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유일한 평등함, 행복

아이루다 2016. 3. 28. 07:55


 

아주 잘 생긴 남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 물론 잘생김과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없기에 그것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사람으로써 인정받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반면에 아주 못생긴 사람들도 있다. 역시나 못생겼다는 기준도 상대적이지만, 아무튼 인간들 사이에서 외모의 생김새의 차이는 확실하게 존재한다.

 

지적 능력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초월한 수준으로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고, 동물의 지능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 인간은 외모나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대단히 많은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키, 몸매, 성격, 언변, 목소리, 노래 실력, 그림 그리는 능력, 구도 잡기, 감성 성향, 글 쓰기, 지배력, 지도자 성향, 다양한 손재주, 민첩함, 힘, 판단력, 지구력, 논리력, 인내심, 이해력, 선함, 정열, 의지력 등등 사실 이것을 다 적으려면 엄청난 단어가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수 많은 종류의 능력들에서, 그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최상위 계층과 그렇지 못한 최하위 계층을 비교하면, 사실 두 계층이 같은 인간으로 묶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지 몇 가지 물리적 공통적인 특징만으로 그 차이를 무시하고는 모두 '인간' 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가진 능력에 따라 정말로 심하게 차이 나는 대접을 받는다. 아주 쉬운 예로,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와 정말로 못 생긴 여자를 서로 같은 옷을 입인 채 세워 놓을 경우, 이 둘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눈빛은 서로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이 느끼는 기분 역시도 심하게 차이가 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타고나는 능력은 결코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능력은 거의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편이다. 그나마 후천적으로 계발되는 능력도 있지만, 사실 어느 정도 타고나지 못하면, 그냥 취미 생활 수준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이 상황을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뭔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다. 우리는 이미 타고남과 동시에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으며, 그렇게 결정된 상태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누군가는 태어나니 억만장자의 자녀이고,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진다. 누군가는 정말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서 눈부시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반면, 누군가는 누가 봐도 혐오감을 드러낼 만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서 평생을 혼자서 우울하게 살다가 죽는다. 누군가는 끝없이 아프고, 누군가는 흔한 감기 한번도 안 걸린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 이런 불공정함은 존재할까?

 

물론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이 우리를 위해 각자만의 계획을 세워놨다고 말하긴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예쁘고, 부자이고,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이 못생기고, 가난하고, 끝없이 어딘가 아픈 사람보다는 낫다. 이 두 경우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누가 과연 후자를 선택할 것인가?

 

이미 말했듯이, 어떤 상태로 태어난 것은 결코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냥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날 때 가진 능력과 태어날 때 주어진 환경이 조합이 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분화가 된다.

 

인간들은 사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인간의 평등함을 외치지만, 사실 우리는 결코 평등할 수 없다. 아무리 한 사람마다 동일한 가치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을 기계적으로 평등한 존재처럼 다루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한 의미의 평등함을 결코 이뤄낼 수 없다.

 

이것은 원래 해결 방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그런 관점에서 다루지 않는다. 즉, 우리는 그냥 이 차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을 만들어 두었다. 즉, 단지 그 차이를 대놓고 차별하는 모습을 멀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최대한 인간은 인간으로써 대접하려고 한다.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각자마다 고유한 삶이 있고, 각자만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말을 한다. 누구나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마다 쓰임새가 있을 것이라고 설득한다.

 

맞는 말이긴 하다. 못생긴 사람은 잘생긴 사람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하긴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웃기는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어서 운이 좋다면 개그맨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평생 동안 못생겼다는 소리는 들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평범하고 못생긴 사람들은 흔한 데이트 한번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없기에 포기하지만, 가능하다면 그 불만을 해소하고 싶어한다. 외모에 불만족스러운 여자들이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심각한 노력들은 나중에 어떤 문제가 되어서 돌아올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 불평등함은 우리 인간 모두가 그냥 감당해야 할 것일까? 도대체 바꿀 수 없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니,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일단은 그렇다. 그런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 모든 불공정하고, 불평등함을 상쇄시킬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 이다.

 

뜬금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말이 정답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종류의 능력이 필요한 진정한 이유는 바로 오직 행복하기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진 모든 종류의 능력은 오직 행복하기 위해서 사용된다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능력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한 사람이거나, 혹은 행복해 보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행복이란 말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말이다.

 

노래를 잘하면 행복해지는 이유는,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도 기분이 좋지만, 다른 사람들이 같이 좋아해주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도가 높아져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사실 노래를 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행복하기에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보통은 꽥꽥 소리를 지르는 것이 소음만 발생시키는,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만약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이 행복하다면, 그것도 바로 능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뛰어난 능력들은 행복을 얻는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한다. 얼굴만 예뻐도 살기 얼마나 편한 세상인지 모른다. 머리가 좋으면 돈을 벌기가 쉽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다면 부와 명예는 아주 쉽게 얻어진다.

 

그럼에도 좋지 못한 환경에서 잘못 적용된 능력은, 더 이상 능력이 아닌,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아름다운 외모는 적절한 환경에 있지 못하면, 수 많은 남자들에게 욕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뛰어난 지적 능력 역시도 성격과 환경이 바쳐주지 못하면, 삐뚤어져서 사기는 치는 능력으로 발전될 수 있다.

 

우리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큰 요소, 즉 수 많은 종류의 능력이 가진 본질적 한계점은 우리 인간이 구별 없이 모두 똑같은 존재라는 점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오직 그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다음과 같은 희망적인 결론을 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바로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종류의 능력 차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란 점이다.

 

물론 우리가 능력도 없이 행복하긴 힘들다. 하지만 행복할 수만 있다면, 능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돈이 아무리 많은 부자라고 해도, 가난한 이들보다 무조건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은 언제나 유효한 가정이다.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더 나은 능력을 가져야 할지를 고민할까? 더 나은 능력을 가진 이들을 질투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왜 자신은 이렇게 태어났는지 스스로 자학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오늘도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살아가야 할까?

 

행복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니, 이 행동들 중에서는 그나마 노력하는 삶이 낫다. 하지만 노력 역시도 타고난 능력 중 하나일 뿐이다. 노력할 수 없는 사람들은 평생을 노력할 수 없다. 게으르고, 쉽게 질리며, 힘든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결코 노력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담배를 아주 쉽게 끊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노력했으나 못 끊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냥 그 사람이 타고난 성격적 특징의 문제이다. 혹은 신체적 특징일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이유라고 해도 우리는 이것을 분리시켜 볼 수 있는 통찰력은 없다.

 

아무튼 결국 우리가 타고나지 못한 능력이나 부족한 능력을 바라보는 관점은 좀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단지 행복하길 원할 뿐이다. 능력들은 그것을 위해 아주 좋은 도구들이다. 특히나 모든 능력이 동일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외모나, 남자에게 많은 돈은 이성을 유혹하는데 매우 대단한 수준의 역할을 한다. 그런 것들은 인내력이나 정직함의 가치보다도 더 높게 평가 받기도 한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능력에 대한 좀 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바로 능력이 행복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오직 우리 인간 사회에서 서로가 인정해 준 결과일 뿐이란 점이다.

 

우리 모두가 외모를 높은 가치화 시켰기 때문에 외모는 능력화가 된다. 우리 모두가 돈을 높은 가치화 시켰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는 다양한 능력이 바로 가치화가 된다. 우리가 11명이서 공을 차서 상대 골대에 골을 넣는 것을 가치화시켰기에, 4년마다 월드컵이 열린다.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아무리 위대한 능력도 무용지물이 된다. 혹은 돈을 버는데 별로 쓰임새가 없어도 마찬가지다.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은 누구도 갖지 못한 대단한 능력이지만, 잘해야 심해 잠수부나 혹은 해녀가 되어서 전복을 따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즉, 능력은 그 능력 자체로는 행복화 될 수 없다. 타인의 평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좀 더 다른 결론을 낼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의 평가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능력의 최종 목표가 행복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오직 행복함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행복할까?

 

사실 인간의 행복은 아주 단순하게 얻어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운동을 해서 몸이 활성화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면 행복해진다. 우리는 비싼 요리가 아닌, 맛있는 요리를 먹을 때 행복해진다.

 

우리는 집을 깨끗하게 청소할 때 행복해진다. 우리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 행복해진다. 우리는 기분 좋은 글을 읽거나 재미있는 만화를 읽을 때 행복해진다.

 

우리는 산책을 하고, 여행을 떠날 때 행복해진다. 우리는 봄에 새싹이 나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행복해진다. 우리는 가을 단풍이 물든 거리를 걸을 때 행복해진다. 우리는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동네 고양이의 행동을 보면서 행복해진다.

 

물론 이런 것들을 행복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이유는, 다른 방법으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잊어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단순히,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행복해진다. 즉, 건강하기만 해도 많이 행복하다. 병원에 가보면 이 말이 진리임을 알 수 있다. 병원에 가면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예쁜 사람도,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모두 오직 건강해지기만 바라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는 예술가도, 지도자도, 연예인도, 스포츠 스타도, 재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오직 건강해지기만 바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과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확실하게 능력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도구들이지만, 반드시 그것만을 통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물론 그것조차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답이 없다.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능력이 없다면, 도태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게 태어났다면,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어야 한다.

 

단지, 죽기 전에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진정으로 노력해봤는지 말이다. 정말로 아무런 다른 목적 없이, 오직 건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해 본적이 있는지 말이다. 재미나, 인정이나, 가치나, 흥미로움이나, 다른 이들의 관심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노력해 봤는지 여부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랬는데도 안 된다면, 답이 없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위대한 생존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피엔 누구나 그 강한 생존력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단지 위로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원래 그렇다.

 

행복함은 건강하고, 주변을 볼 수 있는 감성을 가짐으로써 충분히 만족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욕망과 과도한 기대치 때문이 그렇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좀 더 나은 능력을 갖길 바란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늘 이룰 수 없는 욕망이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우리는 매일 과거를 후회한다. 우리는 매일 미래를 걱정한다.

 

수 많은 기대가 걱정을 만들어 내고, 후회를 생산해낸다. 다른 이들을 보고 욕망을 만들어서 그것을 이루려고 애쓴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나마 이유가 설명하라고 하면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면 행복해지니까 그렇다고 한다.

 

물론 행복해지긴 할 것이다. 평생 동안 그리도 가고 싶었던 유럽 여행을 가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 여행이 영원히 계속될 리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언젠가 돌아오면, 죽을 때까지 그 여행 이야기만 하다가 죽을 것이다.

 

현재를 사는 삶인데 의식은 언제나 여행을 가는 미래를 향해 있다가, 갔다 온 후에는 과거를 향해 있다. 삶은 현재에 있는데, 의식은 늘 미래나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를 비관한다. 현재를 불만족스러워 한다. 이것이 과연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운동을 한 후 몸에서 느껴지는 활력은 오직 그 순간에만 유효하다. 몇 시간만 지나도 사라진다. 뜨거운 온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그 순간에 너무도 좋다. 새소리를 듣는 것도, 이제 막 피어나는 봄 꽃들을 바라보는 것도 모두 같다. 그냥 모두 그 순간에 행복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럽 여행을 다녀올 돈이면, 평생 누릴 수 있다. 즉, 참 얻기 쉬운 행복이다. 때가 되면 모두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새에게 소리를 내라고 할 필요도, 풀에게 꽃을 피우라고 조언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오늘도 능력에 집착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좀 더 경쟁력 있고, 매력이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한계이지만, 그 한계는 결코 깨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변화는 불가능하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죽음이 임박해서야 결국 착각임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질화  (0) 2016.04.04
완벽한 이성  (0) 2016.04.03
의식과 인식  (0) 2016.03.26
인공지능과 인간  (0) 2016.03.14
진실한 행복  (0) 201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