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외로움과의 싸움

아이루다 2016. 4. 20. 14:26


 

지난 글에서 외로움에 대한 숨겨진 본질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란 감정 속에는 심심함이나 혹은 두려움과 같은 직접적인 원인 이외에도, 공허함 속에 숨겨진, 존재의 이유 부재라는 무의식적 두려움이 있다고 썼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리 인간은 서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도 냈었다. 사람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 그 어떤 상황보다도 존재의 이유를 찾기가 쉽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만큼 그것이 강한 것이 어디 있으랴.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꼭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진솔하고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실 스스로 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원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맺길 원한다. 그럼에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은 이유는, 자신이 원인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원인으로 인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것이다. 혹은 운이 없어서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나 점점 심해지는 관계의 가벼움은 이런 상황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요즘 사람들의 관계의 특징은 바로 즉시성과 효용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요즘 서로 필요할 때만 서로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기술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얘기를 할 수 있는 편리함으로 인해서 깊은 관계보다는 넓은 관계를 선호하는 형태로 변했다.

 

특히나 온라인 상에서는 동시에 여러 사람과 얘기하는 것도 가능해져서 특정한 시간을 누군가에게 집중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름 이득도 될 수 있다. 시간 낭비도 적고 돈 낭비도 적으니까 말이다. 이동할 필요도 없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복잡한 곳에 나갈 필요도 없다.

 

덕분에 우리는 관계 맺기의 불편함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무거움을 없앤 대신, 관계의 진중함도 없애버린 것이다. 원래 가벼운 것은 부담이 없어서 좋지만, 그렇기 때문에 버릴 때조차 그다지 아깝지 않다.

 

원래 가치라는 것 자체가 자신이 가진 귀중한 자원, 즉 시간과 노력 등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엄마에게 아이가 그리 소중한 이유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가치 역시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쉽게 얻은 가치는 잘 인정하지 않는다. 부러워는 하지만, 그것을 가치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부러워할지라도 그것을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같은 돈을 벌었더라도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번 사람을 훨씬 더 값어치 있다고 평가한다.

 

아무튼 우리는 관계 맺기가 편해지고 가벼워진 반면에 깊은 관계를 맺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그런데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론이 바로 타인과의 진솔한 관계이니,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버린다.

 

원래 가벼운 관계는 심심함을 해결해주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그래서 이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존재 가치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그저 재미로만 의미가 있다.

 

더군다나 이것은 두려움도 없애주지 못한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 곁에 있어줄 사람들은 즐겁게 함께 놀던 사람들이 아니다. 사실 재미로 만나던 사람들은 우리가 힘들 때 반드시 떠나게 되어 있다. 같이 있으면 재미가 없어지는데 왜 곁에 머물겠는가? 그때는 오직 가족이나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가 맺는 관계들은 점점 더 가볍고 재미를 추구하는 형태로 변형되고 있다.

 

이것이 요즘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서 더욱 더 외로움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이다. 대가족이 같이 살았던 과거와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알고 지냈던 예전에 비해서 요즘은 훨씬 덜 불편하고 덜 신경 쓰이지만 결국엔 피할 수 없는 공허한 외로움을 얻고 말았다. 더군다나 이것은 점점 심화될 뿐,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섬으로 표현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자발적으로 선택하지도 않는 외로움을 도대체 어떻게 극복해내야 할까? 이미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해서 외로워졌는데, 진실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해결 가능하다는 말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암에 걸린 사람에게 암 예방법을 알려주는 꼴이다.

 

더군다나 원래 그런 관계를 맺고 살았는데, 배우자나 아이 혹은 부모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 할까? 그리고 하고 싶다고 해도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렇다면 지금 각자의 상황에 의해서 외로운 사람들은 유일한 해결책인 관계 맺기를 해 낼 수 없으니 결국 외로움이 가진 무게에 짓눌려서 평생 불행함 속에서 살아가야 할까?

 

그렇다면 삶이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닐까?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우리가 외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 하나 뿐일까?

 

많은 질문이 던져졌는데, 아무튼 다행스럽게 그것은 아니다. 분명히 방법은 있다. 단지 쉽지는 않다. 사실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에는, 그 해결책이 그나마 손쉬운 해결책이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해결책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말이 쉽지, 행복하게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존재 가치에 대한 의미를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니, 행복하면 그런 질문이 생각조차 나질 않으니 고민 자체가 사라진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행복하게 사는 법은 각자마다 아주 많은 답이 있다. 즉, 각자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 해결책을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삶의 모든 목적을 자신의 행복으로 맞춰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 다른 사람들의 평가, 시선, 가치, 의미 등은 모두 무의미하다. 오직 자신의 행복만이 유일하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 해결책은 첫 번째에 비해서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 더 수월하다. 그것은 바로 바쁘게 사는 것이다. 바쁘게만 살 수 있어도 머리 속에서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때는 단지 바쁜 것이 아니라, 부지런해야 한다. 게으르게 바쁘면 무척 삶이 무척 피곤하다. 그러니 부지런하게 바쁘게 살아야 한다.

 

사실 생각보다 삶은 단순하다. 우리는 매일 매일 바쁘게 부지런하게 살면 이상하게도 삶이 행복해지기도 한다. 집을 청소하고, 해야 할 일들을 깔끔하게 끝내고, 매일 운동을 하고, 삼시 세끼를 잘 차려서 먹고 살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게을러서 그렇다.

 

그러니 이것은 공허함, 심심함, 두려움과 귀찮지만 부지런하게 사는 삶과의 교환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은 할만한 거래가 아닐까?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분명히 힘듦은 있지만 얻는 것도 꽤나 많다.

 

세 번째 해결책은 존재 가치를 증명 받으려는 우리의 본질적 욕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존재 증명을 받으려고 하는 욕구는 아주 오래된 본능적 습성이다.

 

과거 우리 인간은 소수의 무리를 지어서 살 때, 무리로부터 추방 당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스스로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나 당위성이 필요했다.

 

지금도 비슷하다. 우리가 회사를 다닐 때, 조직 내에서 자신의 필요성을 매일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일을 잘하려고 하고, 다른 동료와 잘 지내려고 한다.

 

회사에서 존재의 가치를 증명 받는 것은 생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충분히 유효하다. 하지만 자신의 삶 자체의 유효성을 증명 받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 좀 불필요한 짓이다. 특히나 그것으로 인해서 공허함을 느끼고 불행해졌다면 더욱 그렇다.

 

즉,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 가치 증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먹고 자고 싸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특정한 순간에 기분이 우울한 어느 날 급작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다. 그래서 행복하거나 바쁘면 없어진다. 심지어 잠만 푹 자도 없어지고 만다.

 

그러니 가끔 공허한 외로움을 느끼더라도 그것을 확대해석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늘 밤에 집에 들어가서 어떤 공허함을 느끼고 우울했다고 해도, 내일 아침에 친구를 만나서 웃고 떠들고 놀 때는 그런 기억을 머리 속에서 없애는 것이 좋다. 괜히 친구에게 얘기하면,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커져 버리고 만다.

 

별 것도 아닌데도, 친구에게 고민이랍시고 털어놓으니 문제가 커진다. 사람들은 원래 불행함에 대한 얘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더군다나 보통은 좋은 소리를 듣기도 힘들다. 심지어 자신이 살아가는 삶 그 모든 것이 부정될 수도 있다. 즉, 친구들에게 그렇게 살았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라는 소리를 듣기 딱 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으면,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살고 있으면, 아이를 낳지 않아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는다. 딱히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일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고, 남편이 바쁘면 바쁜 남편과 결혼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맞을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감정은 매우 순간적이다. 그러니 그냥 재미있는 소리를 듣고 웃는 것처럼, 단지 지금 이 순간에 힘들어서 잠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공허함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해도, 그것을 확대해석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받아드리면 된다. 오늘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오늘 누구와 싸웠거나 오늘 누군가 자신의 험담을 하는 것을 들어서 그럴 수 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만약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단지 운이 좋은 것이다. 외로움을 해결해 줄 관계를 맺고 있거나, 행복하거나, 바쁜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단지 운이 없어서 해결책이 없는 것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운이 올 수 있다. 그러니 그때를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다.

 

네 번째 해결책은 아주 난이도가 높지만, 가장 완벽한 해결책이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홀로 서는 것이다. 즉, 타인에게 그 어떤 종속도 가지지 않고 완전히 홀로 서는 삶이다.

 

홀로 존재할 수 있다면, 존재 증명 자체가 불필요하다. 존재 증명은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만 유효하다. 그러니 그 틀 자체에서 벗어나면 된다. 성적에 신경 쓰지 않고 싶다면, 시험을 잘 볼 것이 아니라, 시험 자체를 안 보면 된다.

 

물론 이 방법은 매우 어렵다. 스스로 홀로 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가 스스로 홀로 설 수 있으려면 정말로 대단한 수준의 자기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단지 그 과정까지 가는데 있어서 경험해야 할 불행과 힘듦으로 인해 쉽게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제대로만 하면 깊은 침묵과 평온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소리와 삶의 위대함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해서 이 해결책은 나이를 먹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다른 해결책들은 나이를 먹으면 점점 버텨내기가 힘들어진다.

 

관계를 맺는 것도 점점 줄어들게 되고, 행복도 줄고, 바쁘게 사는 것도 불가능해지고, 뭔가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늘 유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나이를 먹어도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 차라리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깊어지기 때문에 더욱 평온해질 수 있다.

 

지금까지 관계 맺기를 포함해서 총 다섯 가지의 해결책을 제시 했는데, 사실 이 중에서 만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시작부터 막막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막막하면 첫 시도부터가 힘들다. 그래서 시작하는 법에 대한 짧은 조언을 할까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자신이 매일 하고 있는 행동의 일부를 줄이는 것이다. TV 보는 것을 줄이고, 가능하면 끊는 것도 좋다. 스마트 폰을 보는 시간을 줄이고, 가능하면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가능하면 없애는 것이 좋다.

 

사람들과 만나도 그 공허함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사람 만나는 것도 줄이고 가능하면 일정 시간 동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여유 시간이나 잉여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을 최대한 심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심심하게 되면 평소에 지루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밥맛이 없을 땐 굶으면 해결이 된다.

 

평소 생활 패턴을 조금만 바꿔서 시간이 남아 심심할 때 책을 읽어 본다. 이것은 돈도 안 든다. 요즘은 시골까지도 동네마다 도서관 없는 곳이 없다. 읽을 책도 꽤나 많다. 더군다나 도서관에 있을 정도면 나름대로 양서들이다. 이미 검증된 책이란 뜻이다. 그러니 첫 줄 첫 칸부터 무작위로 꺼내어 읽어도 된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좋은 내용의 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더해서 더욱 운이 좋다면, 도서관에서 사람을 사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트 클럽보다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이 조금 더 관계 맺기가 낫지 않을까 싶다.

 

심심하고 지루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도 상대적으로 좀 덜 지루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도 할 수 있다. 지루한 것보다 운동이 나을 수 있다.

 

당연히 처음엔 힘들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쓰지 않는 몸은 삐걱거릴 것이고, 오랫동안 책을 보지 않는 뇌는 도망가려고 할 것이다.

 

그래도 버티고 있으면 점점 나아질 것이다. 운동과 독서, 이것만 목표로 1년만 버텨보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추가적으로 어딘가에 글을 쓰거나, 자신만의 노트를 가지고 뭔가 기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엇이든 자신의 머리 속을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기록 자체도 좋고, 뭔가 정리가 되어서도 좋다.

 

이후는 각자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진행될 것이지만, 결국 같은 지점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단계에서 멈추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초적인 외로움으로부터는 해방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 해결책은 너무도 많이 제시가 되어서 신선할 것도 없다. 뻔하다. 그럼에도 이런 해결책이 제시되는 이유는, 그 밖에 더 이상 괜찮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알려진 해결책 중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열정을 찾는 것이다. 아쉽지만, 열정은 타고난 사람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절대 음감과 같다.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노력과 열정 등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뭔가 남다른 가치나 의미를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찾았을 것이다. 우리는 찾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책 읽는 것은 지루할 수 있다. 운동도 힘들 수 있다. 이것들을 즐기면서 할 생각은 아예 접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외로움에서 탈출하는 것이지, 행복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지겹고 힘들어도 그냥 버텨야 한다. 아니면 외로움이 찾아와서 우리를 집어 삼켜 버리고 말 것이다.

 

무엇인가 할 때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열정, 의욕, 노력, 최선 등의 단어는 모두 불필요한 단어들이다.

 

행복하지는 못해도 불행하지만 않다면 만족해야 한다. 행복한 것은 일단 여기를 통과하고 난 후에 원해야 한다. 처음부터 행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오랜 시간과의 싸움이다. 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평생이 걸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갈수록 점점 더 나아질 수만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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