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잘남의 역설

아이루다 2016. 3. 18. 07:39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별로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못난 존재이기보다는 잘난 존재 이길 바란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비단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물들이나 식물들 역시 모두 조금이라도 잘나길 바라는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잘남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긴다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바로 '생존'이 된다.

 

즉, 우리는 잘나면 잘날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니 잘나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이다.

 

그런데 인간에 한해서 잘남은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오직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가치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나름대로 고도의 두뇌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나면 잘날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 인간은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죽음을 멀리하려고도 하고, 대비하려고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좀 더 늦게 죽을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잘나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기분이 자동으로 좋아진다. 이것음 마치 배고픈 날, 먹고 싶은 요리를 생각만 해도 당장 입 속에 침이 고이는 것과 같다. 그냥 머리 속에서만 이뤄진 두뇌 활동의 결과인데도 육체적으로 그 현상이 재현된다.

 

외모가 바뀐 것도 아니고, 두뇌 능력이 발달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주변에서 잘나 보인다는 평가만 해줘도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질적인 변화는 전혀 없는데, 그냥 잘남을 알았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진 것이다. 이것은 배고픈 날 머리 속에 떠오른 김치찌개와 같다.

 

물론 어떤 날은 머리를 예쁘게 다듬었거나, 옷을 매력적으로 입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모두 임시적이다. 단 며칠만 지나도 그런 변화는 사라진다. 그나마 우리가 영구적인 변화를 꽤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외모이다. 특히 얼굴과 체중을 변화시키기가 가장 용이하다.

 

우리 인간은 아직까지는 두뇌 능력은 개발시킬 확실한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운동 능력도 그렇다. 성격을 바꿀 수 있는 확실한 수단도 없으며, 기껏해야 우리는 특정 능력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훈련하는 방법만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노력에는 투자될 시간과 힘든 과정을 버텨내야 하는 불행함이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나고 싶다는 욕구와 잘난 존재로써 받을 수 있는 만족감을 꿈꾸면서 버텨내기도 한다.

 

그래서 그나마 쉬운 것이 바로 외모 변화와 체중 조절이다. 물론 체중 조절은 사람에 따라서 아주 힘든 훈련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요즘 시대에 간편한 성형 수술과 쉬운 다이어트가 이토록 붐이 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잘남으로 인해서 만족감이 높아지고 자존감이 상승해서 결국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잘남은 크게 생존의 역할과 만족의 역할, 두 영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생존의 역할은 좀 본능적인 영역이고, 행복의 역할은 이보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역할이지만 사실상 가짜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꽤나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잘남이 가진 행복의 역할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요즘 사람들 중에서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요즘 인간들은 먹기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를 헷갈릴 지경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에 관심이 있다. 즉,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잘남의 두 역할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면, 당연히 생존이 중요하다. 우리는 생존이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잘남의 다음 역할에 매달리는 것이다.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상태에서 외모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잘남의 만족감이 주는 행복이 너무도 커서 원래 목적인 생존 영역을 침범하기도 한다. 이것이 만족감을 위한 잘남이 가진 첫 번째 문제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바꾸기 위해서 목숨을 건 성형 수술을 하거나,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는 시술을 예뻐진다는 이유로 과감하게 시도한다. 그리고 심지어 죽기도 하고, 아니면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나 삶이 망가지는 사례도 꽤나 자주 보도되고 있다.

 

다이어트를 하다가 몸에 심각한 영양 불균형이 와서 건강을 크게 해치거나, 다이어트 실패 후 좌절감에 폭식을 하여 거식증이나 폭식증에 걸리기도 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내기 힘든 목표를 정하고는 그것을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투자를 하다가 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가 감당할 수 없으면 자살로써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사실 방금 까지 언급한 것들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좀 덜 극단적인 행동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비싼 옷을 산다든지, 화장을 진하게 한다든지, 불필요할 정도로 넓은 집과 비싼 차를 가지려고 한다든지,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돈을 벌려고 한다든지, 과도한 권력을 가지려고 하기도 하고, 커다란 명예를 얻고자 무리한 일을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의 예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잘나서 만족감을 얻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한다.

 

생존은 충분히 보장되었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더 잘나서 더 큰 만족감을 얻고 싶어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아 성취', '자존감' 등으로 좋게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냉정히 말하면 왜 잘나고 싶어하는지 조차 명확히 모른 상태에서 그냥 잘남을 증명 받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니, 힘들더라도 그것을 해내려고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안다고 해도 바뀔 것은 없다. 이것은 오랜 시간 무리 생활을 해 온 인간의 본능이다. 잘남이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잘남을 느낄 때마다 자동으로 만족감을 느끼면서 행복해진다. 파블로스가 개에게 행한 실험처럼 조건 반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개가 입에서 침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더라도 침은 자동으로 고인다. 우리 역시도 이런 잘남의 허상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누군가가 칭찬을 해주면 자동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잘남에 대한 두 번째 문제점이 있다. 이것은 좀 더 복잡하다.

 

이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연 '잘남'이 어떻게 평가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말한 잘남의 본질적 성격을 다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들의 잘남은 바로 '경쟁' 에서 발생한다.

 

즉, 우리의 잘남은 온전히 상대적으로 발생하는 개념이다. 즉, 아무도 없는 상태라면 잘났다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쉽게 설명해서, 우리는 개나 고양이를 상대로 잘남을 느끼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만 잘남을 느낀다. 누가 개보다 잘났다고 기분 좋아하겠는가? 물론 부자 집에서 인간보다 더 잘 먹고 사는 팔자 좋은 개가 부러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나 만족을 위한 잘남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이다. 개보다 잘났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질 사람은 없다. 아니 아예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냐고 화를 낼 것이다.

 

여기까지 이해한 상태에서 진짜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 못난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 못남이 바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자. 머리도 나쁘고 가진 재주도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머리가 조금 더 좋아질 때마다, 할 줄 아는 것이 하나씩 늘 때마다 크게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평균 정도의 지능을 갖게 되었을 때, 이 사람은 많이 행복해졌을 것이다. 할 줄 아는 것도 제법 되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덕도 많이 얻었을 것이다.

 

좀 더 나가보자. 머리가 천재 수준이 되었다고 치자. 그리고 할 줄 아는 것이 너무도 많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준이 되었다고 치자. 이때 이 사람은 분명히 충분히 행복해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결혼에 실패했다든가, 성격이 이상하다든가 하는 부가적인 요소들은 제외시키기로 하자.

 

아무튼 이 사람은 잘날수록 자기 만족감이 높아지고 자존감이 상승해서 행복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좀 더 진행시켜보자. 그래서 인간의 범위를 넘어보자.

 

이제 잘남은 초인의 영역에 들어갔다. 두뇌 능력은 측정할 방법이 없고, 인간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즉, 슈퍼맨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잘남에 대해서 어떻게 느낄까? 더 행복해졌을까?

 

물론 행복해졌을 것이다. 아직까지 외모는 인간의 그것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을 아직까지 인간으로써 분류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어떨까?

 

우리가 개나 고양이에게 잘남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바로 동물들이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동물들은 인간과 경쟁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동물들에게 잘남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는 어떨까? 그 존재가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그나마 느끼려면 무엇인가 그 존재를 인간 범주에 넣게 해주는 것이 남아 있거나 혹은 그 존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다른 존재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라면, 다시 인간의 범주에 속한 것과 동일한 과정이 반복된다. 당연하게 인간의 범주에서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고 해도, 자신과 비슷한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뛰어나지 못하면 결국 또 불행해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자신을 인간의 범주로 넣기도 불가능하다.


어느날 인간이 된 개는, 분명히 자신과 같은 개들 사이에서는 위대한 존재이고, 신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개들 사이에서 잘남에 관해서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을 것이다. 즉, 최고의 만족감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된 개는 이제 더 이상 다른 개들과의 잘남 경쟁에 관심이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히 수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된 개는 이제 인간과의 사이에서 잘남을 경쟁하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올라가보자. 이제 초인의 영역을 넘어서 신의 영역으로 가보자. 그때 우리는 누구도 자신을 인간의 범주로 여길 수가 없다. 우리는 기적으로 행하고 끝을 알 수 없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우주를 만들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느끼게 될까? 사실 개미만도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개미의 행복과 불행에 그리 관심이 없다.

 

그런데 신이 된 우리는 이제 잘남에 대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신에게는 더 이상 자존감이 남아있질 못하다.

 

이 전체적인 이야기는 잘남의 역설을 말해준다. 우리는 잘날수록 실제로 잘남이 가진 중요한 기능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다. 잘나도 적당히 잘나야지 행복하다. 너무 잘나면 행복하기가 힘들다.

 

이것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실제로도 일어나는 일이다. 일반 사람들의 수준을 현저하게 뛰어넘은 천재들은 무엇을 느끼게 될까? 과연 보통 사람들을 보면서 잘남을 행복하게 여길까? 아니면 개나 고양이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까? 자신을 칭송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기분이 들까?

 

잘남에 대한 두 가지 문제, 즉 하나는 잘나고 싶어서 생존 자체를 위태하게 만드는 것과 너무 잘나면 사실 잘남의 원래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가 그리도 잘나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이 가진 본질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즉, 사실 매우 비 상식적이고 비 이성적이다.

 

잘남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원래 목적인 생존을 위험하게 하고, 그 만족감 역시도 너무 잘나면 사라지고 마는 상황, 이것이 어떻게 정상적이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불을 본 나방처럼 무의식적으로 평생 동안 잘남을 추구하면서 살게 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어느 정도만 되면, 먹고 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잘남이 주는 자기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결코 그 단계에서 머물려고 하질 않는다. 우리는 1등이 되길 바란다. 존재가 증명 받고 싶어한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가 된다.

 

하나는 존재를 적극적으로 증명하면서 잘남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로 경쟁의 승리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돈과 권력 명예를 독점한다.

 

둘째는 자기 증명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경쟁에서 져서 결국 남들에게 증명 받기는 힘들기 때문에,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잘남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서 끝없이 자신의 주변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윗 상사의 칭찬, 친구의 부러운 시선, 이웃의 질투 어린 눈길 등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셋째는 아예 포기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잘남의 만족감은 사치이다. 이들에게 잘남은 생존의 영역이다. 그래서 생존하기 위해서 산다. 그래서 남의 평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동물과 같은 행동들이 나타난다. 자신의 먹을 것을 건들면 언제라도 이빨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두 번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가 되지 못해서 두 번째에 속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평생 허우적대면서 살아간다. 개들이 다른 개들과 경쟁하는 것과 같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단지 개로 태어났기에 개와 죽기 살기로 경쟁한다.

 

우리는 세 번째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라고 부르기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두 번째 정도에 속할 수 있게 되었다면 좀 다른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잘남에 대해 느끼는 그 모든 욕망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음부터 잘남을 추구하게 된 이유가, 잘날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충분히 생존 가능하다면, 잘남에 대해서 너무 과도한 집착을 할 필요가 없다. 사실 그것이 잘될 때는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깊은 열등감에 빠져들 수 있다. 물론 잘되어도 심각한 우월감에 빠져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알긴 해도 우리가 가진 잘남의 욕구는 마치 식욕처럼 없앨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탐욕은 조절할 수 있다. 그래서 과도하게 살이 찌지는 않게 해야 한다. 잘남에 대한 욕구를 조절하지 못하면, 우리는 큰 화를 당하게 된다.

 

스스로 못났다고 여겨져서 기분이 안 좋다면, 자신을 신의 존재로 상상해보길 바란다. 신의 존재가 되어서도 인간의 무리에 속해서 잘남을 증명 받고 싶을지 깊게 생각해보기 바란다. 우리가 정말로 잘나게 되면, 그것은 결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잘나면 잘날수록 더욱 더 그렇게 변할 것이다.

 

그러니 왜 잘 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인가? 너무 잘나서 신이 되면 아무런 만족도를 얻지 못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이 잘남이 가진 역설은, 잘남의 만족도가 온전히 허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란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잘남이 행복한 사람은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좋지만, 잘나지 못해서 불행한 사람은 그것을 딱히 추구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불리한 환경에서 왜 같은 것을 추구해서 스스로 지려고 애를 쓰는가? 생존만 보장되었다면, 잘남의 본질은 행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 행복 말고도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많다. 사실 행복의 다양성이야 말로, 인간을 유일하게 평등하게 해주는 궁극적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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