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실수를 대하는 법

아이루다 2016. 2. 17. 13:25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다양한 형태의 실수를 한다. 그 실수가 치명적이냐, 아니면 금세 잊어 먹어도 될 만큼 별 것 아니냐에 따라 그 후의 진행은 완전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실수는 동일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을 했다는 '후회감' 이 든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수는 꽤나 마음 아픈 일이다. 그리고 큰 실수일수록 더욱 더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너무 큰 실수는 마음이 아픈 수준을 벗어나서 고통과 공포가 되기도 한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실수를 저지른 후, 자살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서 실수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많으니,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단지 실수 자체만을 바라보면, 가능하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수는 사실상 우리들의 운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 속에서 언제나 실수가 일어나고, 그때마다 우리는 후회와 자책을 하게 된다.

 

실수는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후에 나타나는 후회와 자책에 대한 감정이 더욱 그것을 심화 시킨다. 실수가 크면 클수록 후회와 자책 역시도 커져서 파괴적 성질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그 실수를 징벌하는 양심의 역할로 인해서 폐인의 삶을 살거나 매우 피폐해진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삶을 좀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자신의 실수에 조금이라도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 실수는 대부분 의도치 않게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실수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그것을 너무 심하게 다그치면, 삶이 괴롭고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수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까?

 

현재까지는 이미 저지른 실수를 대처할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냥 잊고 사는 것이다. 전자는 마주서는 것이고, 후자는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여기에서 없는 세 번째인,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택한다.

 

그것이 바로 계속 과거를 되새기면서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때 그렇게 해서는 안됐는데..' , '그때 그것을 했었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이 쓰리기에 현재의 삶에 의욕도 떨어진다. 실수로 큰 돈을 잃었다면 현재 버는 돈이 하찮게 여겨지고, 실수로 큰 돈을 벌 기회를 놓쳤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현재 버는 돈이 하찮게 여겨진다.

 

이런 모습이 바로 과거에 저지른 실수가 가장 좋지 않게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이다.

 

맞서 싸우면, 힘들지만 뭔가를 얻을 수 있다.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용기와 자존감은 회복시킬 수 있다. 무시한다면 양심은 좀 괴로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는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존감도 회복시키지 못하고, 행복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가장 괴로운 방법을 택한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일단 실수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된다.

 

실수의 첫 번째 모습은 바로 자신이 타인에게 저지른 실수이다. 실수로 들고 있던 컵의 물을 다른 사람 옷에 쏟는다든지, 일을 서툴러서 회사에 큰 손해를 끼쳤다든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상대에게 알려줘서 그 사람이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든지 하는 것들이 바로 그 예가 된다.

 

사실 타인에게 저지른 실수는 고소를 당하지만 않으면 마음에만 남는 후회일 뿐이다. 비록 그로 인해서 후회와 자책이 생기긴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다. 설령 자신의 실수로 인해 남이 죽었다고 해도 그것이 내가 죽은 것이 아니기에 잊을 수만 있다면 상관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한 실수가 온전히 타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각자의 평판에 영향을 미친다. 회사에서 한 실수는, 그 사람이 일을 못하는 사람이란 평가를 내리게 한다. 친구에게 한 실수는, 그 사람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친다. 즉, 직접적인 손해는 아니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손해가 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실수의 두 번째 모습은 자신이 자신에게 저지른 실수이다. 이것은 첫 번째 실수와 달리,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즉, 직접적으로 손해로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 경우엔 무시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 실수로 돈을 날린 경험이나, 실수로 필요한 서류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계약을 따내지 못했다면 그럴 수 있다. 실수로 남에게 큰 상해를 입혀서 고소를 당했을 때도 그렇다.

 

이런 실수들은 후회와 자책을 넘어선다. 이것들은 당사자의 삶을 뒤흔들 수 있다. 그래서 빼도 박도 못하고 삶이 불행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불행해진 삶은 다시 과거의 실수를 더욱 더 후회스럽게 만든다.


실수는 다시 크게 복구 불가능한 실수와 복구가 가능한 실수로 나뉜다. 즉,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총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내가 남에게 저지른 실수인데 복구 불가능한 실수이다.

둘째, 내가 나에게 저지른 실수인데 복구 불가능한 실수이다.

세째, 내가 남에게 저지른 실수인데 복구 가능한 실수이다.

네째, 내가 나에게 저지른 실수인데 복구 가능한 실수이다.


내가 남이나 나에게 저지른 실수 중, 복구 불가능한 것은 남의 다리를 잘랐거나, 내 다리를 자른 실수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때는 사실 방법이 없다. 이런 변화는 비가역적 변화이다. 즉, 한번 일어나면 절대로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실수는 감당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맞서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무척 힘이 든다.


실수의 세 번째 유형, 내가 남에게 저지른 실수 중 복구 가능한 것들은, 내가 아닌 상대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결정하면 결국 서로 싸움이 나게 되어 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는, 별것 아니네 라고 하면 상대는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역시도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상대가 잘 넘어가주길 바라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실수는 네 번째인 내가 나에게 저지른 실수 부분이다. 이것은 복구 가능하기에 적극적으로 해결하거나, 그것이 힘들다면 그냥 외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후회하는 실수의 거의 대부분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삶을 뒤흔들만한 실수는 흔히 하지 않으며, 또한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타인에게 저지른 실수는 인정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설령 상대에게 어떤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보통은 금전적이나 기타 해결책을 통해 해결하고는 잊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자기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후회를 한다. 이것은 삶을 통해서 끝없이 반복된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사람이 결국 다이어트를 해내지 못했을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살을 빼지 못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한 후,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자책을 하게 된다.

 

그것은 아침에 어떤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부터, 이번 휴가엔 어디로 여행을 갈지를 결정하는 것까지 다양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것들의 결과가 마음에 들면 좋지만, 뭔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 자체로도 충분히 기분이 나쁜데, 후회가 들어서 더욱 더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실수를 하고 나면 늘 후회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선택이란 과정을 통해서 둘 중 하나이거나, 여러 개중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다. 가지고 있는 신발이 백 켤레라고 해도 우리가 매 순간에 신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하나를 선택을 해야 한다.

 

운이 좋다면, 선택이 옳아서 좋은 결과가 나와 만족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늘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어느 날엔 구두를 신고 나갔는데, 굽이 부러지면서 다리를 심하게 삐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

 

우리는 선택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후회를 하게 된다. 만약 선택하지 않았다면 후회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 밖에 할 방법이 없었는데, 무슨 후회를 할 수 있겠는가? 선택이란 것 자체가 이런 식으로 늘 후회의 위험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이미 거의 고정된 것들도 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거나, 회사에 갈 때가 그렇다. 이런 것들은 선택이라고 하기엔 너무 제약적이다.

 

반면에 어느 날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출근에 비해서는 선택적이다. 또한 휴일날 근처 공원에 가는 것은 더욱 더 선택적이다.

 

그리고 모든 선택은 후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선택의 자유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더 문제가 발행했을 때, 후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신발이 단 한 켤레만 있는 사람은 그 신발을 신고 나갔다가 다리를 삐어도 신발 탓을 하지 않는다. 많은 신발 중에서 꼭 그 신발을 선택한 사람만이 후회를 한다.

 

출근 길에 당한 사고와 여행을 떠났다가 당한 사고와 근처 공원에 가다가 당한 사고는 모두 똑같은 사고지만, 사고가 난 후, 당사자의 마음에 드는 후회는 다르다. 그것이 필수적일수록 자책이 덜하다. 심지어 출근길에 난 사고는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어서 산재 처리가 되도 한다. 그만큼 필수적 활동이라고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사자가 출근길에 사고가 난 경우하고, 여행을 가서 난 사고를 비교하면 너무도 크게 차이가 난다.

 

이것은 매우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할 것들이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자율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필수적이란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출근이 싫은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비 선택적이기 때문이다. 회사를 가도 되고, 안가도 된다면, 물론 많은 사람은 회사를 안 가겠지만, 가더라도 기분 좋게 갈 수 있다. 하지만 필수적인 것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다면 선택 가능한 상황을 선호한다. 하지만 선택은 후회라는 아주 위험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매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끝없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정작 자유가 주어지면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해주길 바란다. 그래야 실패해도 일을 시킨 사람을 원망하고 끝낼 수 있다. 스스로 선택했다면, 실수를 온전히 혼자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자신의 삶을 타율적으로 산다. 사실 냉정히 말해서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자유는 그저 듣기 좋은 환상 속의 개념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평생 남의 말만 듣고 살 수는 없다.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밥 메뉴는 다른 사람이 정해줘도, 먹을 때는 스스로 먹어야 한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선택엔 늘 후회라는 어두운 그늘이 존재한다. 우리의 삶은 도대체 실수가 없을 수 없기에, 우리가 선택을 했을 때, 실수를 하지 않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결과 나타난 실수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이다.


어떻게 해야 실수를 좀 더 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로 필수와 선택에 따른 우리의 마음가짐을 생각하면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즉, 필수적인 일이라면 설령 그것에 문제가 생겨도, 우리는 후회는 하지 않는다. 설령 그 실수가 너무 크다고 해도,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으니 아쉽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후회와 자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어떤 식으로든 필수적으로만 만들 수 있다면, 하고 난 후 결코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단지 그것이 가능하냐의 문제만이 남는다.

 

선택이 필수적이란 말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

 

보통 여행을 떠나는 것은 선택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행을 너무도 떠나고 싶다면, 이것은 선택을 넘어선다. 즉, 필수가 된다. 여행을 가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면, 이것은 필수적인 일이 된다. 전 재산을 다 써도 후회가 없다. 떠나지 못하면 죽기 때문에, 가진 재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단 살고 봐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이다. 하고 싶은 일일수록 그것을 하다가 실수를 해도 후회를 하지 않게 된다. 자책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후회와 자책을 하고 그것을 넘어서 분노까지 느끼게 되는 것에는,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거나, 필수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사실 그 일을 하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다.

 

다리가 잘려도 그렇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산에 오른 후, 동상에 걸려서 다리를 잘라도 그 다리로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남편이나 아내의 말에 따라 억지로 산책을 나갔다가 살짝 다리만 삐어도 마음엔 후회와 상대방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행복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이 진실인 이유는, 바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어떠한 경우에도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중단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하고 싶었든지, 누가 하자고 했든지 상관없이, 가서 행복하면 둘의 행복은 동일하다. 식당에 가자고 한 사람이나 같이 가게 된 사람이나 맛난 음식을 먹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하다.

 

하지만 이것은 잘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맛이 없다면, 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한쪽은 맛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음엔 다른 가게에 가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은 화가 난다. 그다지 오고 싶지도 않았고, 돈을 주고 먹는데 맛이 없으니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즉, 문제만 없으면, 하고 싶어서 했는지, 하자고 해서 했는지 상관없이 모두 행복하다. 그래서 하자고 해서 한 사람 조차도, 자신에게 같이 먹자고 한 사람이 '봐 바, 내가 여기에서 먹으면 만족할 것이라고 했잖아' 라고 말을 하면 슬쩍 웃게 된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상관없이 하고 싶어서 한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해결이 안되어서 할 수 없게 되면 아쉬워하면서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하자고 해서 한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짜증을 낸다. 또한 '그래서 내가 하기 싫다고 했잖아' 를 무한 반복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아주 사소한 실수조차도 저지르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결국 이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아주 재미있는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거나, 짜증나고 문제만 생기는 여행을 다녀온 사람으로 나뉘게끔 한다. 이때 과연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본질이다. 무엇이든 어떤 선택이든 필수적으로 할 때, 우리는 실수는 하되, 후회와 자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실수를 제대로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적어도 실수에 대해서 적절한 태도만 익혀도 삶이 한층 행복해질 수 있다.

 

일단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했다면, 그것은 대부분 선택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는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길에서 우연이 예쁜 인형을 샀다면, 그것을 사는 것을 선택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가격, 장소, 기분,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어제 월급을 받고, 여자 친구와 같이 있으면서, 둘이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라면, 여자 친구가 인형을 사달라고 했을 때, 안 사줄 이유가 없다.

 

반대로 월급날이 한참 지나서 통장은 거의 비었고, 여자 친구에게 뭔가 삐쳤다면, 여자 친구가 인형을 사달라고 했을 때 인형을 사줄리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우리의 판단 기준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감정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 상태에서 약간의 이성적 판단을 가미해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가장 낫다고 생각한 것을 고른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폭은 무척 좁다.

 

그래서 대부분의 실수는 그냥 외면하면 된다. 사실 실수도 아니다. 그것이 남에게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면, 그냥 넘겨 버리면 된다. 그것을 했다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은 선택했다는 착각으로 인해 일어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신에 대한 관대함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 실수는 타인의 관대함에 맡겨야 한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매우 비겁하거나 못된 짓이다. 대신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실수는 스스로 무시하면 끝이다. 물론 이 둘 모두 복구 가능한 경우에만 한한다.

 

그래서 그럴 수 있다면, 과거에 일어난 수 많은 일들에 대해서 자다가 이불을 차는 일이 없어진다. 그냥 그때는 당연히 그랬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그때는 그럴 만 해서 그런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을 하든 하고 싶어서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해서 더 이상 설명할 말도 없다.

 

세 번째는 자신에 대한 기대치 수준을 가능하면 낮춰야 한다. 사실 무엇인가를 하고 실수를 했다고 느끼는 것은 이미 그것에 대한 기대치가 있어서 그렇다. 전교 1등이 영어 시험 문제를 하나 틀리는 것은 스스로 자해를 할 만큼 중대한 실수이지만, 꼴등은 반만 맞아도 집안의 경사이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실제 능력보다, 머리 속에서 상상하는 능력이 높다. 즉, 자기 기대치가 높아서, 실수에 대해서 관대하기가 힘들다.

 

네 번째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감당하는 법이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을 배우는 자세도 중요하다.

 

실수를 조금 더 잘 다뤄낼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다.


왜 지나간 일로 인해서 현재가 그리도 괴로워야 할까? 우리는 이미 실수로 인해 받은 결과로 인해서 충분히 괴롭다.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누워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힘들다. 그런데 왜 거기에서 괜히 등산을 갔다가 다리가 부러졌다고 후회를 하고 자책을 할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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