조언해 준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한다. 그냥 친절한 사람들은 없다고 한다. 그들이 뭔가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집은 더욱 더 견고한 자물쇠로 잠궈야 한다.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조차도 불행함을 경험한다. 길을 다니다가 처음 보는 누군가의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나 배려 없는 행동으로 인해서 물리적 혹은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어떤 이들은 직장 자체가 그래서 매일 고객 응대를 하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심한 압박을 받는다.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생각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말들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꼭 집어서 나를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듣다 보니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그 사람이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회사의 상사일 때일 것이다. 친구라면 싸우기라도 하지.

 

그래도 친구라면 동급이니 따져 물어 본다.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냐고 말이다.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답을 한다. '별 생각 없이 한 얘기에 왜 그렇게 화를 내냐' 고 말이다. 어떻게 친구는 생각도 없는데 말을 할 수 있을까? 혀에 뇌가 있는 것일까 싶다.

 

불행한 기억은 정신적인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경험에도 있다. 우리는 가끔 감기에 걸리고, 칼에 베고, 어딘가에 발끝을 찌고, 뛰고 있던 누군가와 부딪히기도 한다.

 

이렇게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많은 불행함이 매일 기억된다. 그리고 이 기억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기 보다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불행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뭔가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가 행동한다고 해서 매일 일어나는 불행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겪은 기분 나쁜 일은 내일 또 일어 날 것이고, 오늘 들은 욕은 내일 또 들을 것이다. 상처는 언제 어느 순간에 받게 될지 모르고, 회사에서 잘리거나 애인과 헤어지는 등의 커다란 불운도 언제나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우리는 매일 죽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행복해야 하니 뭔가 노력을 해봐야 한다. 물론 육체적 문제를 대비해서 보험에 들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본격적으로 행복해지려면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이렇게 육체적 문제는 그나마 쉽게 해결책이 생긴다. 그렇다면 정신적 문제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우리는 어떤 문제들로 인해 힘들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을 나열해보자.

 

질투심. 꽤나 다루기 힘들고 느껴질 때 견디기 힘들다.

 

. 화를 내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살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난다. 그것도 속으로 나는 경우는 더욱 더 힘들다.

 

상처. 남들이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불필요하게 상처 받는 부분도 있지만, 사실 사람들의 무신경하고 배려 없는 말이 원인이 될 경우도 많다. 단지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아쉽다.

 

열등감. 세상엔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예쁜 사람들도 많고, 몸매 좋은 사람들도 많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도 많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들도 많고, 운동을 잘하는 사람들도 많고, 돈이 많은 사람도 많고, 직업이 좋은 사람들도 많고, 큰 행운이 찾아온 사람들도 많다. 그런 그들을 볼 때마다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그들과 우리의 삶 자체가 비교되면서 많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실수.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부주의하거나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했던 일들에 문제가 생긴다. 실수는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양하지만, 그 실수를 질책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작은 실수로 인해 크게 혼나기도 하고, 큰 실수를 해도 관대하게 넘어가 주기도 한다. 아무튼 실수는 인간이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이다.

 

불운.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회사 옆자리에 너무 시끄러운 사람이 오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공부할 책을 집에 두고 오기도 한다. 식당에 갔는데 자리가 없고, 지갑을 잃어 버리기도 한다. 그나마 이런 불운은 견딜 만 하다. 어떤 불운은 삶 자체를 변화 시킨다.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망해서 잘리기도 하고, 몸에 병이 나기도 한다. 심지어는 갑자기 죽는다.

 

한참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만 나열하자. 나머지들은 이것들의 아류 작이다. 자기 비하나 자학도 우리를 불행하기 하는 것들이긴 한데, 사실 그런 감정들은 질투심, 열등감, 실수 등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2차 파생 감정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모두 각자만의 힘들게 하는 이유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각자만의 해결책으로 그것을 다루려고 애쓴다. 그래서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 성공하면 행복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고, 실패하면 불행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모든 것은 가능성이며, 불확실한 미래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고,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실패해서 불행하게 산다. 이것은 왜 그럴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 그런 것이 있을까?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고 있는 신이나 혹은 불운을 불러오는 존재들에게 밉보여서 그런 것일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사실 답이 별로 없다. 나를 만든 신이 나를 미워하는 데는 신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딱히 신에게 나쁘게 보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신이 나를 미워하니 어쩔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신의 뜻을 알 수는 없다.

 

불운을 불러오는 존재가 주변에 맴돌 때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그 존재를 인식하기도 힘들고, 안다고 해도 그들과 대화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가끔 점을 보거나 굿이나 하게 될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이 그렇게 신뢰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들의 역할은 잠시 접어 두자.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을 챙겨보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앞에서 나열한 것들 중에서 실수나 불운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저 실수를 덜하고 운이 좋길 바랄 수 밖에 없다. 사실 이 영역이 바로 신의 영역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실수를 하지 않고 잘 이뤄지기를, 삶에 불운보다는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신을 향해 기도를 한다.


하지만 남은 것들에 대해서는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질투심을 덜 느끼거나, 화를 덜 내거나, 상처를 덜 받거나, 열등감을 덜 느끼면서 살 수는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될까?

 

이 안에 숨겨진 우리의 본질적 원인은 무엇일까? 사실 질투, 화, 상처, 열등감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피해의식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경험한다. 경쟁 사회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친 형제 사이에서도 경쟁한다. 외동으로 자란 사람이라고 해도 어린이 집에, 유치원에 가면 결국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늘 이길 수만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기는 것이 자신의 기본적 권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누구도 이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지는 것만을 원통해 한다. 노력을 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태도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논리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안된다. 


우리는 이길 때 행복하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기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니 지는 것은 모두 피해를 입은 것이 된다.


제대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지만, 우리들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면 말이 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는 늘 이길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진다.

 

이미 타고난 것들은 거의 평생 동안 유지된다. 예쁘거나 잘생긴 외모, 큰 키, 좋은 몸매, 높은 지능, 뛰어난 운동 신경, 타고난 사교 능력, 언어 능력, 예술적 재능 등등 많은 것들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중요 분야에서 이미 패자이다. 그리고 패자이기에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거니 우리가 피해의식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불공정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렇게 태어나길 바래서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우연이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고, 이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잘못도 없는데 패자가 된다. 피해를 입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런 경험은 당연히 억울함으로 전환된다. 잘못도 없이 피해를 입는 것, 이것이 바로 억울함의 본질이다. 그래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피해를 준 사람들도 역시 일부로 그런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피해로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피해의식이 안 생길 수가 없다. 더해서 표현도 잘 못한다. 그것을 표현하면 바로 질투, 열등감이 된다.


가해자가 없는데 피해자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무척 억울한데 그 억울함을 호소 할 곳이 없다. 했다간 질투심에 불타는 사람, 열등감 덩어리, 자주 화를 내는 사람, 불필요하게 상처 받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런 상황들은 우리가 거의 기억도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모두 경험되어 버렸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미 수 많은 좌절을 경험했고, 패배를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로 인해서 누구나 다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즉,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다. 잘생긴 사람에 대해서 피해자이고, 똑똑한 사람에 대해서 피해자이고, 운동을 잘하는 사람에 대해서 피해자이다. 돈이 많은 사람에 대해서 피해자이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에 대해서 피해자이다. 우리는 1년 먼저 태어난 누나, 오빠, 언니, 형에 대해서 피해자이고, 우리는 1년 늦게 태어난 동생에 대해서 피해자이다.

 

우리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피해의식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차이점은 이 피해의식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태도이다.

 

당연하게 피해의식이 적은 사람일수록 관대하다. 그러니 잘난 사람들이 관대할 수 밖에 없다. 못난 사람이 관대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감정적 행동에 대해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열등감을 느끼거나 질투를 느끼거나 화를 내거나 상처를 받을 때는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아무런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할 리가 없다.

 

왜 그럴까? 우리는 왜 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까? 그 이유가 바로 우리는 이미 피해의식을 확실하게 합리화 해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해서 각자 너무도 견고하게 이성적으로 이론화 시켜놨다.

 

그리고 밖으로는 이 피해의식을 정당성이란 이름으로 정의해 두었다. 남들이 보기에도 전혀 이상하거나 비 이성적이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상식' 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상식이 문제다. 우리는 매일 상식과 상식의 충돌을 목격한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를 보면, 각자 서로의 잘못을 지적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면서 서로 상식을 가르친다. 서로가 상식을 기준으로 싸운다. 그렇다면 왜 상식이 충돌을 할까?

 

상식은 말 그대로 누구나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싸움만 나면 상식은 돌변해서 각자마다 다른 상식 기준점을 가지고 싸운다.

 

상식이 이런 이유는 상식이 바로 우리의 피해의식을 기반으로 해서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의된 상식은 외부로는 정의로움이란 말로 변형된다. 즉,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때리면 이것은 잘못된 행동이 된다. 누군가 우리 집에 들어오면 범죄로 간주한다. 상식적으로 이 말은 정당하다. 하지만 어떤 누군가의 상식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토록 확실하게 믿고 있는 '개인의 권리’, '집이나 땅 문서', '생명의 소중함' 등조차도 사실 원래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권리가 도대체 누구로부터 주어졌단 말인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사실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우리들 것이라고 믿는다. 산에 나는 봄나물을 캐는 것은 우리들의 권리이다. 산이 허락해준 것도 아니고, 나물을 키운 대지와 태양이 허락해준 것도 아닌데, 우리는 딱히 주인이 없는 것이고 캐는 노동을 했으니 내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그 산에 사는 고라니나 토끼에게라도 허락을 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결함이다.

 

피해의식은 권리를 기반으로 만들어 진다.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 할 권리, 어린이 집에서 선생님을 독차지 할 권리, 예쁜 사람이 될 권리, 돈이 많을 권리, 빠르게 달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단지 그것을 할 수 없이 태어났으니, 이것이 불행한 것이 된다.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악마가 그럴 수 있게 해준다고 하면 언제라도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된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닌 것을 대상으로 그것을 갖지 못한 것을 피해라고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피해의식의 실체이다.

 

어떤 상대를 질투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시작한다. 근거가 전혀 없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데, 왜 너만 되었냐는 마음이 질투심을 만들어 낸다.

 

어떤 상대에게 열등감을 느낄 때, 우리는 그들처럼 잘나지 못함을 스스로 질책하고 괴로워한다. 근거는 전혀 없지만 나도 그렇게 잘났어야 하는데, 못나게 태어나서 견디기가 힘들다.

 

어떤 상대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왜 나에게 그러는지 궁금해 한다. 사실 그건 아무런 이유가 없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건, 나에게 그럴 만 했기 때문에 한 것이다. 왜 나에게 이러는지 만 생각할 뿐, 왜 나에게 그러면 안된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봄나물은 잘못해서 봄마다 뽑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봄에 태어난 것뿐이다.

 

어떤 상대에게 화가 났을 때도 권리에 대한 정당성은 명확하게 존재한다. 누군가 내 권리를 침해 했다고 느끼면 화가 난다. 내가 피해를 받은 것이다. 그 권리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본인은 그것이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만든 법에 규정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의 상식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들의 시작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단 하나의 세포였다. 이 하나의 세포가 태양의 에너지를 간접적으로 섭취하여 이렇게 큰 사람이 된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모두 태양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태양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양이 살아 있는 존재도 아니고,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원래부터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양은 그저 거대한 중력으로 인해서 스스로 핵융합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태양과 달라야 할까? 우리는 자식을 키우면서도 권리 의식을 가진다.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아무런 근거 없는 권리 의식을 갖고, 결국 그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피해의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피해의식은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많은 우울한 감정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엔 불행해지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한가지 방향만을 고집한다. 권리가 없었음을 인식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서 행복해지려고 한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어떤 운 좋은 사람들만이 그 권리를 어느 정도 만족할 수준으로 누려서 행복한 삶을 산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단지 운이 좋을 뿐이다.

 

그래서 행복하고 싶다면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 행복하고 싶다면 권리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가 원래부터 없었음을 각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은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가진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기보다는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행복한 사람이 된다.

 

아주 단순한 해결책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생 잃어버린 권리를 찾고자 노력하다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자신이 받은 피해가 결코 공정하지 못하고 정당하지 못했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그래서 수 많은 이론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끝없이 이야기 할 것이다. 나는 옳다고 말이다. 남들은 우리 이야기를 듣겠지만, 내가 말하는 '나' 는 듣는 사람의 '나'가 될 뿐이다. 즉, 나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 입장에서 상대가 아닌, 자신으로 해석될 뿐이다. 그러니 자신과 상관 없을 때는 공감은 하겠지만, 둘이 충돌이 나면 당연히 각자의 옳은 나를 기준으로 싸우게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결코 그런 주장 안에 자신의 근거 없는 권리와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피해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히 옳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자각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설득될 수 없다. 해봐야 싸움만 날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데, 어떻게 그것의 문제점을 자각하겠는가? 그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실 성찰을 해야 하는데, 단지 생각만 한다.

 

성찰이 없는 생각은 단지 끝없는 자리 합리화로 사용될 뿐이다. 남을 재는 잣대를 자신에게 들여대지 못하는 한, 우리는 평생 동안 이중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옳고 정의롭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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