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후회하는 삶

아이루다 2016. 3. 6. 08:54


과거에 일어난 어떤 것에 대한 아쉬움 혹은 미련 등등, 아마도 후회라는 말을 정의한다면 이 정도쯤 의미가 될까?

 

뭐, 국어 사전을 찾으면 좀 더 명확하고 기계적인 설명이 나오겠지만, 이 정도면 대충 비슷할 듯 하다. 아무튼 후회라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과거' 라는 단어이다.

 

과거는 이미 지난 간 시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과거는 이미 고정된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엎어진 물은 닦는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정된 과거를 돌이키면서 후회를 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과거에 잡지 못한 남자나 여자에 대한 후회, 과거에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공부에 대한 후회, 과거에 남에게 못되게 대했던 행동에 대한 후회,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결정에 대한 후회 등등을 한다.

 

그리고 이런 후회들은 보통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후회는 자신이 좀 더 이득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나,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던 선택을 하지 못한 것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후회는 늘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과는 사실 거의 관련이 없는, 어떤 면에서는 매우 양심적인 것들이 있기도 하다.

 

어느 날 우연이 고아원에 갔다가 거기에서 부모 없이 크는 아이들의 슬픔을 경험하고는, 왜 그 동안 그것을 모르고 살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 때가 그렇다. 이것은 양로원이나, 노숙자의 삶을 보거나, 누군가 자신보다 많은 불행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느껴지는 공통적인 감정이다.

 

물론 같은 상황을 경험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라도 조금씩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파티장에 불행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 신나야 할 자리에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가 오는 것은 누구나 꺼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좀 더 많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타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남을 돕지 못한 과거에 대한 후회는 상대적을 아름다워 보인다. 자신만 알고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당연히 예뻐 보인다.

 

또한 이들은 구체적으로 행동을 한다. 후회를 책임지는 가장 좋은 자세이다. 그 후회를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삶의 음지는 단지 고아원이나 양로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 많아서 개인이 모두 관여할 수가 없다. 삶이 고달픈 사람들은 너무도 많고, 우리가 일해서 받는 월급은 확실하게 한계가 있다. 또한 몸으로 봉사를 한다고 해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결국 언제나 후회를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좀 더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여기고, 좀 더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다고 여긴다. 물론 이런 태도가 삶을 사는데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떠나서 이런 태도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보자. 이들은 분명 멋지고, 아름답고, 예쁜 사람들이지만, 그것이 다일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면, 영화 초반엔 매우 이기적이었던 쉰들러가 영화 후반엔 완전히 이타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 팔았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구했을 것이라고 울면서 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이미 남들이 하지 못한 수 천 명의 유태인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크게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화 속 이 장면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좀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정말로 그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물론 영화 초반에 보여줬던 그의 사치스러운 삶, 남에게 관심 없는 삶이 좀 더 빠르게 영화 끝 부분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로또를 샀는데, 번호를 단 하나만 틀린 사람이 자신이 틀리게 쓴 번호에 대해서 후회를 할 수 있다. 그것도 답이 11번인데 21번이나 12번을 썼다면 더 크게 후회를 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숫자만 제대로 썼다면 수십 억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니, 어떤 면에서 당연하다.

 

그래서 후회가 드는 건 당연한데, 그렇다고 해서 당첨 번호를 알고 있는 지금 이순간, 과거에 당첨 번호를 모르고 임의의 숫자를 쓰던 과거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판단일까?

 

사실 쉰들러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는 로또와 같이 자신을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해서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후회는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이것이 후회가 가진 진정한 단면이다.

 

우리는 지식과 경험이 완전히 다른, 지금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에 자신이 선택했던 것들을 다시 평가한다. 이것은 마치 어른이 된 후, 초등학교 시절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고 후회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매일 다른 경험을 한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더 많은 지식을 쌓고, 과거에 쌓은 기억을 잊어 먹는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변한다. 과거의 자신이 로또 번호를 알고 있다면 그 번호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단지 모르기 때문에 전혀 엉뚱한 번호를 쓴다.

 

그런데 번호를 알고 난 후, 과거에 모르고 쓴 선택을 후회한다.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니 나타나는 병폐이다.

 

남을 좀 더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이나, 남을 좀 더 돕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역시도 마찬가지다. 뭔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뭔가 더 알지 못해서 이기적이었던 자신에 대한 후회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오만한 것이다. 자신은 좀 더 착하고, 자신은 좀 더 이타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구이다. 이런 후회를 통해서 자신이 좀 더 진실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랬다면 이미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마치 태어남과 동시에 남들에 대해 생각하고, 남들을 돕는 존재가 되었어야 했다고 믿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결코 그럴 수 없음을 말이다.

 

오늘 그것에 대해 알았다면, 오늘부터 그렇게 살면 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쉰들러처럼 후회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좋은 의미이기에 별 상관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 대한 과도한 미움이나 한심함을 느끼는 것은 좋지 않다. 자신을 좀 덜 미워하고 살아야 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과거에 했던 행동이 모두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에 일어난다. 로또 번호를 선택하고, 여행을 갈지 봉사 활동을 갈지를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로또 번호는 원래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임의의 번호를 쓰게 된다. 그것은 우연이 꾼 꿈 속에서 나온 숫자일 수도 있고, 기계가 자동으로 찍어 준 번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여행을 갈 수도 있고, 봉사 활동을 갈 수도 있었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는 당시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했을 것이다. 기분이 좋았을 때나 우울할 때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고, 날씨가 너무 좋았거나 비가 오거나 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과거에 날씨가 너무 좋고, 기분이 너무 좋고, 같이 가고 싶어하는 친구가 있었다면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불쌍한 사람이 나오는 마음이 아픈 영화를 보고, 날씨도 흐리고, 기분도 좋지 않고, 같이 여행을 갈 친구조차 없었다면 그때 봉사 활동을 갈 걸 하는 후회가 들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과거로 돌아가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란 엉뚱한 상상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현재의 자신을 과거로 보내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공부를 안하고 논 아이는, 나이를 먹고 후회하겠지만, 과거의 자신은 결코 공부를 할 리가 없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로 가야 공부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러니 과거의 자신은 바뀔 수 없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선택은 당시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세상에서 누가 자신을 불리하게 하고,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선택을 하겠는가? 잘못된 선택은 있어도 처음부터 불행함을 위한 선택은 없다. 단지 그것이 의도와 상관없이 결론적으로 불행함을 가져왔을 뿐이다.

 

선택의 결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그냥 그것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선택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 말하면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한, 선택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치 경사면의 흙 위를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은 끝없이 방향을 틀지만, 사실 물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물은 단지 조금이라도 덜 막히는 곳으로 방향을 틀 뿐이다. 그리고 낮은 곳을 향해서 간다. 만약 물이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다면, 위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물에게 있어서 작용하는 중력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행복과 같다.

 

과거에 여행을 간 것은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선택이고, 봉사 활동을 간 것은 양심이 편해지는 선택이다. 이것은 어떤 행동이 좀 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덜 불행하게 해주냐를 결정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설령 억지로 하더라도 그 조차도 결정되어 있을 뿐이다.

 

후회는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설령 의지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 자체가 바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나'이기에 선택한 것이다. 남이면 다른 선택을 했을 테지만,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바뀌지 않는 한, 그럴 수 밖에 없다.

 

매우 이성적인 선택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변함없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감정적인 선택도 마찬가지다. 어떤 선택을 말리는 친구가 있었다고 해도, 그 친구는 그 누구도 아닌 내 친구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친구인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아닌, '나'만 말려지게 된다. 다른 사람의 친구라면 말리지 않고 등을 떠밀었을지도 모른다.

 

물리학 박사가 된 사람이 초등학생 시절에 왜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지 못함을 슬퍼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남을 생각하고 남을 돕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니 좋은 일을 하고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 혹시 그렇지 못했다면 그 역시도 받아 들어야 한다.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마음에 담고 사는 것은 사실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다.

 

우리가 매일 하는 선택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선택이다. 비록 미래의 어느 날에는 너무도 바보 같은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다.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사실 매우 오만한 것임을 진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좀 더 나은 존재일 수 있었다는 믿음이 결국 후회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왜 자신이 과거에 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을까? 우리는 누구나 그때는 그랬을 뿐이다.

 

우리의 과거는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판단하는 짓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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