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피해의식

아이루다 2016. 4. 22. 15:56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거나 혹은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아마도 이 말이 피해의식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아닐까 싶다.

 

이 정의 이외에 피해의식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피해의식을 느끼는 당사자가 정말로 피해를 받았는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인지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사실 이것을 판단하기는 매우 모호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피해의식이란 단어를 쓸 때는, 실제로 피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편이다. 그래서 피해의식은 일반적으로 상상 속 피해로 간주된다. 실제로 피해를 받았다고 해도 아주 작은 수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피해의식을 느끼게 될까? 사실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았든 아니든 상관없이, 피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피해는 손해이며, 손해는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딱히 손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것일까?

 

느껴서 좋다면야 할 말이 없지만, 사실 느껴봐야 기분만 나빠질 뿐인데 말이다. 그것도 그 피해가 상상 속에서만 이뤄진 망상 속 피해라면, 정말로 쓸데없는 짓 중 하나이다.

 

실제로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스스로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왜 그렇게 피해의식이 많은지에 대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주 다투거나 기분이 상했던 경험에 의해서,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하고 별 일도 아닌데 화가 났던 상황들을 통해서, 그것들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알면서도 불행해지는 것이다. 물론 사실 인간은 피해의식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나쁜 감정들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질투하긴 싫으나 질투가 나고, 화를 내긴 싫으나 화를 내고, 신경쓰기 싫으나 신경을 쓴다.

 

그래서 이것은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피해의식은 불행함으로 가는 지름길 중 하나이므로, 가능하면 없애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실제가 아닌 머리 속에서만 이뤄진 일종의 망상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피해의식은 원래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상태는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특별한 경험으로 인해 각자 내부에 만들어진다.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그 경험이 지속되었을 때만 만들어진다. 즉, 일종의 정신적 불안 증세인 것이다.

 

그래서 피해의식이 심해지면 정신 병원에 가기도 한다. 피해에 대한 상상이 심해지면, 남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 두려움에 떨어 폭력을 행사하거나 스스로를 자해 할 수도 있다. 이것을 피해망상증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정도까지 가려면 중증 상태이므로 보통 사람들은 이 부분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약간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것이 심하지 않아서 대충 넘길 수 있다. 그래서 피해의식은 강도가 더 중요하다.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더 상황이 어렵게 흘러간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손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잘난 사람에 대한 숨겨진 적대감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것이 외모나, 능력, 성격, 위치, 운 등등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잘난 사람은 타인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감정 속에는 적대감이 숨겨져 있다. 잘난 사람이 딱히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피해를 받는다고 느낀다. 물론 아주 미약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서 연예인들은 정치인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딱히 실수가 없을 때는 별 상관이 없지만, 어떤 사소한 도덕적 결함만 생겨도 사회의 거대한 압박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압박의 내부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조그만 피해의식이 정당성이란 명목으로 표출된다.

 

이것이 포장되는 이유는 우리는 누구나 피해의식을 가지는 것이 그리 좋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런 대중의 쏠림 현상이 피해의식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 정의에 의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애매하고 판단하기 힘든 부분이다. 피해의식은 최대한 감춰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많은 것들로 포장이 되어서 그것을 감지해 내기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이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하긴 힘들다.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기 때문에 도대체 인정하게 만들기도 난해하다. 그래서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봐야 한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

 

 

 

::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의 특징 ::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타인에 대한 관대함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다. 상대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아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피해의식의 이런 성질은 우리들 대부분이 가진 열등감과 연결이 되어 있다.

 

상대를 끌어 내리려고 하는 의도,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이 심한 사람들의 가장 흔한 패턴이다. 자신이 평소에 뭔가 불합리한 대접을 받고 살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 속에 언제나 분노와 불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남의 조그만 잘못도 참지 않고 화를 낸다. 상대의 약점을 감춰주기 보다는 더 후벼 파는 것이다.

 

내가 힘드니 너도 힘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헛된 수고가 된다. 내 몸에 난 상처는 내가 치료를 받아야지 남을 상처 입힌다고 해서 낫지 않는다. 오히려 남을 괴롭혔다는 양심의 소리에 의해서 더욱 더 괴롭기만 하다. 물론 그것을 위해 끝없이 자기 합리화를 할 것이다. 맞을 짓을 했으니 때릴 만 했다고 말이다. 이것의 대중의 마녀 사냥 속에 숨겨진 심리이다.

 

두 번째 특징은 불필요한 것조차 욕심을 내는 태도이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피해의식이 가진 근본적 성질로 인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아무튼 그래서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그것을 필요로 하든 안 하든 일단 손에 들어 온 것은 내려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특징은 관대함과도 연결된다. 관대한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도 상대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특징은 사소한 손해조차도 참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피해의식이란 것 자체가 피해를 받았다는 상상으로 인해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인데, 실제로 어떤 손해를 입었다면 그것을 피해로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남에게 더욱 엄격해지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어떤 실수를 해서 자신이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 명확하다면, 결코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네 번째 특징은 집착이 심하다. 사람은 원래 손해나 피해를 입은 것을 매우 싫어하는 존재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만 가진 특징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손해나 피해를 입어도 번거롭거나, 귀찮거나, 어렵거나, 그냥 사는 게 편해서 넘어가곤 한다.

 

그런데 피해의식이 심각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손해나 피해를 입었을 때 받는 심리적 타격이 타인에 비해서 훨씬 강력하다. 그러다 보니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다. 즉, 그 집착으로 인해서 자신이 힘들고 심지어는 자신의 삶이 망가질 수도 있음에도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진상 손님' 이나 '악성 민원인' 이나 '보복 운전' 등이 바로 피해의식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는 유형이다. 이들은 남의 손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입은 손해만이 세상에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

 

다섯 번째는 이득을 눈 앞에 두었을 때, 관계의 신뢰에 대한 고려가 없다. 즉, 쉽게 말해서 배신을 잘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인간의 특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일억과 백만 원 사이에서 배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백만 원과 이백만 원 사이에서 배신을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즉, 사소한 이득을 가지고도 그 태도를 바꾸는 짓을 한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신뢰를 잃게 된다.

 

이 정도까지가 피해의식이 심한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정리해서 보면, 남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욕심이 많고, 사소한 손해도 못 참아 하고, 집착이 심하고, 신뢰를 계속 잃는 사람이다.

 

생각해보라. 누가 이런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피해의식이 심한 사람들은 결국 인간적인 관계에서도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즉, 친구도 별로 없고, 친구가 있다고 해도 겨우 이어지는 수준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으면서도 본인은 그것을 잘 인지하지도 못한다.

 

사실 그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피해의식이 강한 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지속적으로 망가지고 있다는 점을 느끼지 못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러니 삶은 점점 우울해지지만 본인은 왜 그런지를 알 방법이 없다.

 

어떤 상황이든 간에, 그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모든 판단 근거가 바로 불필요하게 발생하는 피해의식 때문이란 점이다. 여기에서 비극이 발생한다.

 

사실 본인이 피해의식에 의해서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만 있어도 삶은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쉽지 않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좀 더 관대하게 살아가려고, 좀 더 사소한 것에 욕심을 덜 내고 남들에게 베풀려고 하는 것으로, 가능하면 작은 약속이라도 지키려고 하는 태도로써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그것이 중대한 문제임을 인식하긴 힘들다. 그러기엔 눈 앞에 벌어지는 작은 손해, 작은 이득들에 대한 계산을 하기 위한 생각들이 훨씬 광범위하고 긴 시간 동안 머리 속을 지배하게 된다.

 

 

 

:: 피해의식의 원인 :: 


그런데 왜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것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알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유추 가능한 것은 바로 어린 시절에 받은 차별로 인해서 만들어진다는 점 정도는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누군가로부터 오랜 시간 차별을 경험하면서 끝없이 손해를 입기를 반복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이득을 지키려는 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된다.

 

사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다른 아이들은 사탕을 두 개씩 받는데, 혼자만 늘 하나를 받게 되면, 이 아이는 사탕을 나눠줄 때 마다 사탕의 숫자에 집착하게 된다. 다른 아이들은 사탕을 먹는 행복만을 생각한다면, 차별을 받는 아이는 자신의 사탕이 맛있는지 여부보다 사탕의 개수를 훨씬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남들보다 하나 더 받게 되면 어떤 행복감을 맛보게 될까? 아이는 그날 자신의 삶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아이가 추가로 더 받은 사탕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까? 당연히 못 준다. 그 사탕으로 인해서 받은 행복감이 얼마인데 그것을 줄 수 있겠는가?

 

그나마 그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어느 날 사탕의 개수로부터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탕 맛을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신경 써서 사탕을 두 개 달라고 해야만 두 개가 되고 아주 가끔 세 개가 되는 날이 반복된다면, 아이는 그 사탕에 대해서는 결코 그 맛이 주는 행복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저 언제나 남들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으로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이 사탕을 어른들이 좋아하는 돈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물론 돈은 사탕처럼 누가 나눠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별 능력과 노력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현재 받는 돈만큼만 벌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돈에 대해서도 사탕처럼 그 개수에 집착하게 된다. 돈은 행복을 위한 수단인데, 돈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것도 당연하다. 돈이 적정하게 분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탕을 백 개 받는데, 다른 아이들은 한 개, 두 개, 잘해야 열 개 받는다면, 백 개를 받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사탕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 모두 사탕의 개수에 집착하게 된다. 그나마 열 개를 받은 아이는 덜 집착할 뿐이다. 왜냐하면 열 개를 먹기도 좀 버겁기 때문이다.

 

돈도 똑같은 원리이다. 돈이 능력과 노력에 따라 적정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심하게 독점을 하기 때문에, 돈에 대한 피해의식은 점점 심해질 뿐, 결코 나아지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인간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큰 정신적 타격을 주는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 차별은 어떤 멀쩡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고 만다. 또한 공정성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도 알 수 있다. 어떤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바로 그 사회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기업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로 다양한 차별을 한다. 인종 차별, 남녀 차별, 입장에 다른 차별, 외모 차별, 능력 차별, 심지어 같은 부모 밑에서 나온 자식들끼리도 차별을 한다.

 

그럴 때 사람이 받는 정신적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일까? 누가 그것을 책임져야 할까? 예전에 미국에서 일어난 동양인 청년의 총기 난사 사건은 과연 그 청년만의 문제였을까? 그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런데 피해의식은 단지 차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중대한 원인이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추가적으로 타고난 '욕심'이 더해져야 완성이 된다.

 

사실 욕심은 타고난 성향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미 그렇게 타고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모가 욕심이 많으면, 대부분의 자식도 욕심이 많다. 물론 후천적으로 하다 당해서 악이 받혀서 욕심이 많아진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멀쩡한 상황인데도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원래 그런 성격인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어떤 아이들은 차별을 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본인이 귀찮아 하기도 하고, 자신의 관심이 사탕에 있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욕심이 많은 아이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태에서 차별을 받게 되면, 아이는 그 상황을 참아낼 수 없다.

 

차별과 욕심이 만나면 피해의식이 완벽하게 완성된다. 그러니 당연히 피해의식이 가진 특징들, 관대함 부족, 사소한 손해를 감수하지 못하는 것, 불필요한 욕심, 집착, 신뢰를 잃으면서 까지 추구하는 이득 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 피해의식의 해결책 ::

 

아무튼 피해의식은 결코 좋은 감정은 아니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그것을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자.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 '자각' 이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당한 차별로 인해 피해의식을 짐처럼 짊어지고는 평생을 불행하게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필요하다. 이 자각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시작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해의식은 합리화가 끝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느끼는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매일 다른 사람들과 떠드는 말이 바로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자각이 결코 쉽지 않다.

 

자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행복하고 싶어해야 한다. 사탕을 맛있게 먹는 것이 중요하지, 사탕이 세 개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점을 알고 싶어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탕을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 사탕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타인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행복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손에 쥔 사탕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사탕을 쥐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다 해결이 된다. 예전에 도시락을 싸서 학교를 다닐 때, 실수로 도시락을 안 가져와서 반 친구들에게 한 숟가락씩 밥을 얻으면, 그 교실에서 가장 많은 밥을 가진 아이가 된다. 이것이 중요하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피해의식이 원래 우리 본연의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원래 피해의식 따위는 없다. 이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감정이다. 계산을 할 수 없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감정이다.

 

뉴스를 보면 우리가 매달 내는 세금이 정말로 엉뚱한 곳에 쓰이는 화면을 많이 보게 된다. 작은 돈도 아니다. 조 단위이다. 그런데 만원의 손해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런 뉴스를 보고는 그냥 넘긴다. 만원을 손해 보는 것은 엄청난 일인데, 조 단위 손해를 보는 것은 그냥 넘어가고 만다.

 

이것이 바로 계산 능력의 한계로 인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돈이 아깝다면, 정치를 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그리 많은 비리와 눈 먼 돈이 돌아다니는데, 자신의 직접적 손해가 아니라고 해서 그냥 넘어간다.

 

그것이 좋은 태도는 아니지만 힌트는 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만원 손해 본 것도 계산하지 않으면 끝이다. 모르는 게 약이란 뜻이다. 모르거나 계산하지 못하면 손해는 더 이상 손해가 아니다. 그러니 혹시나 계산이 되더라도 행복을 위해서 모른 척 하면 된다.

 

계산을 잘하는 자신을 현명하고 손해를 보지 않는 똑똑한 존재라고 느낄 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이득이 되는지는 나중에 다시 정산을 해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쉽게 알 수도 없다. 그러니 손해를 보는 것에 너무 민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손해를 보지 않거나 이득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행복하게 살길 원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래야 하냐고 물을 것이다. 손해가 분명한데 왜 모른 척 하고, 왜 참아야 하냐고 말이다. 앞에서 답은 이미 했다. 행복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행복하고 싶어서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노력도 하지만, 흥미롭게도 손해를 감수하면 행복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사람들에게 관대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 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실수할 때마다 너무 과도하게 몰아붙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의나 부정의 사건에 대해서 무조건 넘어가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1의 잘못을 했다면, 1의 잘못만큼이나 좀 더 관대하게 0.5만큼만 따져야 한다.

 

1의 잘못을 했다고 해서 인생 전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과도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관대해지는 것은 자신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실수로 어쩔 수 없는 손해를 입었더라도 스스로에 대해 너무 과도한 비하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비하는 정말로 슬픈 감정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느끼지 않는 것이 좋다.

 

사실 타인에 대한 관대함이 가진 가장 좋은 점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것을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결코 그 좋은 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관대해지고, 손해와 이득에 조금 덜 민감해지는 것, 이 두 가지만 꾸준히 실천해도 피해의식은 많이 줄어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노력을 하는 중에는 끝없는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자신이 느끼는 그렇게나 정당했던 그 모든 감정이 사실은 온통 자기 위주의 합리화 된 방식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정당성이 깨져야 벗어날 수 있다.

 

자기 손에 쥐어진 사탕을 어떻게 다루느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맛으로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남들만큼이나 받았는지 전전긍긍하고,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더 받아야만 만족한다. 어떤 사람은 내기를 해서 서로 사탕을 따먹는 재미로 살고, 어떤 사람은 자기 손에 쥔 사탕을 남에게 그냥 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사탕인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탕을 훔치고, 어떤 사람은 그 사탕이 맛없다고 버리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그래도 제일 좋아 보이는 사람은 사탕을 맛있어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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