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무의식과 확대 해석

아이루다 2016. 4. 13. 07:38

 

주먹을 쥐고 난 후, 가운데 손가락만 쭉 펴는 형태를 만들면, 이것은 미국 문화권에서는 욕이 된다. 그리고 요즘은 워낙 미국 문화가 많이 퍼진 탓에, '뻑큐' 이라는 말이나 혹은 이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는 행위가 거의 국제적으로 욕으로 통용되고 있다.

 

아마도 전 지구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사실 우연이 나타날 수도 있다. 비록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집게 손가락 말고 가운데 손가락을 쓸 경우도 있다. 얼굴을 긁을 때도 가운데 손가락만을 이용해서 긁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우연하게 나타난 행동은 같은 손가락 모양이라고 해도 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뭐, 고도로 계산된 욕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딱히 누가 교육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특정 문화권에서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동양 문화권에서 목을 숙여서 하는 인사나 서양 문화권에서 서로 손을 맞잡는 악수도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행위들은 비교적 명확하다. 상대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세우거나, 손을 내밀거나, 목을 숙이는 행위는 딱히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별로 없다. 그래서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행위가 모두 이렇게 명확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명확하지 않는 상황을 없애려고 한다. 그래서 상대의 행동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면,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그것을 유추해내고자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떻게든 불명확한 것을 확실하게 만든다. 상대의 행동, 말, 태도, 어투, 상황 모두를 종합해서 상대가 과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애쓴다. 이것은 일종의 추리이다. 사실 직접 물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상대가 거짓말을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늘 정답을 낼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사실 거의 오답을 낸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도 아닌, 스스로의 행동조차도 거기에 숨겨진 심리도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일명 심리 상담이란 것이 있다. 심리 분석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털어놓으면서 자신의 숨겨진 심리를 찾는 과정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상담을 왜 받아야 할까? 당연히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지는 지를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심리도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조차 오해를 하고, 혼동을 하고, 착각을 한다. 그리고 보통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자신도 아닌, 남을 판단하는 것이 제대로 맞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내 마음도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인데 말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판단하는 근거조차도 자신의 심리이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심리를 이용해서 타인의 심리를 유추한다. 이 얼마나 틀릴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가?

 

그럼에도 이런 과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로 숱하게 겪는 상황이다. 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타고난 한계이기도 하고, 딱히 대안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고쳐야 할 점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과도한 오해석이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대처이다. 즉, 우리는 상대의 말과 행동을 너무 크게 잘못 해석해서, 원래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조차도 아주 일을 크게 벌리는 경우가 많다.

 

더해서 감정적으로도 그냥 조금 기분만 나쁘고 곧 잊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아주 심하게 화를 내거나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는 수준까지 발전한다. 그래서 결국 자기 파괴를 하고 만다.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부수는 일을 한다.

 

예를 들어서 남자와 여자가 사귀는 중, 남자가 자주 약속 시간에 늦는다고 해보자. 여자는 처음엔 남자가 늦을 수 밖에 없는 다양한 이유를 듣고는 넘어가주지만, 결국 어느 시점이 되면 폭발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때 폭발의 원인은 남자가 늦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여자 입장에서 남자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 남자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겨서 그렇다. 이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여자의 감정은 확신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남자가 특별한 의도 없이 매번 늦었다면, 이것은 사실 남자의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 즉, 남자는 원래 그 어떤 종류의 약속에도 늦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이나 느긋함이 원인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동안 여자가 화를 내니, 나름대로 핑계를 대왔을 것이다. 자신이 게을러서 늦었다는 핑계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 오면서 숱하게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만약 그랬다가는, 여자의 입에서 내가 게으름조차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별것 아닌 존재냐는 말이 나올 것을 뻔히 알고 있다.

 

그래서 차가 밀렸다. 집안에 일이 생겼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등등 이유를 댔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인정하고 받아 줬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면 여자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다가 그 동안 핑계를 댄 것들이 대부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결정한다. 사랑한다면 결코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날 뭔가 기분이 나쁜 일까지 겹쳤다면, 여자는 아주 크게 화를 내게 되고, 남자 역시도 처음엔 참다가 결국 폭발하게 되면 둘은 그날 아주 크게 싸우게 된다. 심지어 헤어질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연인들이 싸우는 이유를 보면 이런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주 사소한 일들이 불씨가 되어서 크게 번져서 결국 헤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싸움은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풀어져서 둘은 다시 만나서 화해를 하고 여느 때처럼 금세 다정한 연인으로 되돌아 가기도 한다. 그래서 그때 왜 싸웠는지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사실 맞는 말이다.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해서 싸웠으니 말이다.

 

또 다른 예로, 요즘 가끔 나오는 도로 위에서 일어난 보복 운전도 비슷한 상황이다. 다른 사람의 차가 자신의 앞을 무리하게 끼어들거나, 너무 느리게 가면, 이것을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타고난 폭력성으로 인해 그럴 수도 있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통해서 그렇게 확대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참을 수 있겠는가?

 

사실 이런 과도한 분노는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사례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신이 어떤 실수를 하거나, 남에게 잘못했을 경우, 그것을 그 자체로만 끝내지 않고 그런 상황들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과도하게 하락하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경우도 많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실수를 하면, 보통 윗사람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된다. 이것은 실수를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확대 해석하면, 자신의 상사가 자신을 무능력하게 보지는 않을까, 그래서 다음 진급에서 누락되지 않을까, 연봉 협상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것을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본인이 실수를 할 때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더해서 이 스트레스로 인해 늘 기분이 다운되어 있거나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실수를 해서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어둡거나 자주 화를 내는 성격으로 인해 인간성에 문제가 있어서 조직 생활에서 버티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오해석을 하거나 확대 해석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생각보다 의식적으로도 의지적으로도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실수를 했다면, 보통은 무의식적이고 무의지적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물컵을 쏟았다면, 그것을 의도적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뭐,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었다며 모를까, 누가 그런 짓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실수나, 상대가 저지르는 대부분의 행동은 거의 무의식적이다.

 

직장에서 작은 실수를 했음에도 상사에게 크게 혼이 났을 때, 너무 황당해서 혹시 나를 미워하는 것일까? 혹은 나를 못 믿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오늘 뭔가 다른 일로 이미 스트레스 받은 상태일 것이란 확률이 훨씬 높다는 점을 생각해야 해야 한다.

 

남자 친구가 자주 약속에 늦는다면,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그럴까 라기 보다는, 원래 그런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들의 하는 생각과 행동은 대부분이 우발적이고 순식간에 결정되는데, 그것을 마치 우리가 의지적으로 결정하고, 뭔가 의식적으로 행동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거기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쓰고, 그러다가 결국 오해를 하는 상황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본인들의 행동들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럴까? 우리는 왜 그렇게 무의식적 결정하고 무의지적으로 행동하면서도 그것을 뭔가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것이라고 여길까?

 

여기엔 우리 인간의 오래된 버릇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행동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미 지나간 상황을 현재를 기준으로 해석하는 인간 고유의 행동 양식이다.

 

우리는 매 순간 거의 감정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해도, 우리가 정말로 이성적인 순간은 거의 없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 매 순간 발을 디딜 때조차 자신의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쪽을 결정한다. 이 말을 덜 불행한 쪽을 결정한다는 말로 대처해도 된다.

 

즉, 물 웅덩이가 있으면, 다른 마른 곳을 딛는 것이다. 신발이 젖는 불운함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물 웅덩이를 디디면서 물이 튀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신발이 젖는 한이 있어도 그곳에 세차게 발로 딛는다.

 

아이들이 놀 때 하는 모습이다. 아이들은 물이 튀는 모습을 보는 행복이, 신발이 젖는 불행보다 더 낫기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아이 엄마는 속이 타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매 순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것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덜 불행한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 행복은 바로 이성이 아닌, 감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우리의 매 순간 선택의 기준은 바로 감정이다. 결코 이성이 아니다. 그러니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결정하는 거의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무의지적으로 이뤄진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이미 거의 무의식적으로 결정된 것을 이성적 능력을 이용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를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즉, 우리들이 지금 이 순간을 인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것은 보통 시간이 지난 후, 기억 속으로만 인식된다. 하지만 이런 패턴의 문제는 행동 자체는 기록되지만 그떄 느낀 감정은 전혀 기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과거에 행복했다면, 우리는 행복했었다는 상태는 기억하지만, 행복한 감정은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행복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기억만 떠올리면 즉시 행복해질 것인데 말이다. 그나마 우리는 가끔 음악을 듣거나 사진을 보다가 행복했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성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감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당시 들었던 감정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난 후 자신이 한 행동만 기억에 남아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한껏 감성에 취해서 간 밤에 쓴 일기가 아침에 읽으면 그리도 부끄러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감성을 불러 온 밤은 사라지고 이성적으로 적어 놓은 글만 남아 있으니, 그것이 어떻게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억을 통해 끝없이 자신의 과거를 재해석 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당시의 감정은 사라지고 없고, 오직 자신이 한 이성적인 행동들만이 기억나니 그것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더군다나 생각이란 절차 자체가 바로 이성적 행동이다. 감정 자체는 아무런 사고의 능력이 없다. 오직 이성만이 생각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과거에 일어난 행동들을 이성적인 면만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이성적 능력을 통해서만 생각해내게 되고, 그것을 기준으로만 과거 자체를 판단하게 되니까, 마치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어떤 의지로 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결정된 것을 의식적으로 행동한 후, 그것만을 기억에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현재라는 것이 없다. 우리는 오직 과거 기억을 통해서만 재해석 된다.

 

머리 속에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먹기 위해서 돈을 찾고, 가게에 다녀오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최초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는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발생한다. 그것은 덥거나 혹은 단 것이 먹고 싶다는 어떤 신체적 욕구이다. 혹은 버릇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무의식적으로 무의지적으로 결정된 것들을 나중에 마치 의식적이고 의지적으로 했을 것이란 착각을 하니, 자꾸 자신의 행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정확히 맞을 수 있겠는가? 감정으로 결정된 것을 이성으로 해석하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전에 그때 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냐고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때가 무척 더워서 그렇다고 하거나, 단 것이 땡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사실은 아주 단순히 TV를 보다가 광고를 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연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욕구가 처음에 어떤 이유로 생겨났을까를 생각하면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이상적인 상대를 만났을 때, 한 눈에 반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그것을 한다. 나를 왜 사랑하냐고 묻기도 하고, 그것을 대답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아주 오래된 버릇이다. 자신의 과거 행동을 자꾸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을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끝없이 타인의 심리를 분석하려 든다.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한다.

 

미국의 유명한 공포 영화 감독, 히치콕이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손녀딸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만든 영화를 주제로 한 강의를 들었고, 그 강의를 듣는 동안 끝없이 실제로 영화를 만든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영화들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손녀가 그 강의에서 받은 최종 학점이 바로 C이다. 사실 거의 낙제 수준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강의의 교수는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실제 감독도 모를 해석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슷한 예로, 어떤 시인이 자신의 시를 주제로 한 국어 문제를 풀었다가 다 틀린 경우도 있다.

 

이런 예는 사실 너무도 많을 것이다. 우리가 영웅으로 여기거나 혹은 최고의 악당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해 낸 일이나 저지른 일들이 사실은 아주 단순히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산다고 믿는다. 방향이 있다고 믿고, 그래서 의지가 있고 의식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거의 없다. 그런 것들을 해내는 주체는 바로 이성인데, 우리는 거의 감정적 존재일 뿐이다.

 

뭐, 그럼에도 이런 착각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오해와 확대 해석으로 인해 벌어지는 자기 파괴적 행동들이다.

 

여자나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상대 배우자를 무시해서 그러기 보다는, 원래 그냥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들과 노는 것이 좋은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든가, 자신을 싫어해서 그런다든가, 왜 자신보다 훨씬 못난 존재와 바람을 폈는가 등등을 가지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자존감이 팍팍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단순하다. 그냥 바람을 핀 배우자는 원래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사람일 뿐이었다. 자기 배우자를 무시해서도, 뭔가 의지적으로 복수하려고도 한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오해석이나 확대 해석을 하지 않으려면, 어떤 판단을 하는 매 순간 자신의 그런 행위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멈추기는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불필요하게 무한대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 제어는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한다는 생각만 하고 살 수 있어도, 사실 삶은 참으로 단순해지고 명확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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