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에고의 단계

아이루다 2016. 4. 8. 08:48

 

어느 집에 놀러 가서 한 아이를 만난다. 서너 살쯤 되 보이는 아이이다. 아이는 처음엔 경계심을 보이고, 말을 걸어도 뭔가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이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나서 어느 정도 친해지자, 아이는 말이 많아진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방에서 뭔가를 자꾸 꺼내와서 설명을 한다. 그것은 주로 자신이 요즘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나 혹은 인형 등인데, 가끔은 서툰 솜씨로 그린 그림도 포함되곤 한다.

 

아이는 분명히 설명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 아이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실은 설명이 아닌 자랑을 하고 있는 점이다. 나중에 크면 분명히 자랑의 대상은 달라지겠지만, 그 당시에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친숙한 누군가에게 알아 주고 공감해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단지 친해져서 그럴까? 아니다. 아이가 그러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아이의 마음 속에 바로 '에고'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에고는 생각보다 훨씬 어린 나이부터 발달하기 시작한다. 원래 에고가 발달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생존' 인데, 이 생존 본능은 태어남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에고는 단지 생존 본능으로만 발달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바로 일종의 '계산식' 이 붙는다.

 

인간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거의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다른 존재들과의 경쟁을 경험한다. 그것이 형제들과의 경쟁이든, 옆집 아이이든, 어린이 집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든 상관없다. 심지어 어른과도 경쟁한다. 아빠나 엄마도 결국엔 경쟁 상대이다.

 

그리고 이 경쟁과 함께 점점 발달한 두뇌는, 가능하다면 이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이기고 싶어하는 목적이 본격적으로 에고를 만들고 성장시키기 시작한다. 즉,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필수적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잘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강한 에고가 만들어 진다. 그것을 꼭 가져야 하고, 그것을 꼭 해봐야 하며, 그것을 꼭 먹어야 할 때 마다 점점 에고는 강해진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다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경쟁이 아니다. 그래서 승리를 자주 경험한 에고와 패배를 자주 경험하는 에고는 이후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어떤 경험을 하는 에고냐에 상관없이, 에고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 받기 위해서 무척 많은 노력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승부들은 스포츠 경기처럼 깔끔하게 승부 여부를 매길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는 다른 이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둘이 말싸움을 한 후, 누가 이겼는지는 둘 당사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이 결정해준다. 그러니 에고가 자신의 정당성, 가치 등에 목말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경쟁에서 이기려면 잘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스스로 인정될 수 없다. 반드시 누군가 다른 존재가 인정해줘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인정해주면 인정해줄수록 점점 더 가치의 정당성은 높아지고 추구하는 가치는 좀 더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에고의 특징은, 그 시작점이 바로 경쟁에서 출발했고, 무엇인가 자신에게 더 유리한 것을 선택하고 싶어하는 욕구로부터 키워졌기 때문이다. 그 시작부터 에고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에고는 반드시 무리 속에서 경쟁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고 성장한다.

 

집에서 혼자 생활하던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모인다.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 학교가 바로 그런 장소가 된다. 그리고 모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각자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얘기하기 시작한다. 즉, 그 동안 집에서 해왔던 대로 각자 성장시킨 에고를 막힘없이 풀어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집에서 그랬듯이 서로 계속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옆의 친구들에게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것은 잘 통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아직 아이들은 '주고 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서로 무의미하게 떠들다가 만다.

 

아이들은 점점 커감에 따라서 '주고 받는' 법을 배운다. 즉, 상대가 자랑을 할 때는 들어주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가 그때가 되면 자신의 자랑을 이야기 한다. 이것은 서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그리고 이때 익힌 관계의 기술은 평생 유지가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도 이런 식이다.

 

여기에서 대화법을 잘못 배운 사람들은 평생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듣는 법이 서투르거나, 자신이 자랑을 해도 되는 타이밍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대화를 한 후 후회를 하게 된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누구나 커가면서 다른 존재와 타협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어린 아이 시절의 체험이다.

 

이 단계에의 에고는 '자랑하는 에고' 라고 명칭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에고이며, 평생 버리기 힘든 에고이다. 우리가 아이에서 어른이 될 때 일어난 유일한 변화는, 로봇이나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랑하는 것에서 고급 차나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자랑하는 것으로 바뀐 것뿐이다.

 

그런데 이 단계가 조금 다르게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는 경쟁에서 자주 이기는 입장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식으로든 힘을 갖게 된다. 이 힘은 지배력이라고도 할 수 있고, 권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지배력이 강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그 공간에서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자랑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별로 좋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자랑은 별로 들어 줄 필요가 없다. 또한 이들은 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서 결국 자신의 자랑에 박수를 쳐 줄 사람들만 곁에 두게 된다. 인간이 그리도 권력를 갖고 싶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강자가 되면 정말로 좋은 점이 자기 자랑을 마음 껏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설령 그 뽐냄에 실수가 있더라도 주변에서 아무 말 못하는 사람이 강자이다. 반면에 약자는 자기 자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늘 강자에 눌려서 들어주기만 해야 한다. 더군다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웃기까지 해야 한다. 이러니 누가 약자가 되고 싶을까?

 

두 번째는 한 가지 정도에 나름대로 능력은 있으나 뭔가 다른 부분이 부족한 경우이다. 즉, 공부는 잘하지만 운동을 못하거나, 외모가 못생겼거나 하는 등의 약간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경우인데, 이때는 주로 잘하는 것에 대한 만큼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평생 세상을 탓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인 성격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자랑할 기회가 많지 않기에,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만 생기면 끝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 놓는다. 지겨울 만큼 그렇게 한다. 머리 속에는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시켜야만 한다는 생각만 가득해서, 도대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생각조차 나질 않는다. 말 그대로 주고 받고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사실 왕따가 되기 쉽다. 조금만 친해져도 그 냉소적인 태도와 끝없는 자기 자랑 때문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된다. 자기 자랑을 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 이야기도 좀 들어줘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다. 남이 조금만 자랑하고 있다 싶으면, 그것을 빈정대고 깎아 내린다.

 

세 번째는 능력은 나름대로 타고 났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서 삶이 꼬여버린 상황이다. 이럴 때 그 사람은 그 실패에 대한 분노와 에고의 궁극적 목표인, 인정받지 못함에 의해서 생겨난 채워지지 않는 욕구로 인해서 평생은 타인의 칭찬에 목매달고 살아간다. 인정이나 칭찬을 받는 것이 삶의 모든 목표가 된다.

 

하지만 원래 인정받고자 하는 삶이 행복하기는 힘들다. 인간 관계에 종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만큼 다루기 쉬운 사람도 없다. 그냥 인정만 해주는 척만 하면 신나서 뭐든 다 한다. 그러다보니, 인정에 목 맨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끝없이 이용 당할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되면, 당사자는 아주 큰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인정이 너무 필요해서 설마 설마 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가치 있는 것들을 마구 퍼주기도 한다. 심지어 돈을 주고,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상황에서도 인정을 받기 위해서 도움을 준다. 단지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이나,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사실 좀 더 분류할 수 있으나, 너무 자세한 것은 글의 범위를 넘어가니, 이쯤에서 마무리하겠다. 아무튼 어떤 형태로 분화되었든 간에,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랑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에고' 의 단계에 머문다.

 

이 단계는 세상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해있는 단계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생 동안 이것으로부터 지배를 받는다. 단지 세상을 살다가 보면, 우리들 자신의 주인공이란 법칙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자랑을 들어줘야만 내 자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올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단계에서 머물다가 죽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랑을 좀 더 전략적으로 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거나 혹은 어떤 일을 성취해내는 것이다.

 

보통 자랑은 자신의 입으로 한다. 하지만 누구나 자랑을 하고 싶어 하기에, 자랑을 하는 것은 꽤나 경쟁적인 면도 있고 더해서 잘못했다간 사람들에게 큰 질시를 받을 수도 있다.

 

사실 자랑은 안 하는 것이 더 좋다. 원래 들어주는 사람이 훨씬 더 인기가 많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가진 기본적인 에고, 즉 자랑하는 에고는 그것을 알면서도 해내지 못한다. 자랑하고 싶은 욕구를 결코 참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얼마나 자랑을 은근슬쩍 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대화의 요령이다. 적적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하는 자랑이 최고의 고수이다. 자신의 자랑을 상대에게 공감시키는 능력, 이것이 대화를 잘하는 사람이 가진 비법이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말하기 전에, 다른 이들이 먼저 그것을 알아주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방법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주는 일은 꽤나 가치 있는 일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것에 정말로 인색하다.

 

이 방법은 자랑하는 에고와 비슷하지만, 자신의 가치가 아닌 제 삼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즉,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우정, 정의, 봉사, 희생, 평화 등등의 누구나 에게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가치를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훨씬 더 쉽게 먹히고, 또한 대화를 할 때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 두 번째 단계인, '자기 만족 형 에고' 이다.

 

물론 그 만족에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지지가 필요하긴 하다. 타인은 에고의 기본 무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드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일 필요는 없다. 과거에 누군가 위대한 인물이 말했던 것이나, 자신의 생각에 인류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이 된다면, 누구의 알아줌이 없어도 그 길을 가기도 한다.

 

스스로 자랑하는 어린 아이의 에고는 사실 너무 뻔해서 유아적인 느낌이 너무 난다. 그래서 잘난 사람들 중에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전략으로 접근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랑하기 보다는, 남들의 입에서 잘남에 대한 칭송이 나오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단지 그럴 수 있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이미 설명했듯, 우리는 서로 자랑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너무 대놓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각자 서로의 차례가 있는데, 혼자만 자랑을 하고 있으면 누가 그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자랑 자체가 남의 입을 통해서 나오게 되면, 당사자는 그 자랑을 겸손함으로 받아 치면서 더욱 더 가치가 있어진다.

 

그래서 정말로 제대로만 된다면, 꿩 먹고 알 먹고가 된다. 결국엔 자랑을 해서 에고도 만족하고, 겸손한 척 해서 자랑이 가진 단점, 즉 타인의 질투를 유발하거나 혹은 자신의 차례를 지키지 않음에 대한 문제점 역시도 해결 가능하다. 자신이 한 말이 아니니, 자신이 책임져야 할 필요가 없다. 더해서 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신뢰성도 높다.

 

이 자기 만족 형 에고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단계이다. 어찌되었건 간에, 남들이 인정하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도 내야하고, 남들이 충분히 인정해줄 만한 일을 이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도 스스로도 만족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뤄내기가 쉽지 않을 까닭이다.

 

그래서 성직자, 복지사, 의사 등의 일을 하는 것이 나름 괜찮은 선택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 만족 형 에고를 추구하는 사람일 경우, 그런 종류의 일들은 가치도 있을뿐더러, 그때 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정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사실 매우 어렵지만, 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은 실로 대단해서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주로 실패가 많다. 어떤 가치를 추구했으나 남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것이거나, 뭔가 이뤘지만 더 크게 이룬 사람들의 주변에 있게 되면 그렇게 된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랑하는 에고' 단계일 때 좀 더 쉽게 행복해진다. 이 말을 혼동하면 안 된다. 더 행복하다는 말이 아니라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단지 평소에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서 자기 입으로 자랑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턱 내기라도 하면 지배력이 강해져서 더 많은 시간을 자랑하면서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만족 형 에고'는 타인을 통해서만 완성이 되기 때문에, 쉽게 얻기가 힘들다. 그래서 과정 자체도 어려운데, 결과를 제대로 얻기도 힘들다. 그래서 잘못하면 삶이 매우 불행해지기가 쉽다.

 

결국 이 단계에서 실패해서 좌절한 사람들은 이제 세 번째 단계를 바라 보게 된다. 사실 그런데 이것은 꽤나 운이 따라야 가능하다. 보통은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기에, 자신을 몰라주는 세상을 비관하다가 결국엔 불행한 삶으로 마감된다.

 

에고의 세 번째 단계는 바로 에고 자체를 인식하는 단계이다. 즉, '스스로 인식하는 에고' 의 단계이다.

 

보통 에고의 인식은 스스로 일어나지는 못한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소수의 천재들만 가능한 능력이다. 우리는 거울이 없고,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얼굴에 어떻게 생겼는지에 알려고 하지 않는다. 손과 발 등 다른 모든 부위는 바라보지만, 얼굴은 바라볼 생각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거울이 없다면, 결코 자신의 눈동자를 볼 수 없다.

 

에고도 마찬가지다. 에고는 보통 스스로 인식되지 않는다. 모든 생각의 주체이기에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아무튼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후대를 위해 남겨두었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그들의 설명을 통해 에고를 인식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에고의 단계부터는 정말로 소수의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에고라는 말 자체는 프로이트에 의해서 유명해져서 알고는 있지만, 알고만 있는 단계가 대부분이다. 그 에고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인식하는 에고는 꽤나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계를 경험했다고 해서 무엇인가 특별하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냥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존재가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을 알게 된 상태이다. 즉, 그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실망하고, 자학하고, 좌절한 그 모든 것이 바로 자신 때문임을 알게 된 상태이다.

 

그래서 이 세 번째 단계는 오직 네 번째 단계로 나갈 수 있는 희망의 끈으로만 가치가 있다. 아는 것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째에 도착한 많은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좌절을 경험한다. 문제는 아는데 해결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바로 그 자신의 에고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 에고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완전히 외통수이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살아온 많은 철학자들, 사상가들이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나름대로 적절한 요령을 적어 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해결책이 아닌, 우회하는 방법을 적어 둔 것뿐이다. 문제가 있어도 살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에고의 한계를 벗어난 사람들도 있다고 전해진다.

 

에고의 네 번째 단계는 '완성과 버려짐의 에고' 이다.

 

이 단계를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사실 이 단계는 에고의 단계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에고 자체가 사라진 단계이기 때문이다. '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공'이 존재한다. 즉, 에고가 사라지면 우리들 자신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 개념이다.

 

이 단계에 오면 불교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모두 마찬가지이다. 모든 종교의 최종 궁극적 목적이 된다. 신과의 일체화, 이것이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최종 목표이다.

 

이 네 번째 단계는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개인적으로 미지의 영역이며, 있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저 옛 성인들의 경험으로 있다는 것만 유추할 뿐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극복하기는 힘들어도,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주체로써의 에고, 즉 세 번째 단계의 에고는 한번쯤 경험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인가 하고 싶고, 갖고 싶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고, 권력과 명예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그 모든 것이 바로 에고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식하면, 적어도 자신이 왜 그렇게 사는지가 이해는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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