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완벽한 이성

아이루다 2016. 4. 3. 07:30


 

몇 년 전쯤 이성에 대한 마지막 정리로써 장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예전부터 무엇인가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그런 글을 썼었는데, 오늘 생각하니 '마지막' 이란 말은 함부로 쓰면 안되겠다 싶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이성은 두 가지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수학 문제를 푸는 등의 말 그대로 지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감정을 제어하고 좀 더 계획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다.

 

이 중에서 전자인 일단 학습 능력을 가진 이성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게 명확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과거엔 우리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해주는, 흔히 말해서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으로써의 이성은 사실 우리의 믿음이 과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현재도 이 생각 자체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더해서 어떤 것이 더해졌다. 즉, 기존의 이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추가된 것이다. 그런데 이 추가된 분량이 원래 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크다. 그러니 마치 대체된 듯 느껴지기까지 한다.

 

우리가 원래 알고 있는,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으로써 이성은 사실 한계가 명확하다. 원래 감정 자체는 선악의 개념이 없다. 그저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있을 뿐이다. 이 중에서 나쁜 감정은 당사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이로 인해서 타인과의 관계도 불편하게 만든다. 자신이 기분이 나쁘고, 인간 관계가 틀어져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은 그야말로 '불행'이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쓴다. 특히나 나쁜 감정은 우리들에게 여러모로 좋지 않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우리가 아무리 감정을 숨길 수 있다고 해도 그 감정 자체가 아예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끝없이 발생한다. 단지 성인이 될 수록 우리는 그것을 잘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숨기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 라고 부를 때, 우리가 믿는 이성은 사실 그리 이성적이지 못하다. 감정은 그냥 발생하고, 이성은 그것을 처리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나쁜 감정을 어떻게든 숨길 수 있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적 자아는 반드시 그만큼의 상처를 받는다.

 

이 상처를 우리는 '스트레스'  라고 부른다. 그래서 내부적 감정과 외적 포장의 차이만큼이 스트레스가 된다. 따라서 고객에게 늘 친절해야 하는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날 수 밖에 없다.

 

그나마 나쁜 감정을 최대한 덜 발생시키는 방법은 오직 좀 더 행복해지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행복할수록 좀 덜 나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도 행복하길 바란다. 행복하면 기분도 좋고, 나쁜 감정도 좀처럼 들지 않는다. 이 얼마나 멋진 해결책이란 말인가?

 

그런데 행복 자체가 감정이다. 행복은 이성으로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감정의 역할에 모든 것을 맡길 수 밖에 없다. 이성의 존재는 감정의 꼬리를 붙잡고 겨우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가 예전에 정의한 이성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이제 추가된 분량이 있다.

 

사실 기존의 정의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현 시점에서 봐도 충분한 설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을 표면적으로만 본 것이다. 즉, 어떤 대상 사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겉모습만을 본 것이다.

 

물론 이것을 어쩔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성의 내부, 즉 이성의 본질적 능력을 볼 수 있을 기회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성에게 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원하는 행복 자체가 바로 감정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은 불행함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감정적 존재일 때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감정, 감성 등의 단어들은 모두 인간의 고유 특징으로 여겨진다.

 

분명히 로봇은 인간보다 더 이성적인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감정을 통해 인간과 로봇을 분리하고 싶어한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인간 고유의 커다란 자부심으로 여긴다. 그러니 우리가 이성을 필요 이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

 

결국 우리는 이성의 더 높은 단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아니, 아예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들 대부분이 경험하지 못하는, 더 높은 단계의 이성은 과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단계에 이성에 이르렀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성은 감정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데, 사실 결국 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답을 내기 위해서 일단 우선 우리가 이성의 본질적 능력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매일 살아가면서 만족과 불만족, 안정과 걱정, 기쁨과 슬픔 등등 다양한 생각과 감정적 경험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생각과 경험은 모두 각자 당사자를 얼마나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인지에 대한 궁극적 목적이 있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바로 행복하고 위해서이다.

 

이렇게나 우리는 행복을 바라는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왜 이리도 바라는데 그냥 얻지 못하는 것일까?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고, 행복은 돈이 많이 필요하거나,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물질적 가치가 아니다. 그냥 감정일 뿐이다. 말 그대로 감정이다.

 

그럼 우리는 그냥 행복하면 안 되는 것일까? 배부르고 안전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행복하면 안될까? 사실 요즘 사람들 중에서 자기 한 몸 뉘일 공간이 없거나, 배를 곪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 그런 상태에서 그냥 행복할 수는 없을까? 이성적으로는 모든 조건을 갖췄는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심심해 하거나, 지루함을 느낀다. 또한 혼자 있으면 여러 가지 걱정을 떠올리면서 괜히 울적해지기도 한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그냥 행복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연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완벽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원한다면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 자체가 완전히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따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닌, 그저 감정의 변화인데, 왜 행복해질 수 없어야 하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이 남으면 왜 우울해 하고 있을까?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이나, 내일 뭔가 신나는 약속이 없어서 그럴까? 누군가와 싸운 기억이나, 미래에 닥칠 걱정이 있어서 그럴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할 까닭은 무엇일까? 어제 일어난 일을 후회하거나 내일 일어날 일을 걱정을 한다고 해도,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그나마 걱정스러운 일이 있다면, 오늘 뭔가 준비를 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 잠자리에 들어서 편하고 행복하게 잠을 자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이것을 이성적인 관점만으로 보면, 이상한 일이다. 즉, 우리가 충분히 이성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르고 있고 갖지 못하고 있는 이성의 본질적 능력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자기 전에 낮에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을 곰 씹고, 내일 있을 걱정을 상기하고, 그보다도 더 오래 전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의 어느 날을 생각하면서 끝없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행복하고 싶을 때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완벽한 이성이라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감정에 의해서 지배되는 사람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완벽한 이성은 헛된 상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도 충분히 맞고 근거도 있다.

 

단지 우리가 그런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이성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무엇을 해내야 완벽한 이성을 가질 수 있을까? 평생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될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완벽한 믿음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완벽한 신뢰가 있다면, 우리는 완벽히 이성적일 수 있다. 사실 신뢰의 단계가 최고조로 올라갈수록 이성적 능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 그리고 이 신뢰의 대상은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다.

 

종교적 믿음이거나, 신념이거나, 그냥 자기 자신에 대한 경험적 믿음이거나, 누군가 지극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말이거나 상관이 없다.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나쁜 감정,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벗어날 수 있다. 즉, 종교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 놓을 수 있다. 그것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말이다.

 

신념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 확실한 신념이 있는 분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도 높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에서는 어떤 믿음이나 어떤 신념이 우리의 목숨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그런 삶이 위대한 인간 정신을 보여주는 것임을 말이다. 죽음조차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향해 나가는 삶의 가치를 말이다. 우리는 단지 그 신념이 공산주의이거나 그 믿음이 어처구니 없는 광신도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들이 믿는 것들이 인류 보편적 가치와 부합되길 바랄 뿐이다. 사랑, 관용, 신뢰, 봉사 등의 가치 말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그것은 사람들이 판단일 뿐이다. 완벽한 신뢰의 관점에서 보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신뢰의 정도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설령 UFO와 같은 것을 믿더라도 말이다.

 

단지,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하기에, 가능하다면 남들이 인정해주는 가치를 추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완벽한 신뢰 단계에 올라서면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즉, 스스로 완전히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누구의 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때라면, 완벽한 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때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다. 감정은 온전히 이성의 제어 능력 하에 놓이게 된다. 감정은 이성의 종이 된다.

 

삶이란 과정은 사실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끝없이 살고자 하지만, 결국 죽는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비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삶을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삶이 무의미하면,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이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저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의 가치를 주장해도, 외계에서 온 외계인 입장에서 보면, 집안에 있는 개미가 집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꼴일지도 모른다.

 

그 개미가 집문서를 흔들면서 집 주인에게 나가라고 하면, 과연 누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무튼 삶의 무의미함은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단지 우리는 감정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이성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만큼의 그릇이 안 된다. 아직 우리의 이성은 너무도 부족하다.

 

하지만 무의미하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없앨 필요도 없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면, 있는 방향을 택할 수 있다. 그것이 좀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좀 더 나은 것이다.

 

이런 생각도 이성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행복한 것이 더 좋다면, 행복하면 된다. 이왕 살 거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잘 해주면서 사는 것이 좋다. 그냥도 행복하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잘 맺으면 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귀찮다면 그냥 혼자 살아도 된다. 죽어도 되고 살아도 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도 되고 혼자 살아도 된다. 사실 모든 것이 선택 가능하다. 완벽히 이성적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불완전한 이성과 완벽한 이성의 차이는 너무 심해서 도대체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불안정한 이성이 조금이라도 완벽을 향해 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지금 현재보다는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무의미함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필요한 욕망을 줄임으로써 훨씬 더 마음 편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가진 것만을 감사하면서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인가 스스로 믿는 신뢰가 필요하다. 그것을 찾는 것이 숙제이다. 그것은 가치여도 되며, 종교여도 상관없다. 신념도 좋고, 누군가의 말씀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완벽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구도의 길' 혹은 '신을 찾는 길' 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꼭 우리가 그런 힘들고 낯선 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드시 완벽한 이성을 가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조금 더 나아진 이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도 원하는 행복을 위한 길이 된다.

 

행복은 크게 두 가지로 얻을 수 있다. 하나는 가진 욕망을 모두 실현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뤄낼 수 있다. 두 번째는 바로 가진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이것 역시도 힘들지만,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능력이 부족한데 행복하고 싶은가? 그럼 욕망을 줄이면 된다. 이 답은 지극히 이성적이다. 능력이 부족한데 욕망을 줄이지 못하는 것은 불행으로 가는 특급 열차이다. 행복하고자 사는데, 불행을 향해 돌진한다. 이 얼마나 비 이성적인 행동이란 말인가?

 

비록 어쩔 수 없이 욕망을 줄였어도 지금 이 순간 가진 것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 하며, 뭔가 다 막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 같은 길을 가서는 답이 없다.

 

그래서 자신만의 신뢰를 찾아야 한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확실한 것을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무시될 수 있다. 유일하게 홀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포기가 아닌, 받아들임의 길을 가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욕망의 무의미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지금의 부족한 수준의 이성으로도 이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삶은 각자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감정의 노예일 뿐이다. 우리의 삶은 감정이 주는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따라가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실상 선택의 폭이 없다. 여자 팬티를 봐야 행복한 사람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그 짓을 하게 된다. 폭력을 쓰는 사람도, 몸이 망가지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먹는 사람들도 그렇다.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도,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도,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모두 감정이 주는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그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성의 능력을 과대 포장함으로써 마치 우리가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착각이 우리가 좀 더 이성을 발전시켜서 좀 더 완벽한 이성으로 나갈 수 있는 데 방해가 된다.

 

그렇다면 삶의 어떤 한 순간에, 감정의 노예로부터 스스로 탈출해보고자 하는 노력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설령 실패를 하더라도, 적어도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그 정도의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평생을 감정의 노예로 살았더라도 결국 삶이 행복했다고 회상하는 사람은, 사실 운이 좋은 것이었다. 그 사람에게 어떤 악운이 닥쳐서 중간에 삶이 비참해졌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삶이 정말로 소중하다면, 그것을 주사위 놀음에 맞기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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