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핑계의 역할

아이루다 2016. 2. 21. 08:52

 

미국 영화를 보다가 보면, '틴에이저'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뭔가 불만스럽고, 말을 함부로 하며,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10대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른들이 하는 말이다.

 

보통 어른들은 공통적으로 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그냥 그들이 '10대' 라는 이유만으로 인정해주려고 노력한다. 속으로는 열불이 나겠지만 말이다.

 

사실 10대에 대한 문제는 단지 미국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을 10대일 때 공부를 하라고 엄청나게 밀어대고, 사회적인 분위기도 아이들의 개인적 성향을 존중해주기 보다는 공동체에 속한 부속품 같은 존재로써 대하기 때문에, 미국보다는 훨씬 덜 반항적이긴 하다.

 

그럼에도 특정한 어떤 아이들은 매우 심하게 삐뚤어져서 삶 자체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은 범죄에 휘말리기가 쉽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잡은 후,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이유가 있는 편이다.

 

그들이 말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보통 가정의 불화이다. 그것은 부모의 이혼, 잦은 싸움, 무관심, 가난, 학대 등등에 관련된 이야기이며, 듣다가 보면 아이들이 왜 범죄에 빠지게 되었는지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사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불쌍할 뿐이다.

 

여기까지 일반적인 시선이다. 그런데 좀 더 과감히 안으로 들어가보자. 집안 문제로 인해서 불량스러워지고, 범죄까지 저지른 아이들이 그러는 것은 과연 단지 가정 불화만의 문제일까?


물론 기본적으로는 그렇긴 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은 다른 아이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불우한 환경이라고 해도 힘들지만 정상적으로 크는 아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즉, 모든 아이가 같은 환경이라고 해서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그것의 본질적 이유는 바로 가정의 불화가 사실은 '핑계' 가 되기 때문이다. 즉, 가정의 불화나 혹은 다양한 형태의 문제는 보통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는데 쓰인다. 아이들 역시도 자신이 공부를 하지 않고 노는 것에 대한 핑계로써 가정 불화를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그것을 자발적으로 원한 것이 아닌 점은 확실하다.

 

학생은 기본적으로 공부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 싫어한다. 그리고 당연히 노는 것이 훨씬 더 좋다. 그런데 놀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남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더라도 스스로를 설득할 작은 이유라도 필요하다. 원래 술 주정뱅이는 날이 좋으니 술을 먹겠다고 하고, 날이 흐리니 술을 먹겠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아주 좋은 이유가 되어준다.

 

집에서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집안에서 싸움이 나서 시끄러워지면 기분이 상하고, 공부를 하기가 싫어진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일하다. 하지만 이 후 선택에 따라 다음 상황이 바뀐다. 어떤 아이들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도서관으로 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그냥 동네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거나, 친구를 불러내서 노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부모도 저 모양인데, 자신이 자신의 삶을 힘들게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빠가 반찬 투정을 하면, 아이도 못할 이유가 없다.

 

공부를 하기 싫은데, 공부를 안 할 너무도 충분한 이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점은 바로, 자신이 공부를 잘 못하게 된 사연을 주변 사람들 누구에게 해도 다들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적어도 너의 사정을 듣고보니 그럴 만 했다고 대꾸해준다.

 

많은 대학생들은 강의가 갑자기 휴강이 되면, 그로 인해서 화를 내기 보다는 좋아한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니는 학교이지만, 당장 받아야 할 강의가 휴강이 되게 되면, 마치 뭔가 생각지도 못한 자투리 시간을 얻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냥 친구들과 함께 그 시간을 놀면서 보낸다.

 

물론 이때도 어떤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를 한다. 사실 공부를 하고 싶었거나, 공부를 해야 하다고 믿었다면 이런 행동이 매우 이성적이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은 그냥 그 시간을 놀면서 보낸다. 오랜만에 얻은 놀아도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보통 때는 놀 때마다 후회가 들지만,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이 빈 경우엔 마음 편하게 놀기에 딱 좋다. 즉, 좋은 핑계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강의를 들으러 온 다른 친구들도 함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같이 삼삼오오 모여서 게임 방에 가든지 커피 가게에 가서 수다를 떨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된다.

 

물론 이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다. 그런데 휴강이 되면 도서관에 가는 학생의 수와 휴강이 되면 놀러 가는 학생의 수의 비율은 어느 정도 될까? 흥미로운 점은 이 비율의 차이는 대학교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일류대와 삼류대의 비율이 각각 다르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대학교일수록 휴강이 되면 도서관으로 향하고, 반대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모이는 학교일수록 휴강이 되면 놀게 된다. 사실 그래서 이것은 휴강의 문제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휴강 후 어떤 행동을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휴강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각자의 당사자가 가진 의무나 책임을 얼마만큼 쉽게 벗어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렸다. 그리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일수록 공부의 의무에 대해서 훨씬 쉽고 빠르게 벗어날 수 있다. 그들에겐 휴강뿐만이 아니다. 가벼운 감기, 친구의 생일, 좋아하는 게임이 업그레이드 되는 날, 좋은 날씨까지도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된다.

 

사실 이런 모습은 결코 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학생으로써, 주부로써, 가장으로써, 자식으로써, 각종 직업적 역할로써, 회사의 사장으로써 등등 그것들은 종류도 대단히 많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것을 겹치게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어떤 남자는 집에서는 가장, 회사에서는 책임자, 집안에서는 장남이 된다. 어떤 여자는 집에서는 주부, 아파트 주민회에서는 동 대표, 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총무가 된다.

 

그런데 이런 역할들은 종류에 따라서 자신이 좋아서 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차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맡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의무와 책임은 사실 모두 부담감을 갖게 한다. 아이 아빠는 좋은 역할이지만,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담감은 우리들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당사자의 자유를 억압한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놀러 가고 싶지만 학교에 가야하고, 직장에 나가야 한다. 이런 일은 매일 반복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쉬고 놀러 갈 수 있는 조그마한 이유가 생긴다면, 결코 그것을 마다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학교를 빠지고, 직장을 빠질 만큼 중요한 이유는 보통 드물다는 점만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에 따라서 또 다르다. 누군가는 살짝 감기만 걸려도 빠지고, 누군가는 독감이 걸려도 마스크를 하고 간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앞서서, 반듯이 집고 넘어가야 하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우리가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역할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이란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놀다가 미래를 망친다면, 망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란 뜻이다.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는 다른 아이의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망치는 것이다. 감기만 걸려도 회사에 빠지려는 직장인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월급을 줄이고 있다. 즉, 우리들은 핑계거리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더욱 더 안 좋게 바꾸는 것을 선택한다.

 

우리는 왜 이럴까? 왜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망치는 것일까? 자신의 삶이 소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더욱 더 행복하게 하고 싶어서 다들 안달이 나있다. 차라리 너무 심해서 문제다. 자기만를 위하는 생각, 즉 이기주의는 심해서 문제이지 절대로 부족해서 문제가 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왜 그럴까?

 

혹시 우리가 생각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삶 자체가 잘못 목적된 것일까?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을 작은 핑계만 생겨도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의 답은 매우 어려운 것이긴 하다. 이것은 인간 행복론에 대한 매우 깊은 성찰이 선행되어야 답을 낼 수 있는 질문들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배운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장기적 관점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장기적 관점의 행복추구는 미래에 대한 예측력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10년 후를 위해 같이 외국어 공부를 준비해도 누군가는 중국어를 공부하고, 다른 누군가는 프랑스 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결과를 낼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지금 분위기라면, 기회라는 측면에서 프랑스어보다는 중국어가 조금 더 나아 보이긴 하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10년 후 계획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식이다. 미래를 계획할수록 미래가 잘 될 가능성은 높지만, 현재가 힘들다. 10년 후 계획 따위가 전혀 없는 사람은 주말에 편히 쉴 수 있다. 하지만 계획이 있는 사람들은 현재의 남는 시간의 가치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현재의 시간을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기본적으로 장기적 행복 계획을 세우고 사는 사람이 단기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에 비해서 더 잘 살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고, 계획한 미래가 모두 잘될 가능성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데, 현재에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모두 미래를 위해 써버리고 나면, 도대체 언제 행복해질 것인가?

 

늙어서 골골할 때 행복해질 것인가? 이것이 인간의 행복에 대한 근원적 문제이다.

 

눈 앞에 있는 사과 두 개를 배가 고프니 아침에 다 먹을 것인가 아니면 점심을 위해서 하나를 남겨 놓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더군다나 이 사과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상태라서 아침과 점심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와서 먹고 가버릴 수도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한다. 둘 다 먹든지, 남겨두고는 누가 오전 내내 혹시 누가 올까 봐 감시하든지,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든지, 하나만 먹고 나머지 하나는 친구에게 주든지 할 것이다.

 

이 다양한 선택의 과정에서 우리가 정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우리들의 삶을 흘러가는 대로 맡기게 되는데, 이때 어떤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 입장으로 접근을 하게 된다. 즉,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없다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핑계거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왜 그럴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될 수 있다.

 

결국 어떤 좋지 않은 상황이나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무의지적으로 흘러가는 삶에서는 핑계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반대로 의지적인 삶, 즉 어떤 미래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서는 단지 뛰어 넘어야 할 대상이 될 뿐이다.

 

물론 삶을 무의지적으로 사는 것이 좋으냐, 의지적으로 사는 것이 좋으냐를 정답과 오답이란 관점에서 결정할 수는 없다. 각자 단점과 장점이 있고, 또한 사람마다 고유한 행복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 자꾸 핑계를 만들어서 회피하게 되면, 사실은 자신의 삶을 점점 더 열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즉, 아무리 그럴듯하고, 누구나 들으면 이해해줄 수 있는 이유가 있어도,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좀 더 나쁘게 만들었다는 것뿐이란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가 매일 싸워서 공부도 포기하고 다른 대체 가능한 것을 찾는 것까지 모두 포기한 아이는, 결국 이후 뻔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오늘 도서관에 가지 않을 이유를 찾은 공무원 시험 준비생은, 오늘은 쉬겠지만 결국 시험에 떨어질 가능성은 높아져 버리고 만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각종 핑계거리를 만들어 대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로 편해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들은 모두 우리들 자신의 삶을 좀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핑계에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놀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남들에게 설명하기에 좋은 것뿐이다. 즉,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갉아 먹는 이유를 남들에게 납득시킨 것이다. 그런데 남을 납득시키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일까?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을 설득시키고자 핑계거리를 만든다. 오늘 놀 이유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설득 할 것을 만든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그럴 듯 해 보여도 남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남에게 얘기할 때 그 핑계들이 그나마 그럴 듯 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핑계를 과장해서 설명했기 때문이란 점을 알고 있다.

 

부모가 매일 싸운다고 말한 아이는 사실은 부모가 일주일에 한 번 싸우고 있을 뿐이다. 독감에 걸려 회사에 빠진 사람은 사실은 가벼운 감기인데, 회사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 이것은 그 정도에 따라서 이해해 줄 수 있는 범주에 속하냐,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범주에 속하냐를 결정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당사자가 핑계를 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것을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유를 크게 부풀린 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자신도 자신이 한 말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는 스스로 결코 믿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이 상황을 부풀렸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은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이 진짜로 믿는다고 여겨도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심해지면 정신 분열증이 된다. 마음 속 깊이 알고 있는 진실과, 겉으로 알고 있는 진실이 너무 크게 벌어지면 정신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끝없이 상처 입히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자존감을 하락시키고 결국 열등감과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게 만든다. 즉,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언제나 핑계만 대고, 부풀려서 말하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치는 존재가 어떻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보통 해야 할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때는, 나름대로 충분히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될 수도 있고, 충분히 극복 가능한 핑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각각의 당사자의 문제이다. 사람마다 역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자는 이미 알고 있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지, 핑계를 대고 안 하는지를 알고 있다.

 

삶의 정답은 없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지는 각각 결정할 문제이다. 단지 몇 차례 언급했다시피, 무엇을 잘하든, 무엇을 망치든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삶이란 점만 기억하면 된다. 괜찮은 핑계를 대면 남은 납득시킬 수 있지만 결코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이것들은 모두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 물론 그렇지만 않을 수 있다면, 마음껏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족으로, 아이를 최소한으로 잘 키우려면, 무엇보다도 아이가 핑계를 댈 것들을 만들어 줘서는 안된다. 무엇 때문에 못했다는 말을 못하도록 해야 그나마 자기 할 일을 하고 산다. 물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바로 아이를 충분히 사랑해주는 것이다. 육아의 비법은 바로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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