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의식과 인식

아이루다 2016. 3. 26. 08:02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인해 최초의 단 세포 생명체가 된 배아세포가, 그 후 10달 동안의 수 많은 세포 분열을 통해서 한 명의 인간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출산을 통해 세상으로 나온 후, 보통은 부모의 특별한 보살핌 속에서 그 연약하지만 또한 강한 생명력을 유지시키면서 신생아로부터 아이로 자라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는 아직 그 어떤 의식도 그리고 그 어떤 인식능력도 없다.

 

아이는 아직도 완벽한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자신과 외부조차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거나, 똥이 마렵거나, 어딘가 아프거나, 졸릴 때 울음을 터트리면서, 자신을 돌봐주는 이에게 적절한 처리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이런 요구들은 모두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점점 더 자란다. 그래서 이젠 외부를 점점 더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기도 한다. 또한 똥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지 못한다. 그래서 손으로 똥을 만지기도 한다.

 

아이는 더 자란다. 그리고 인식 능력이 좀 더 발달한다. 그래서 똥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따라 하는 존재가, 자신의 부모 처럼 한 명의 사람임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즉, 아이는 세상과 자신을 조금씩 구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는 더 성장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어린이 집에 가거나, 옆집 아이 혹은 친척집의 다른 아이와 어울릴 기회가 있다. 아이는 그 순간 처음으로 경쟁자를 만난다.

 

경쟁을 처음 경험하는 아이는, 자연스럽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태도를 배운다. 누군가로부터 뭔가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는 말에 최대한 제대로 반응해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크게 웃으면 웃을수록, 뭔가 더 맛난 것을 얻어 먹거나 혹은 흥미로운 장난감을 얻을 수 있게 됨을 알게 된다.

 

이 순간 아이의 무의식에서 처음으로 의식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생겨난다. 즉, 본능적 반응이 아닌, 뭔가 생각의 결과로 자신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아이의 이런 조절 능력은 무척 부족하고 불안해서 아이는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울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처음으로 에고를 만들어 낸다.


이때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은, 이제 막 생성된 에고에게 대단한 먹이감이 되어준다. 원래 생존 본능으로부터 생겨난 에고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생존의 가장 중요한 열쇠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에고는 경쟁의 화신이 된다.

 

하지만 아이의 에고는 아주 원시적이다. 인식 능력의 부족하기 때문에, 아이는 어른들에 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에 대한 가치를 짐작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아이는 만 원짜리 보다는 사탕 하나를 얻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어른들은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욕심이 없다거나, 순진하다고 느끼면서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단지 그것이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했을 뿐이었다.

 

아이는 더욱 성장한다. 그리고 정규화된 교육과 살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경험을 통해서 가지고 있던 인식 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리고 그럴수록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아이는 이제 만 원짜리와 사탕 중에서 만 원짜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화폐의 개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 종이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부모와 가게를 갔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인식 능력이 발달하고 더불어서 에고 역시도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아이는 이제 수십 명이 모인 학교에 가서 가장 피나는 경쟁을 해야 할 처지가 된다. 아이의 삶은 이제 무한대의 경쟁 상태에 놓인다.

 

아이는 거기에서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잘하고 못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다시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오게 되는지에 대한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처음으로 에고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상처를 받게 된다.

 

아이는 상처받은 에고를 달래주길 바란다. 그래서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해서 에고를 만족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 틈 만나면 그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의 의도와는 다르게, 모든 다른 아이들 역시도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서로 각자 자신만의 것을 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때, 사람을 끄는 능력이, 즉 매력이 그것을 결정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이는 매력을 갖고 싶어하고, 인기를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때 아이는 외모나 운동 능력 등이 그것에 크게 영향을 미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외모를 꾸미고 싶어한다. 여자 아이는 예뻐지고 싶어하고, 남자 아이는 운동을 잘하고 싶어한다. 아이들은 키에도 신경을 쓰고, 머리 모양도 꾸미며, 옷도 좋은 것을 입고 싶어하게 된다.

 

아이가 자랄수록 인기를 끌 수 있는 조건들은 늘어난다. 그래서 초기의 외모, 능력 뿐만 아니라 유머, 재력, 말재주, 남다른 경험, 그림 그리기, 노래 잘 부르기, 뭔가 많이 아는 것, 공부를 잘하는 것 등등도 매력이 될 수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외모로 남는다.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최초의 상태, 즉 무의식과 무인식은 점점 에고의 성장과 인식의 정확성 및 다양성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결과가 나는 것이 아니다. 에고를 키우는 것은 경쟁인데, 경쟁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자가 된 에고는 교만해지고, 우쭐해지며 결국 우월감으로 가득 차게 되고, 반대로 패자가 된 에고는 찌그러지고, 우울해지며, 결국 열등감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 정도는 각자 타고난 능력에 따라 결정이 된다. 그것이 외모이든, 지적 능력이든, 운동 능력이든, 그림이나 노래를 잘 부르는 능력이든 상관없다. 모든 능력은 자신이 주어진 환경에서 적합할수록 더욱 더 크게 영향을 미친다.

 

예쁜 외모는 남자에 비해서 여자들에게 더욱 의미가 있고, 운동을 잘하는 능력은 여자에 비해서 남자에게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골의 아이들에게는 옆집에 누가 사느냐가 중요할 수 있고,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어떤 아파트의 몇 평에 사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이 복잡함은 사실 분류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경우의 수를 생산해낸다. 그래서 사람들의 성격이 이리도 다양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가지 공통점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에고가 상처를 받으면 받을수록 열등감을 많이 느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집착을 만들어 내는 주범이 된다.

 

특히 어린 시절에 받은 에고의 상처는 삶에서 전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부모로부터 그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아이는, 그것으로 인해 받은 깊은 상처를 스스로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평생 동안 그것에 매달려 살기도 한다.

 

설령 그 과정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더라도 결코 중단할 수 없다. 잘되지 못할 경우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자신을 증명 받고자 한다.

 

아무튼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될지 모르지만, 아이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이때 아이의 내부엔 커질 대로 커져서 이젠 의식 체계의 주인이 된 에고와 경험을 통해 성장한 인식 능력이 완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삶을 관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아이는 어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 수정된 배아 상태의 아이와 어른이 된 아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체적 변화 말고도 무엇인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인식 능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람은 제대로 의식을 갖게 된 것일까?

 

사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무의식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의식적이라고 믿는 이유는 단 하나, 에고의 존재 때문에 그렇다. 에고는 자신을 만족 시키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방향을 정해준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뭔가를 스스로 정한다고 믿게 된다. 만 원짜리와 사탕 중에서 만원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의식은 없다. 우리는 이미 결정된 것을 인지하고 실행하는 것뿐이다. 모든 것은 무의식에서 결정이 된다. 그리고 무의식과 의식 사이엔 에고가 자리잡고 있다. 무의식은 끝없이 생존을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에고는 그 중간에 생존의 가능성을 행복이란 감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즉, 우리는 에고를 만족시킬수록 행복해진다. 우리는 무의식이 원하는 단지 먹을 것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에고가 원하는 맛있는 것을 먹어야 더욱 더 행복해진다. 우리는 심지어 스스로를 죽이기 까지 한다. 에고를 만족시키지 못해서 절망하게 되면, 에고가 우리를 자살시킨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알고 있는 부분은, 무의식 속에서 결정된 결과를 에고가 자신의 의도대로 틀어 놓은 결과를 인지하는 상황뿐이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결정을 했다면, 그 어린 시절에 경쟁을 통해서 갑자기 만들어진 에고가 원하는 것을 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은 탈출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적 활동의 결과로 인해서 이성적 능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의를 차릴 줄 알며, 먹고 싶다고 해도 참을 수 있는 참을성을 배운다. 우리는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해서 오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할 줄 아는 절제 능력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양보하고 배려하는 능력을 배운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능력들을 배운다. 공감 능력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을 배워도 결국은 에고가 원하는 방향이 된다. 왜냐하면 에고는 이성조차도 자신의 수족으로 쓰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에고의 노예가 된다.

 

감정을 장악하고 있는 에고는 언제든 그 무기를 휘두르면서 이성의 반항을 쉽게 무시해버리고 만다.

 

이때 사람은 이성적으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하지만, 감정이 원하기에 터무니 없는 짓을 한다. 남을 욕하는 것도, 질투하는 것도, 싸움을 하는 것도, 모두 그런 일의 결과이다. 분명히 이성적으로는 해서도 안되고, 하면 나쁘기만 한 것들을 감정적 결정으로 한다. 즉, 에고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기 파괴 행위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것의 최악의 결과가 바로 자살이다.

 

에고에 위해서 감정을 장악 당한 우리들에겐 선택권이 없다. 조금이라도 에고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하면, 바로 불행함이 찾아온다.

 

지금 당장 많이 먹으면 살이 쪄서 결국 자신의 매력이 더 없어질 것도 알고 건강에도 이상이 생길 것을 알지만, 탐욕스러운 에고의 욕구로 인해서 결국 통닭을 시키고 맥주를 먹게 된다. 거기에다가 에고에 완전히 눌려서 이젠 완벽히 노예가 되어버린 이성은 이제는 통닭과 맥주를 찬양하는 글을 읽고 씀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고까지 한다.

 

그리고 보통은 이 상태에서 삶을 마감한다. 평생 의식이라고 믿은 에고는 경쟁이 만들어 낸 괴물임을 알지 못한 채, 사실상 완벽히 무의식적으로 살다가 삶을 마감하게 된다.

 

우리들은 누구나 기회는 있었다. 한때 우리는 지적 능력으로 인해 발달한 이성적 능력으로 이 에고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작은 틈을 만들 수 있었다. 아니, 독립은 못해도 적정한 수준에서 에고를 견제하면서 좀 더 낫은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 기회를 놓쳤다.

 

에고는 참으로 교묘해서 결코 쉽게 뚫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마다 차이는 현저하다. 특히 에고의 발달은 그 사람의 어린 시절 경험에 따라서 크게 좌우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천적으로 발달하는 성격과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에고가 적게 발달한 사람들은 보통 아이와 같이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욕심이 적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선천적 성격에 의해서 좌우된다. 원래 욕심이 별로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가 에고마저 적게 성장하면, 착하고 선한 어른이 된다.

 

사실 너무 대책 없이 착해서 문제가 될 지경이다. 세상은 이빨을 가득 드러낸 에고들의 전쟁터인데, 홀로 너무 연약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괜찮은 것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에고들의 전쟁에서 크게 힘들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힐링을 원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교묘하게도 힐링 그 자체도 자신의 욕망으로 변질시켜 버리고 만다. 즉, 힐링 하는 자신을 행복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기회는 있다. 비록 오늘 에고를 만족시켜서 작은 행복을 얻기 위해 쉴 새 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미약하게 남은 이성적 능력으로 인해 그것이 꽤나 피곤하고 스스로도 별로 좋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좀 덜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선한 존재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치유가 된다.

 

그래서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사실 그럴 때 우리는 매우 좋은 결과를 얻는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감이다. 즉, 진심을 서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에고의 존재를 벗어날 흔하지 않는 기회를 얻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에고를 더 이상 키우지 않고 줄일 수 있는 기회이다. 에고는 경쟁을 통해 자라나기 때문에,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에고는 줄어들거나 더 이상 성장을 멈출 수 있다.

 

우리는 부러워할지언정 질투하고 싶지 않아하고, 잠시 상심이 될지언정 화를 내고 싶지 않아한다. 우리는 좀 좋은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에고는 경쟁 속에서 끝없이 우리를 내몬다. 남을 눌러야만 살 수 있다고 계속 주장한다.

 

사람이 경쟁 상태에 지속적으로 놓이면 반드시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보통의 에고는 과하게 성장하면 성장했지, 결코 덜 성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타고난 선한 사람들이 적다. 설령 타고난 선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것이 평생 유지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누군가와 결혼을 하거나 깊은 관계를 맺으면, 상대의 에고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 상대가 훨씬 강한 에고를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에고는 쉽게 종속되어 버린다. 착한 사람들이 망가지는 순간이다.

 

에고는 사실 상상 이상으로 교묘하다. 그래서 설령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에고의 농간이 된다. 우리는 선한 것을 찾지만, 에고는 선한 것을 흉내 냄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얻도록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선해졌다고 믿는다. 이성조차도 속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는 아직 존재한다. 이성은 지금 이순간에 노예가 되었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적 능력을 통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그래서 인식 능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다. 그것을 직접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간접적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특히 과거에 에고와 싸워서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크게 영감을 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에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마음껏 행동해 온 에고의 존재를 알게 된다.

 

우리를 우쭐하게 하고, 잘나고 싶은 욕구를 만들고, 감정을 장악하고 온갖 패악질을 해 온 그 존재를 알게 된다. 우리에게서 좀 더 선하게 행동하고,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뺏어간 에고의 존재를 알게 된다.

 

질투하고, 비겁하고, 화를 내고, 두려워하고,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고, 욕망만 가득 찬 에고의 존재를 말이다. 우리의 불행이 사실은 모두 에고가 만들어 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에고가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행복이 오직 경쟁을 통해서 만들어진 심하게 뒤틀리고 변질된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잘남으로써 행복하고, 존재감을 느낌으로써 행복하고, 인정 받음으로써 행복하지만, 사실 이것은 단지 생존을 위해서 에고가 지속적으로 요구한 것뿐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음에도 끝없이 그것에 종속된 채 살아간다.

 

에고는 끝없이 욕망을 만들고, 그것을 마치 삶을 위한 에너지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열정을 말하고, 희망을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내는 거의 모든 것은 결국 에고의 욕망이다.

 

정말로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면, 그냥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좋은 결과는 그냥 그대로 좋은 것이다. 무엇인가 좋은 결과를 바랬다면, 그것은 그저 에고의 욕망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또 하나의 무기를 추가적으로 가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얻는 현명함이다.

 

우리에게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이제는 나이가 주는 경험의 현명함과 지식을 통해 얻는 이성적 능력이라는 중요한 두 개의 무기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평생 동안 자신을 지배해 온 에고의 싸울 수 있는 기회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의식을 경험할 수 있다.


에고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야 말로 최초의 진정한 의식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지금 의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사실은 무의식에 붙어 있는 에고의 지시를 이행하는 불완전하고 종속적인 의식일 뿐이다.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는 모든 것은 각자의 몫이다. 단지 슬픈 것은 에고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때는, 자신이 노예인 줄 조차 모르고 살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생을 에고의 노예로 살아가든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든가 아니면 그나마 적정 수준에서 타협하고 살든가 는 오직 그 자신이 결정할 일이다.

 

그리고 어떤 결론이 나든 하나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에고는 오직 경쟁이 만들어 낸 괴물이다. 그래서 에고가 만들어 내는 모든 행복은 바로 허상이란 점이다. 결국 에고의 행복은 혼자 살면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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