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 경험

아이루다 2016. 3. 5. 09:11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각자 자신만의 경험을 쌓는다. 그 경험들의 종류는 행복한 것일 수도 있고, 불행한 것일 수도 있다.


그 경험이 어떤 종류나에 상관없이, 그 경험으로 얻는 만족감의 총합은 우리가 보통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자신의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행복감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잘 기억한다. 그런 후에 그때를 현재의 행복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하는데 사용하곤 한다. 


그래서 과거에 경험했던 행복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현재의 행복에 대한 만족감은 자동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현재의 행복이 지난 삶 중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면, 그는 일단 지금 매우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 단순하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과거 행복했던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은 지금 그다지 행복하지 못해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행복을 자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환경에서 잘 버텨내는 경향이 있다. 죽음의 포로 수용소에서는 낙관론자에 비해서 비관론자가 더 잘 살아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행복할 때가 아니나 행복 하려고 할 때 자신의 의지가 최대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의지 없어 보이고 한심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할 때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를 보인다.

 

단지 그 행복의 대상이 문제가 될 뿐이다.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SNS 를 하거나, 게임에 빠져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하거나, 마약이나 도박에 빠져서 삶을 망치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 행복 하려고 하면, 그것이 현실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의 문제는 너무 과해서 문제일 뿐, 결코 의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그 의지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문제일 뿐이다. 일반 사람들은 보통 그런 것들로부터 그만큼의 행복을 얻지 못하기에 조금 하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보통 일반 사람들은 좀 더 영리한 행복을 추구한다.

 

일반 사람은 여러 가지 행복의 경험을 다양하게 하긴 하지만, 그 실제로 어떤 것에도 중독되어 하는 사람만큼의 의지를 발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평생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열정을 경험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정열은 사실은 치명적 중독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람은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할 때 가장 열정적이 되며, 의지적이 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행복한 일을 찾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선행된 행복의 절대량이 커야 하기도 하다. 그래야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 의지를 갖게 된다.

 

그런데 행복에 대한 이런 특징들은 사실 좀 더 훨씬 복잡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능력 부족으로 인해서 다시는 경험해보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가 뭔가 크게 바뀌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삶을 망치기도 하고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매일 풀빵만 먹던 아이는 어느 날 우연이 비싼 빵집에 갈 기회가 있어서, 거기에서 비싸고 맛있는 빵을 먹는 경험을 하고 난 후에는, 자신이 좋아하면서 먹던 풀빵의 맛이 예전과 같이 않음을 알게 된다.

 

이 부분은 두 가지 면에서 다뤄져야 한다.

 

일단 첫 번째는, 아이의 욕망이 커졌다는 점이다. 풀빵에 만족했던 아이는 괜히 비싸고 맛있는 빵을 먹는 행복 경험을 한 탓에, 자신이 먹던 풀빵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이후 이 아이에게 비싸고 맛있는 빵을 먹을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변화는 재앙이 된다. 소소한 풀빵의 행복조차 사라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삶을 망치는 경우로 작용한다.

 

두 번째는 행복 만족 욕구가 커져서 자신이 어디까지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좋게 작용한다. 즉, 풀빵만 먹던 아이의 행복은 80점이라고 했을 때, 비싸고 맛있는 빵을 먹는 경험을 통해서 그 보다 더 강렬한 행복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100점짜리 행복이 있음을 경험한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이 아이가 자신의 행복 지수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어디쯤에서 만족할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욕망이 되기에, 자신의 삶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할 강한 자극제가 된다.

 

이것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으로 작용한다.

 

여기까지 이해한 후, 이제 다시 행복에 대한 가장 일반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원래 행복 하고 싶다면, 가진 욕망을 줄이든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든가 해야 한다. 즉, 어떤 식으로든 이뤄지지 못한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품은 많은 욕망들은 사실 이루기 힘든 것들이 많다. 왜냐하면 요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너무도 많은 욕망의 자극을 받는 세상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냥 풀빵만 먹고 살아도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비싸고 더 맛난 빵을 먹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끝없이 주입 받고 있다.

 

그래서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가만히만 있어도 불행해지고 만다. 그러니 나가서 뭔가 사고, 먹고, 놀아야 그나마 그 행복이 유지되고 만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서 가장 현명한 행복 방법은 바로 이런 끝없는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다. 욕망을 줄이고, 실현 가능한 욕망을 최선을 다해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요즘 시대의 가장 현명하고 현실적인 행복 법이라고 해야 한다. 사실 그래서 많은 책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반대의 책도 있다.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책들도 있다. 그리고 사람이 열정적으로 살려면 기본적으로 욕망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야 열정이 생기는 것이다. 아무런 욕심도 없이는 열정이 생길 리가 없다.

 

즉, 욕망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행복을 얻는 비밀이라고 말하는 책들도 꽤나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데, 앞에서 말했듯이 욕망 자체를 줄이든 아니면 적극적으로 실현하든 어떤 식으로든 간에 없앨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을 줄이는 것은 소극적 태도의 행복 추구이고,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이뤄나가는 것은 적극적 태도의 행복 추구라고 평가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통 후자가 상대적으로 힘들기 마련이다. 일반 사람들은 열정을 가지기도 힘들뿐더러, 그런 열정은 보통 타고나는 경우가 많아서 열정이 있는 사람은 모든 분야에 열정이 있고, 반대로 없는 사람은 모든 분야에 없는 것이 흔한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강제로 욕망을 줄이는 법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착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욕망을 실현하는 것보다 없애는 것이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도는 그리 나쁘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이 해결책은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코 이룰 수 없다는 점이며 그래서 결국 착각도 일어나게 된다.

 

사실은 포기한 것인데 마치 그것을 받아들인 듯 여긴다. 하지만 이것이 받아들였느냐, 포기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진다.

 

일본엔 요즘 '사토리' 세대라는 젊은이들이 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득도' 했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아무튼 해석하면 마치 불교의 득도한 고승처럼 욕망을 줄인 세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받아들임이 아닌 포기이다. 즉,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닌, 사회적 분위기와 자신의 현실적 한계의 선을 그음으로써 힘들게 욕망을 실현하는 삶이 아닌, 작고 소소한 욕망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진짜로 득도한 고승은 동네 앞 산에 올라 갔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이나, 유럽 여행을 갔을 때 행복을 완전히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고승은 비싸고 시간도 많이 드는 유럽에 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토리 세대는 다르다. 이들에게는 앞 산과 유럽이 분명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유럽 여행을 가려면 돈도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 그냥 포기하고 동네 앞 산에 올라서 그것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이제 우리나라에도 번지고 있다. 즉, 욕망이 줄어든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젊다는 것은 서투르고 위험해 보이지만 삶의 전체 과정에서 가장 열정이 있어야 하는 시기이기에 인생의 가장 불꽃같은 시기라고 평가된다. 좋은 말로는 열정적이고 나쁜 표현으로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시기란 뜻이다.

 

이것은 어떤 말로 표현되든지 아무튼 젊은 시절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다. 그런데 그 시기를 마치 나이 많은 노인처럼 보내고 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사토리 세대에 대해서 재미난 통계가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토리 세대는 한참 잘나가던 일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지금의 중 장년 세대의 젊은 시절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행복도가 더 높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단지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열정도 부족하고, 결혼도 하기 힘들고, 그래서 연애도 안하고, 아이도 낳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안정적인 직장도 있는 것도 아니고, 월급도 적은데 더 행복하다는 말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이들은 득도라는 말처럼 실제로 욕망을 어느 정도 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크게 행복하지는 못해도 크게 불행하게 살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행복 기준점은 그 전 세대에 비해서 한 단계 낮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은 결코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도 아니란 점이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 포기를 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큰 문제이다. 받아들임은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의 불꽃을 아예 끈 것이지만, 포기는 불꽃을 줄여서 불씨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불씨를 완전히 끄거나 혹은 아예 되살려서 열정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평생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마치 그런 불씨가 없는 사람인 냥 행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들을 한다.

 

"나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해요"

 

"결혼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애를 왜 낳죠. 키우기도 힘든데"

 

"그냥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편해요. 나가면 좋긴 한데, 번잡하고 돈도 많이 들어요"

 

만약 정말로 이 말들이 진심이라면, 이 사람은 사실 진짜로 스님이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 살고, 결혼도 안하고, 애도 안 낳고, 집에만 있을 것이라면 스님만큼 적합한 삶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스님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보편적 행복은 추구하지 않지만,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은 추구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춘다.

 

물론 행복에 대한 근원적 해답은 이들의 태도와 나름 비슷하게 겹쳐지긴 한다. 우리는 욕망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최대한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적극적으로 욕망을 채우는 행복은 욕망을 채울수록 무한대로 욕망이 늘어나기 때문에 결코 이뤄질 수 없는 행복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욕망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자신은 정말로 그런 존재라고 믿는다. 자꾸 말을 하니, 정말로 혼자 사는 것이 좋고, 결혼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느끼게 된다.

 

과연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이 좋을까?

 

이것의 답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힘들게 남들과 함께 살아갈까를 되새겨야 한다. 우리가 남들과 같이 사는 이유는 단지 행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불행에 대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다. 물론 행복도 추구한다. 이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있기에 잘 맞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의 관점만 본다면 혼자 사는 것이나, 둘이 사는 것이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불행함의 측면은 다르다. 아무리 보험을 잘 들어놓고, 간병인을 구할 충분한 돈이 있어도, 힘들 때 그들로부터 위로 받을 수는 없다.

 

죽을 병에 걸렸는데, 훌륭한 의료시설의 병원에서 잘 훈련된 간병인의 간병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때 우리는 소중한 이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나를 위해서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다.

 

우리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혼자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억지로 극복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적어도 자신의 입에서 '혼자 사는 것이 좋아서 결혼하지 않는다' 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자기 최면이다.

 

마음 속 불씨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잘 안 보인다고 해서 불씨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준비를 해야 한다. 힘들지만 조금씩이라도 해야 한다. 결코 다시 타오르지 못하고 죽음과 함께 꺼질 수 있는 불씨이지만, 스스로 완전히 꺼트리지 못할 바에야 인정하고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옳다.

 

외면해봐야 스스로만 상처 받는다.

 

그리고 직면할 수 있을 때,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즉, 열정이라고 부르긴 쑥스럽지만 그럼에도 작은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많이 행복한 경험을 누릴 권리가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그런 행복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 경험은 이미 충분하다.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내뱉은 의미 없는 부정적 표현들은 이제 좀 안으로 거둬드리고 사는 것이 좋다.

 

그래서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그런 모습이라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을 향해 가는 가장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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