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혐오감과 연민

아이루다 2016. 4. 9. 07:26


 

가장 최근에 접한 감정 분류법에 의하면, 인간의 기본 감정은 총 6가지로 분류가 되고, 혐오는 그 중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감정들은 각각 분노, 공포, 슬픔, 기쁨, 놀람 이라고 한다. 뭐 그렇다고 이 분류법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분류한 가장 제대로 된 정답이란 소리는 아니다. 그냥 그렇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 자주 느끼는 감정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혐오감이 생각보다 우리 인간에게 본질적인 감정이란 점에서 이채롭다. 사실 우리 인간의 가장 근원적 감정은 바로 공포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우리의 모든 감정은 공포에서 시작되어서 다른 감정들로 변해간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혐오감은 공포가 짜증으로 변한 경우라고 보면 된다.

 

혐오감은 원래 그리 좋은 감정은 아니다. 뭔가 기분이 나쁘고, 공포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능하다면 아예 안 느끼고 싶어한다.

 

하지만 느끼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느껴지며 그것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에 어떤 대상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혐오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에서 연민이란 감정도 있다. 연민은 비록 기본 감정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사실 혐오감보다도 더 자주 느끼는 감정일 수 있다. 아니, 이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클 것이다. 감정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연민을 좀 덜 느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연민은 혐오감에 비해서는 훨씬 긍정적인 감정으로 취급된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갖는 것을 권장하는 편이다. 그리고 각 개인적으로도 혐오감은 나쁜 감정, 연민은 좋은 감정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연민은 비슷한 느낌의 다른 단어들이 있다. 그것은 동정, 관용 등의 단어이다. 사실 어떤 감정을 느낀 후, 다음 행동의 차이일 뿐, 이 단어들이 가진 의미는 거의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은 모두 타인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해와 공감을 기반으로 한다.

 

아니,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이해가 힘들지만 이해하는 것이며, 공감하기 힘들지만 공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대상과 자신의 차이가 너무 커서 그렇다.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나쁜 감정을 느꼈을 때, 연민이나 동정, 관용 같은 감정을 느끼기 힘들다. 우리는 주로 질투, 부러움, 분노 등의 감정을 느낀다. 사실 연민이나 동정, 관용과 같은 감정은 일단 두 존재 사이의 차이가 크게 벌어져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우리는 거지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최근 많이 안 좋은 일을 당한 지인에게 동정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 자신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러다가 자신의 삶 자체가 망가진 사람에게 짜증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연민이나 관용의 감정으로 바뀌기도 한다.

 

즉, 우리는 일단 상대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크게 우위에 설 때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럼 이제 혐오와 연민을 같이 두고 생각해보자.

 

사실 혐오감은 연민에 비해서 좀 광범위한 감정이다. 우리는 썩어서 곰팡이가 핀 어떤 징그러운 대상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이런 경우는 방금 말한 연민과는 관련이 없다. 이것은 오직 공포심의 변형이다. 그래서 지금은 혐오감을 인간에만 한정 짓도록 하자.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혐오감과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연민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렇게 한정 지어서 두 감정을 바라보면, 사실 이 두 감정은 같은 감정의 양쪽 면이란 점을 알게 된다.

 

일단 혐오감과 연민 모두 느끼는 자신과, 상대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즉, 우리는 자신과 레벨이 다른 존재에 대해서 혐오감이나 연민을 느낀다. 물론 자신보다 낮은 레벨이어야만 한다.

 

반대로 우리는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존재에 대해서는 존경이나 동경심을 갖는다. 물론 그들이 비도덕적일 경우 분노나 강한 질투를 느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좋은 쪽일 때는 그렇다.

 

자신과 상대의 레벨이 다름은 어떻게 느낄 수 있을지는 모두 개인적 영역이다. 그나마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가 거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나,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 등일 것이다. 즉, 보편적 기준으로 봐서 행복하기 힘든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레벨의 차이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두 감정은 각각 어떤 상황에서 느끼게 될까?

 

일단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상황을 보자.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작은 이득에 집착하고 머리 굴리는 것이 너무나도 보일 때 우리는 혐오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사람이 얼굴도 못생기고, 뚱뚱하며, 성격도 좀 이상해서 대화 나누기도 힘든 사람일 때, 더욱 그럴 수 있다.

 

끝없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반면에 자신의 수 많은 문제점은 계속 합리화 하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굳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말들을 해서 상처 입히고, 자존감이 낮아서 너무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고, 단순한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는 결국 화를 내는 사람을 볼 때도 충분히 혐오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연민 역시도 똑같은 상황에서 느낄 수 있다. 위에 열거한 느끼는 상황에서 우리는 혐오감이 아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혐오감으로 느끼느냐, 연민으로 느끼느냐는 오직 그 감정의 주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다르다.

 

즉,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기분이 몹시 나쁘다면, 상대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낀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 기분이 몹시 좋다면 상대에 대해서 연민을 느낀다.

 

'파티장에서 약속을 하지 말아라'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속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잘 생각해보면 참 일리 있는 말이다.

 

파티장은 기본적으로 기분이 좋은 장소일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약속을 하면 평소의 자신보다 크게 인심을 쓰게 된다. 그래서 파티가 끝나고 집에 오면, 자신이 한 약속이 터무니 없는 손해임을 알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분명히 파티장에서는 기분 좋게 선심을 썼는데, 집에 오는 손해라는 생각에 기분이 상하는 것이다.

 

이 역시도 혐오가 연민으로 바뀌거나, 연민이 혐오로 바뀌는 상황과 온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상대로 인해서 그 감정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들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바뀐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들이 동정의 눈길로 보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보통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들은 타인들이 자신을 연민의 눈길로 보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그 감정이 사실은 혐오감과 같은 감정이고, 그 배경엔 반드시 상대가 자신과 레벨이 다르다고 여긴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을 아예 한 단계 레벨이 낮은 존재로 보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것은 누구나 싫어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동정과 연민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다면 그것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즉, 누군가 나를 돕는다면, 그 사람의 순수한 선의에서 그것이 나온다고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원래 착하고 나를 좋은 존재로 느껴서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믿음과 달리, 이런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본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을 남겼다.

 

"큰 인물의 넓은 마음에서 나오는 너그러운 관용은 타인에 대한 깊은 모멸에서 나온다. 우리가 개와 고양이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모멸을 혐오감으로, 관용을 연민으로 바꿔도 동일한 의미가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의 모든 선의를 배척할 필요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도 만족되고, 도움을 받는 우리들도 만족이 된다. 그래서 나쁠 것은 없다.

 

단지 혐오와 연민이 사실은 같은 감정의 다른 얼굴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감정이 결코 선의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야 자신이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야 좀 더 착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충분히 착하다고 믿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다지 못되지만 않았을 뿐, 결코 착한 존재들이 아니다. 물론 누군가 왜 착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럴 필요는 없다고 대답 할 것이다.

 

단지 이것은 자신의 착함을 믿고, 자신이 충분히 착하기 때문에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말해주는 조언이다.

 

스스로 자신의 착함에 대한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전혀 상관이 없다. 누군가에게 혐오감을 느끼든 연민을 느끼든 그저 개인의 문제이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정심을 느끼고 있다면, 혐오감을 느끼는 상태와 같음을 이해해야 한다. 단지 혐오감까지는 가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괜찮은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라도 기분이 상하면 금세 그 감정을 혐오감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니 반대로 혹시 혐오감을 느끼더라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기분이 나아지면 금세 연민의 감정으로 바뀔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상대를 더 이해하려고 하거나,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려 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좀 더 행복해지면 다 해결이 된다.

 

사실 이 해결책은 질투나 화와 같은 모든 종류의 감정을 해결하는 비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질투를 느끼지 않고 싶어하고, 화를 내고 싶어 하지 않지만, 결국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때 그것을 느끼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결국 부질없다.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좀 더 행복해지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행복해질 수록 점점 더 너그러워지게 된다. 그래서 같은 상황도 훨씬 쉽게 넘길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뭔가 어려운 부탁을 하고자 한다면, 월요일 아침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런 것은 금요일 오후가 제일 좋다.

 

어떤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는 계약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사실 이 원리는 이미 수 많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른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고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행동들이다.

 

즉, 이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원래 그런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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