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동질화

아이루다 2016. 4. 4. 09:11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꽤나 심상치 않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죄는 보통 다른 존재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는 일이다. 그 다른 존재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동물과 식물, 지구와 같은 무생물에게도 적용시키곤 한다. 아무튼 그 대상이 무엇이든,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은 죄로 간주된다.

 

사람은 죄를 저지르는 주체이다. 물론 사람만 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집안에 키우는 개도 죄를 저지른다. 문제는 개는 보통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개는 오랜 훈련에 의해서 그것을 죄로 인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느끼는 죄와는 조금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개가 되어 보지 못하니 확실하지는 않다.

 

죄는 저질러지는 대상이고, 사람은 저지르는 주체이다. 그런데 대상을 미워하고, 주체는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어쩐지 이상하다. 포장지에 싼 선물에서 포장지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선물은 내용물로써 정의된다. 포장이 아무리 그럴 듯 해도 결국 내용물이 선물인 셈이다.

 

대상이 주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마치 선물 포장지가 선물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말은 쉽게 와 닫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했을까?

 

사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나마 흔히 이해하는 이해라고 해도, 결국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어떤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 수준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부모로부터 심하게 학대를 받아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가 삐뚤어져서 범죄를 저지를 때, 그 아이의 죄를 단지 그 아이에게만 물을 수 있느냐는 점에서 보면 그렇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이 말한 '죄 없는 자만이 돌로 저 여인을 쳐라' 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다. 즉, 우리 모두는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행동에 대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사정을 그 집안 사정이라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사회는 그리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투표만이 우리가 행하는 공공의 행동이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끝없이 상대를 견제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덜 죄를 짓도록 자신도 모르게 매일 행동한다.

 

우리가 매일 남의 험담을 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주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평가에 자기 성격에 따라 반응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둔감하다.

 

아무튼 우리가 즐거움을 위해 남을 험담하든, 분함을 풀기 위해서 욕을 하든, 그 모든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건전해진다. 설령 죄를 짓더라도 숨기려고 한다. 도덕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 사회 전체적으로도 일어난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 사는 아이의 행동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에 사는 아이의 행동이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 아주 미약하게 연결되기도 하고, 우연이 한 아이가 그 나라를 방문해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누군가가 죄를 저질렀을 때, 우리가 그 죄를 오직 그 사람의 책임만으로 몰아 붙일 수 있는 정당성에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물론 너무도 흉악스러운 범죄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그런 흉악스러운 존재가 된 것 자체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인간의 아이는 누구나 착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일 때부터 악독한 아이는 드물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다들 악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그런 변화가 일어날까?

 

이 정도까지만 생각할 수 있어도, 죄를 미워하고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가진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해가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조차도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 수준만 되도 꽤나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추가적으로 더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동질화이다. 즉, 어떤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때, 그 사람과 죄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 과연 무조건 옳은 관점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물론 이 말은 어처구니 없는 말이긴 하다. 도대체 어떻게 주체와 대상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자. 어떤 사람이 못난 얼굴을 타고 났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못난 얼굴을 타고 태어나서 평생 여자와 데이트 한번 못해봤고, 그렇게 살다가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고 죽었다.

 

그냥 못나게 태어나서 그렇게 산 것이다. 그 사람이 잘난 얼굴로 태어났다면,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을 것이다. 이 삶이 꼭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우리의 보편적 판단으로는 더 나아 보인다.

 

그런데 이 못난 외모는 온전히 이 사람이 책임져야 할 몫일까? 물론 부모의 책임이 클 것이다. 하지만 그 부모라고 해서 이 사람의 외모를 온전히 다 책임져야 할까? 사실 자식의 외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유전자 섞임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못난 사람의 부모조차도 그들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니 그들도 간접적 피해자이다. 사실 이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인간들의 부모들이 문제이다. 성경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일 텐데, 아무튼 그것은 누군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니, 그냥 아담과 이브의 책임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들은 모든 이들의 부모이다. 그렇다면 못난 사람이 못난 것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게 되면, 아담과 이브가 그 책임을 져야 하고, 그러면 우리는 우리 모두의 공동 조상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조차도 자신의 후손 중에서 못나게 태어나서 결혼도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실 못나게 태어난 것은 큰 문제도 아니다. 배속에서 죽는 아이도 많고, 태어나자 마자 죽는 아이도 많다. 기형아로 태어나거나 선천적 불구로 인해 평생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다. 더해서 사고나 병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생긴 문제로 평생 괴로움에 시달리다 죽는 사람들도 많다.

 

이 모든 것은 각자의 책임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담배를 많이 피우고 운동을 안 하는 사람이 병에 더 잘 걸린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성격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심리학자들에 말에 따르면 우리는 타고난 성격과 더해서 3세 이전에 후천적 성격이 거의 다 결정된다고 한다. 즉, 우리가 전혀 기억도 못하는 시기에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린다. 도대체 우리가 선택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각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경향이 있다. 누가 그 사람의 못난 얼굴을 책임져 줄 수 있을까? 어떤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은 외모의 복을 받았으니, 못난 사람에게 베푼다는 마음으로 그 사람과 결혼을 해줄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평강공주 증후군' 이라고 부르는 증상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보 온달이 아닌, 뛰어난 장수 온달이 될 가능성도 그리 높지 않다.

 

이 문제는 외모뿐만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경쟁력 있는 모든 종류의 능력이 모두 같은 입장이다. 지능, 외모, 운동 능력, 성격 등등 우리 인간 사회에서 좋을 수록 좋은 능력들은 모두 그렇다.

 

누구도 못난 것에 책임지지 않는다. 또한 누구도 잘난 것을 자신의 권리로 여기는 것에 토를 달지 않는다. 그냥 처음부터 불평등한데, 그냥 인정하고 만다. 그럼에도 그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삶의 차이는 너무 심해서 도대체 같은 인간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누군가는 겨우 하루에 한끼로 연명하고, 누군가는 매일 한 끼에 수 백 만 원짜리 밥을 먹는다.


당사자의 책임도, 누군가의 책임도 아닌 불평등하게 타고난 유전적 성향이 삶의 기본 진로를 모두 결정해버리고 만다. 자연법칙으로 말하면, 적자생존이다. 이 시대가 원하는 것을 타고난 사람이 더 잘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법칙이라고 해도, 불평등한 것은 변함이 없다.

 

이것은 도대체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우리는 잘난 사람들에게 좀 더 세금을 걷어서 해결하고자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을 통해 부의 불균형은 해결할지 몰라도, 개인의 행복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어떤 식으로든 돈을 잘 벌어서 세금을 더 많이 내는 편이 좋다. 남의 도움을 받아서 사는 것보다 말이다.

 

또한 개인적 성취감이나 행복도 크게 다르다. 자존감이 다르고 존재감도 다르다. 같은 돈이 있어도 각자 경험하는 행복은 너무 큰 차이가 난다. 확실하게 잘날수록 행복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아름다운 여자가 누릴 행복을, 못난 여자는 결코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에는 정말로 아무런 답이 없는 것일까?

 

사실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있긴 하다. 하지만 무척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능력과 사람을 분리해서 보는 방법이다. 누군가 잘났다는 것을 그 사람이 잘난 것이 아니라, 잘남 자체와 그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다. 물론 잘나서 더 잘 살 것이다. 이것은 다름이 없다. 하지만 그 잘남이 그 사람의 능력은 아니다. 그와 능력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도 아니고, 그냥 타고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노력을 하는 것도 타고났기에, 그 어떤 것도 타고나지 않는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과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분리해서 보는 방식에 매우 서투르다. 누군가 노래를 무척 잘한다면, 그 사람이 노래를 잘한다고 여기지,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노래는 노래다 라고 여기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인식 체계에서 매우 일반적이고 고정적인 판단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부모의 부가 자식에게 전달될 때 일어나는 일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부모의 부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자신의 타고난 능력이라고 말할 것이다. 부모를 결정한 것은 자신은 아니지만, 억만장자의 아이로 태어난 것도 개인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래나 지능은 그냥 넘어가지만 돈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다. 인간 몸에 스며든 능력들은 인정하면서, 인간 외부에 있는 능력들은 사람에 따라서 분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애매해진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보니, 부모가 도공이었다. 즉,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주 도자기를 접해서 그 자신도 도공의 삶을 살게 되었다면, 이것은 사실 부모의 직업이라는 외적인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도자기 만드는 재주라는 내적 능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부모가 하는 가계를 이어 받거나, 부모가 하던 직업을 따라서 하는 것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부분에서 사람과 능력을 하나로 보는 것과 분리해서 보는 관점, 이 두 개가 어지럽게 뒤섞여 버린다. 그래서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혼란이 생겨난다.

 

내적인 능력들은 사실 분리시키고자 한다고 해서 분리될 것도 아니니, 분리를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 부모의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일치화 시키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이 돈이냐, 지능이나 외모냐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란 뜻이다.

 

우리는 요즘 가끔 연예인들이 TV에 자신의 자식들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하게 바라본다. 사실 그 아이들은 태어나니 유명 연예인의 자녀였다. 그래서 TV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이것을 어떤 관점에 따라서 보느냐는 각자 입장에 달렸다. 누군가는 좋게 보고, 누군가는 불평등함으로 이유로 싫어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타고난 각종 능력을 보는 입장은 하나로 획일화 되어 있다.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이 관점을 분리해서 보는 것으로 바꿔보도록 하자.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의 잘남을 그냥 평범한 눈으로 볼 수 있다. 분리가 되면 될 수록 그것이 가능하다. 머리가 좋은 이들은 머리가 좋아서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머리가 좋으니 그런 것이다. 그래서 부러움이나 질투가 생겨날 필요가 없다. 이것만 가능해져도,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훨씬 덜 불행할 수 있다. 사실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질투이기 때문이다.

 

못난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가 질투 나지만 않아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사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냥 다른 삶을 살면 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택하는 삶을 동경한다. 부럽고 질투가 나기 때문이다. 그 삶이 더 행복해 보여서 그렇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보통 부러움과 질투는 능력으로 인해 발생하지만, 실제로 질투가 향하는 곳은 바로 사람이다. 사실 이것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능력이 원인인데,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니 관점을 바꿔서 제대로 바라보면, 좀 달라 보인다. 결국 능력과 사람을 분리해서 보면, 능력은 부러울지 모르지만, 사람이 부러울 것은 없다.


더해서 자신의 잘남에 대한 끝없는 욕구도 사라질 수 있다. '나' 와 '잘난 능력' 이 구분되기 시작하면, 잘난 능력은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서 잘날 필요는 있지만, 거기까지만 필요하다. 잘남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단지 편하고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불편해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

 

이제 죄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같은 원리로 죄 역시 사람과 분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말은 생각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 된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신' 이라고 칭할 때, 과연 그 존재는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가진 능력까지를 자신에 포함시킨다. 그림을 잘 그린다면 그림을 잘 그리는 자신이고, 얼굴이 예쁘다면 얼굴이 예쁜 자신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그러다가 만약 팔이 잘려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거나, 화상을 입어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거나 늙어서 추해지면, 우리 자신은 사라지는 것일까?

 

사실 돈과 지능의 차이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언제든 없어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사라질 가능성이 낮다.

 

결국 우리는 위험도 여부에 따라서 그것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적 능력들도 어떤 식으로든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부모로부터 받은 돈과 같은 입장이 되지 않을까?

 

단지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돈과 지능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좀 더 들어가보면, 우리가 우리를 '자신' 이라고 부를 때, 각종 능력들을 포함 시키는 것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닐까?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들을 자신과 동질화 시킴으로써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이 부분은 생각을 확장시키기에 한계가 있어서 더 이상 뭔가 설명할 것이 없긴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고의 단초를 잊지 말아야 할 필요는 있다.

 

그래야 '진정한 나' 라고 부를 수 있는 본질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에고를 한껏 만족시키는 외적이든 내적이든 가지고 있는 능력들과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에고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작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부모의 부를 자신과 일치 시키는 사람보다는, 부모의 부는 부모가 이룬 성과라고 선을 긋는 사람이 좀 더 나아 보이니까 말이다. 비슷하게 자신의 머리가 좋고, 외모가 뛰어난 것이 자신의 잘남이 아닌, 부모가 준 능력일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더 나아 보이지 않을까?

 

물론 더 나아 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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