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외로움에 대한 성찰

아이루다 2016. 4. 18. 07:50


 

예전에 개봉한 '나는 전설이다' 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가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치명적인 전염병 같은 병이 전 지구에 퍼졌고,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어떤 다른 존재로 변하거나 죽어 버렸고,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그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본 지가 오래되어서 거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머리 속에서 기억 나는 장면 하나는, 어떤 여자를 한 명 구했는데, 그 여자가 아끼고 아끼던 베이컨을 요리해 버려서 무척 화를 내는 장면이다.

 

우리는 가끔 이 세상에 혼자 살아남게 되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젼혀 그런 상상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때 정말로 무엇을 느끼게 될까? 사실 지금은 정확히 모르겠다. 상상 속에서는 별 일 아닐 듯싶은데, 정말로 혼자가 되어서 살아갈 때, 그것도 일정 시간이 아닌, 평생 동안 그렇게 살아간다면, 정말로 상상하지 못할 일이 일어날 듯싶다. 나 역시 배구공에 얼굴을 그려두고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

 

예전에 외로움에 대한 글을 몇 차례 썼었다. 그리고 그 글들을 통해서 외로움은 두 가지 면, 하나는 심심함으로써의 외로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거 노인의 삶 속에 있는 두려움으로써의 외로움이 있다고 설명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분리된 설명으로 인해 외로움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외로움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심심하거나 두려움을 넘어서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과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혼자서 있으면 심심한 것은 맞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면 혼자서도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시간을 보내려고 애쓴다. 설령 그런 행위들이 단지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혼자 있게 되면, 최대한 그 시간을 빨리 보내고, 다른 사람들과 있는 시간이 오길 바라게 된다. 뭐, 물론 어떤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외로움이 두려움을 불러 오는 것도 맞다. 이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혼자 사는 사람은 단지 혼자 산다는 현실적인 두려움 말고도, 아프거나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걱정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서 살 때 생존율이 높아진다. 정말로 단순한 예로, 어느 날 심장에 이상이 와서 쓰러졌을 때,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전화이다. 누군가 119로 전화를 해줘야 한다. 이미 쓰러진 본인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혼자 보다는 둘이, 둘 보다는 셋이 낫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혼자 사는 것이 좀 더 편한 사람들이 있고, 어쩔 수 없니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혼자 사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 더 낫다. 이 말은 늙으면 외로워진다는 말과 일맥상통 한다. 그래서 독거 노인의 삶이 가장 외롭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 사는 젊은 직장인이 퇴근 후 불 꺼진 집에 들어와서 느끼는 그 어떤 공허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누군가 함께 살다가 그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면 느끼게 될,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이때도 분명히 심심함과 두려움으로 인한 외로움은 존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현실로 존재한다. 혼자 있으니 심심한 것도 사실이고, 혼자 있으니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공허함이나 쓸쓸함은 현실적인 감정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없던 것이 생긴 것 같은 것이다. 매일 집에 들어갈 때 아무렇지도 않다가, 어느 날 강한 스트레스를 받아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집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갑작스러운 기분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그것은 서러움일수도 있고, 허탈함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가끔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기도 한다. 하지만 개나 고양이가 결코 우리의 심심함을 해결해주거나 두려움을 해결해주는 목적이 아니다. 특히 고양이는 더욱 그렇다. 고양이는 주인을 지켜야 할 의무감이 없다. 그럼에도 동물들은 주인에게 많은 위로와 위안이 된다.

 

그렇다면 혼자 있을 때 왜 공허함, 허망함, 서글픔, 허탈함 등을 느끼게 될까? 그것도 늘 그런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우리를 정신 못 차리게 할 만큼 강렬하게 흔드는 것일까? 그리고 개나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 왜 그런 감정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결국 그럼으로써 꾸준히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감정들은 결코 심심함과 두려움으로부터 파생된 것들도 아니고 그것을 해결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것에 대한 알아내고 나면 그 답은 단순하지만, 사실 이 답을 알아내기엔 꽤나 두꺼운 심리적 단계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존재 가치' 혹은 '살아야 할 이유'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외로울 때, 우리 각자가 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외로울 때가 아니고, 뭔가 힘듦을 경험할 때 그렇다.

 

전 세계가 다 멸망하고 혼자 살아가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오늘 하루가 무척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면 별 생각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매일 그렇게 살기는 힘들다.

 

결국 그래서 오늘의 삶이 힘들고 고단하면 스스로 질문이 머리 속에서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나는 왜 이런 힘듦을 모두 견뎌내고 내일까지 살아 있어야 할까? 결국 죽을 텐데 말이다. 매일 하루는 단지 그것을 하루 더 연장하는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개나 고양이와 같이 동물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동물들은 주로 과거 속에서 살아갈 뿐, 미래를 살지는 못한다. 동물들은 미래란 말의 개념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과거에 쌓인 경험을 통해 매 순간 생존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도의 두뇌 활동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누구 하나도 예외 없이 늙고 결국 죽어서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종교적인 믿음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실 종교를 믿어도 상황은 별 다를 바가 없다.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왜 살아서 그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나마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동물들처럼 그저 생존하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살 수는 있을 테지만 말이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때, 혼자 존재할 때, 결국엔 가장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오늘 살아야 할 이유' 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속되면, '왜 살아야 할까' 라는 철학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것은 불행한 사람들이 철학을 하고,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진 본질적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매 순간에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혼자 있는 사람은 가끔 그것이 급작스럽게 의식 단계로 변화된다. 그러니 그 순간이 찾아오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존재적 공허함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하나라도 키우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적어도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자란 아이도 나중엔 자신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사실상 그래서 이것은 무한 반복적 행위이지만, 그럼에도 각자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준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살고, 아이는 엄마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 돌봄을 하는 사람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두 사람만 있어도 이 문제는 해결이 된다. 서로 필요한 존재이고, 서로 필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의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아이는 부모나 형제, 친구로 바뀔 수도 있고, 개와 고양이로도 바뀔 수 있다. 동물들이 우리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열렬히 꼬리를 흔들고 다가와서 몸을 비비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오늘 살아야 할 이유를 준다. 그리고 내일도 살아가야 할 이유도 만들어 준다.

 

그래서 외로움이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심심함도 두려움도 아닌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혼자 존재할 때 느끼게 될 외로움은 바로 힘든 삶을 버티고 미래를 향해 살아가야 할 의지를 희석시킨다. 이것은 매우 견뎌내기 힘든 상황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의 가치가 왜 중요한지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버림받음' , '대체 가능함', '쓸모없음', '무시당함',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 '왜 또 왔데' 등의 개념과 연결이 된다. 그러니 얼마나 그것이 중요한가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위에 나열한 단어들은 하나만으로도 한 사람의 삶을 파괴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진 것들이다.

 

우리는 매일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는 매일 힘들다. 우리는 언제나 고민과 걱정이 한 가득 이다. 그리고 그 힘듦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 강력한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절벽에 매달려 있을 때, 올라갈 수 없어도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팔 근육이 다 찢어지면서 엄청난 고통에 밀려와도 최대한 노력하면서 참아내는 것은 단지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이미 생명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고통을 잘 참지 못한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는 잘 죽지 않는다. 우리는 버텨낸다. 왜냐하면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사는 삶은, 우리들에게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기다리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는 왜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할까? 그냥 살면 안될까?

 

우리가 존재의 이유가 필요한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불행한 순간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할 때 존재의 이유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한데 왜 존재의 이유를 찾는단 말인가?

 

행복하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으면 생각이 없어진다. 우리는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믿지만, 사실 행복하면 생각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인간 사회는 대부분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을 권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가장 근본적인 욕망은 바로 행복이다. 우리는 생각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행복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돈이 없어도, 직장을 잃어도, 혼자 살아도, 병에 걸려서 곧 죽게 생겼어도 행복하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인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지 불행해지기 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행복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늘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서 불행에 대비하거나 행복의 방향성을 바꿀 수 있다. 행복하다고 해서 생각 없이 막 살다가는 언제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질지 모른다. 그러니 행복한 순간에도 혹시 앞에 함정이 있을지를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험에 드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돈을 쓰긴 하지만, 미래의 불행에 대비도 해주기 때문에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존재의 이유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힘들다. 우리는 그저 행복하길 바랄 뿐, 사실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본질적인 지향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끼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회피하려고 한다. 두려움이 느껴지면 보험에 들고, 심심함이 느껴지면 TV를 켜거나 스마트 폰을 바라보려고 한다.  머리 속에 생각이 밀려오면 그것을 밀어내려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는 못해도 우리의 무의식은 스스로에 대한 존재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다가 가끔 우리들이 많이 힘들 때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당사자를 매우 당혹하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무의미함으로부터 오는 공허함에 빠뜨리고, 왜 그것을 했는지 모를 허탈함에 빠뜨리고, 앞으로 남은 삶을 연장시켜야 할 이유가 없어지게 만들면서 결국 삶의 의욕을 상실시킨다.

 

이것은 심심함이나 두려움과 달리 늘 눈에 띄지 않고, 보통 행복할 때는 그 모습을 감추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자각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몹시 힘들었던 어느 날 불 꺼진 방에 들어왔을 때 느끼는 방안의 써늘함이나, 아파서 누운 날 혼자 밥을 챙겨 먹고 약을 사다 먹어야 할 때 느끼는 서글픔이나, 같이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배우자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그런 날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눈물이 펑펑 날 만큼 강렬한 체험으로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 행복해야 하는 이유도 되며, 인간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유도 되며, 우리가 왜 다양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된다.

 

우리들 각자의 존재 이유는 서로가 만들어 준다. 그것이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 누군가 가치 있는 존재가 있을 때, 그 존재가 자신을 필요로 하거나 혹은 자신이 그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존재 이유가 되어 준다.

 

존재의 이유가 강하면 강할수록 삶의 의지는 강해질 수 밖에 없다. 엄마의 힘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유는, 아이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조차도 뛰어 넘는다.

 

보통 사람들은 혼자 사는 삶의 외로움에 대해 걱정할 때, 심심하거나 돌봐줄 사람이 없는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설령 혼자 사는 경험을 할 때 공허함이나 허탈함이 느껴지더라도 그것이 바로 존재의 이유과 연관시켜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외로움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외롭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심심함이나 두려움 해결과 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가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구에 큰 전염병이 돌아 혼자 살아남게 되었을 때, 각자 오늘을 살아야 할 이유와의 싸움이 가장 힘들 것이다. 차라리 심심함과 두려움은 별 것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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