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성격과 행복의 상관 관계

아이루다 2016. 2. 7. 07:30

 

인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행복을 얻는다. 하나는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하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한 일을 경험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하는 것 자체가 즐겁지만은 않더라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존재감과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험을 할 때이다.

 

이 두 개를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전자는 스스로 만족하는 즐거움의 행복이고, 후자는 타인을 통해 만족되는 의미나 가치의 행복이다.

 

예를 들어서 편안한 잠을 자거나, 맛난 것을 먹거나, 몸을 깨끗이 씻는 일 등은 스스로 만족하는 행복일 가능성이 높고, 축구 경기를 하거나,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친구들과 대화 속에서 끝없이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잘해냈을 때 타인의 평가를 통해 만족되는 행복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사실 이 구분은 좀 모호하다. 왜냐하면 몸을 씻는 일도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있으며,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자기 만족으로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다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같은 일을 해도 자기만족 형이 있고, 타인 만족 형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사실 이 질문은 딱히 어떤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을 혼란 없이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즉,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런 차이가 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타고난 성향이기 때문이다. 즉, 각자가 타고난 성향에 따라서 그렇게 결정이 된다. 그리고 방금 언급한 성향은 다른 말로 하면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표현이 성향이든 성격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성향이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그것이 바로 외향적이냐 혹은 내성적이냐 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내성적이냐 외향적이냐로 나누는 구분법이 바로 행복을 자기만족 형이나 타인 만족 형으로 느낄 수 있느냐에 완전히 일치가 된다.

 

즉, 내성적인 사람은 자기만족 형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통 혼자 있는 행복을 추구하게 되고,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느끼면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통 많은 인간 관계를 맺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성격의 비율은 어느 정도 될까? 사실 우리는 보통 이 두 성격이 전체의 반반 정도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다시 자기만족 형이냐 타인 만족 형이냐 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타인 만족 형 행복이 훨씬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보통은 외향적인 성격인 것이다.

 

그럼에도 성격적으로만 보면, 이 두 성격이 비슷한 비율로 상상되는 이유는, 몇 가지 착각 때문이다.

 

그 착각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수줍음이다. 우리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을 내성적인 성격으로 간주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남들 앞에서 실수할까 봐 너무 과도한 걱정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과도한 걱정은 바로 '관계 맺기 실패' 라는, 외향적인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실수를 의미한다.

 

사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수줍을 수도 있지만, 관계 맺기 실패에 그다지 연연해 하지 않는다. 이미 스스로 혼자 행복한데, 왜 그것을 걱정하겠는가?
 

두 번째 착각을 주는 원인은 바로 주눅이 든 성격이다. 이것도 사실 관계 맺기에 잦은 실패를 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인데, 그러다 보니 주눅이 들어서 관계 맺기에 소극적이고 더해서 회피하기까지 하는 사람을 보고는 내성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 모두 '관계 맺기'를 열망하지만, 타고난 능력 부족으로 인해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문제를 겪는다. 단지 크게 겪지 않고, 더해서 그 문제로 인해 겪는 불행보다 더 큰 행복을 얻기 때문에 그것을 참아내면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누군들 모임에 다녀와서, 누군가 한 말이나 행동에 상처 입어 본 적이 없겠는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또한 그런 상처가 자신의 다음 모임에서의 말과 행동에 주의를 주게 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남들에게 대할 수 있는 방법론을 이끌어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커 온 모든 과정이 이런 절차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실패한 사람의 숫자도 제법 된다. 그리고 이렇게 실패한 사람들이 모두 내성적인 사람으로 잘 못 취급된 것이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간에 상관없이, 외향적인 사람들이 가진 행복의 근원은 바로 자신이 아닌 타인이다. 그들은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존재감을 확인 받고, 그로 인해서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우리들의 삶은 보통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여, 그만큼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이 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실패의 이유가 내성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인정을 받기에는 타고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외모나 성격적 매력이 부족하거나, 말주변이 없거나, 농담을 못하거나, 남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먹어야 할 음식들을 잘 못 먹어서 그럴 수 있다. 그나마 우리는 이 중 하나만 잘 해도 그것으로 버티면서 관계를 맺어가기도 한다.

 

아무튼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큰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그래서 자신에게 실망하고 불행해지고 만다. 이런 식으로 의기소침해진 사람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거부하려고 한다.

 

이것은 사실 당연한 행동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목적이 행복인데, 행복하지 않으면 왜 어울리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러다 보면, 자신을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마치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잘못된 착각이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혼자서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서도 행복하다. 단지 번잡하고 시끄러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반면에 타인과의 관계에 실패해서 혼자 지내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아서 남들과 함께 있고 싶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오히려 더 불행하니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채 혼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감을 얻기 위해서 관계 행복을 추구하다가 실패해서 불행해진 사람들은 과연 무슨 일을 하려고 할까? 당연하게도 행복하기 싶기 때문에, 자신이 불행한 이유를 찾고, 미래에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나서게 된다. 그들은 이제 행복의 비법을 얻기 위해서 강연을 듣고 책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때 흔히 듣는 행복에 대한 조언은, 관계 속에서 타인에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과,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주를 이룬다. 즉, 정확히 말하면, 자기만족 형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은 외향적 사람들은 자신이 관계 속에서 당한 상처를 떠올리면서, 이 조언들을 깊게 새기게 된다. 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관계에 상처를 받기 때문에, 행복하고 싶다면 자신을 더 사랑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행복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조언이 매우 매력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물론 이 조언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말은 관계 속에서 존재감을 통해 행복을 얻었던 사람에게 스스로 만족하는 행복을 추구하라는 조언이다. 즉, 다시 설명하면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꾸라는 뜻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럼에도 이미 실패한 경험으로 인해 혼자가 되어서 자신을 내성적이라고 착각한 외향적인 사람이 이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당연하게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미 자신이 내성적이므로, 책에서 말한 것들만 실천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생겨난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떠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카메라 하나 들고 혼자 떠나는 여행을 상상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남들과의 관계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하라는 조언은 매우 매력적이지만, 존재감 속을 느끼면서 행복했던 외향적인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내성적인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까?

 

자신의 농담에 웃는 사람들을 보면서 행복했던 사람, 자신이 새로 산 비싸고 좋은 제품을 자랑하면서 행복했던 사람, 은근히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하고는 부러움을 사면서 행복했던 사람, 남편이 진급했다고 한 턱 쏘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 누구나 대단하다고 할 만큼 깊은 지식을 자랑하던 사람, 자신만 등장하면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즐기던 사람, 모임에 가서 언제나 분위기를 이끌고 너 없으면 우리 모임 안 돌아간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 어느 날 그런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을까?

 

물론 실패한 외향적인 사람은 그런 즐거움 자체가 없었기에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만약 책의 조언대로 따라서 한다면, 한 가지는 얻을 수 있다. 뭔가 할 일이 생기긴 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해도, 뭔가 한 것처럼 느끼게 해준 것이다. 즉, 적어도 의미나 가치는 생겼으며, 그것으로 인해 나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의미나 가치만큼 또 다시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 완성되는 것도 없다. 우리가 자신의 의미나 가치를 완성하려면 반드시 타인의 지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관계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결국 이 시도는 관계에 대한 집착을 조금은 덜어주지만, 행복은 얻을 수 없게 결론이 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다시 새로운 책을 산다. 거기엔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적은 내용들이 적혀 있다. '너를 미워하지 말라' 라든가, '악당이 되어서 살아라' 같은 조언들이 적혀 있다.

 

하지만 결국 모든 조언들도 사실은 같은 말이다. 관계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며, 너의 행복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을 때 잠시 위로가 될 뿐이다. 어떤 것도 바뀐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고난 성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외향적인 성격에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뀔 수 없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한 도전이다.

 

사실 자기만족 형 행복은 매우 어려운 목표이다. 왜냐하면 내성적인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행복인데,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탁월한 감성' 이다. 그리고 이 감성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감정일 뿐이고, 감성은 다르다. 감성은 매우 섬세한 능력이다.

 

그래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결국 그래서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예술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들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고, 이들이 쓴 글을 읽고, 이들이 작곡한 노래를 들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이 쓴 다양한 행복에 대한 책들은 거짓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 내성적인 사람들이 주로 책을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내성적인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왜 그렇게 사람이 관계에 집착하면서, 자신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외면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조언을 하고 싶어진다.

 

이들은 '자신에게 집중하기',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혼자 떠나는 여행' 등을 실천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조언은 내성적인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결국 외향적인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해도, 혼자 여행을 떠나도 결국 거기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리고 우연이 성공하게 되면, 잃은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답이다. 관계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면, 그 해결책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끊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겁나고 힘들긴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사랑의 상처를 잊는 것은 또 다른 사랑을 만나는 것뿐이듯이 그렇다. 돈이 부족해서 불행하다면, 돈이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성격을 바꾼 것이 아니다. 평범하고 외향적인 우리들은 결코 혼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원래 무리 생활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가 관계로부터의 불행함에서 벗어나 다른 행복을 찾았다면, 그것은 단지 환경을 바꾼 것이다. 우리가 이미 가진 성격이 좀 더 적합하게 잘 맞는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엔 실패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누구와도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고, 또한 그렇다고 해서 관계의 행복, 즉 타인의 인정을 받는 행복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감성이란 것은 이미 고정되어 있는데, 감성을 발달시켜서 내성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데 말이다.

 

결국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아니다.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성격은 바뀌지 않지만 또한 성격은 사실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성격을 바꾸는 것은 아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문제는 그것을 참아낼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물론 우리는 이미 타고난 '탁월한 감성'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선천적이다.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시상이 떠오르고, 아름다운 선율을 작곡해낼 수는 없다. 감성 충만한 소설을 쓸 수도 없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노력에 따라서 일부분은 가질 수 있다. 물론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밤 하늘의 별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 구절의 시를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 별 자리를 외우고, 그 별 자리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배울 수는 있다. 사실 그 정도의 감성은 우리 누구나 있다. 단지 우리는 밤 하늘을 바라보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모닥불을 보고 있으면 감성적으로 변한다. 우리는 모두 그 정도의 감성은 있다. 단지 우리는 모닥불을 볼 기회가 적을 뿐이다.

 

이것들이 힌트이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감성적으로 해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최대한 감성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노력을 할 수 있다면 조금씩 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비를 바리바리 싸서 캠핑을 다니라는 소리가 아니다. 최대한 가볍고, 최대한 조용히 다녀야 한다. 모든 종류의 소란스러움과 오버스러움은 감성을 망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또한 관계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니, 일단은 최대한 관계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 관계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사는 얘기가 나오는 TV도 멀어지고, 끝없이 교류가 이뤄지는 SNS에서도 멀어져야 한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면서 자기 자신과 외로운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사실 10년, 20년도 더 걸릴 수 있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이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만 해놓으면 자신도 모르게 알아서 굴러간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다지 기대되지도 않고, 만나도 그리 할 얘기도 없으며, 하는 얘기들도 흥미를 잃어간다.

 

그럴수록 점점 더 자신의 내부로 집중된다. 그리고 서서히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행복은 죽는 날까지도 누릴 수 있다.

 

추가적으로 감성 개발에 큰 도움을 주는 도구들은 책, 영화 등의 다양한 문화 상품들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베스트셀러 급 책' 과 '블록버스터 급 영화' 이다.

 

사실 베스트셀러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책이다. 그리고 다수의 공감을 받는다는 말은, 그 내용이 뻔하다는 뜻이다. 물론 모든 베스트셀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소수의 좋은 책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책들은 대부분 숨겨져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그리고 그 발견은 바로 '나의' 책이 되어 준다.

 

블록버스터 급 영화는 더욱 더 심하다. 그것은 대부분 즐거움 위주로 채워진다. 물론 이 역시도 소수의 좋은 영화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좋은 영화들은 많이 소개 되고 있으니, 찾기가 어렵지도 않다.

 

아무튼 책이든 영화이든 간에 이미 알고 있는 뻔한 내용을 다시 설명해주는 것들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관계 속에서 행복할 수 있다거나, 관계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하는 내용들뿐이다. 물론 남녀간의 사랑도 좋고 가족들의 사랑도 좋다. 친구도 좋고, 동료도 좋다. 정의를 실현하고, 악당을 쳐부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지금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감성을 개발해야 한다. 감성은 뻔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자꾸 뻔한 것들을 보면, 뻔한 것들만 눈에 들어 온다.

 

남들이 다 아는 장소에 여행을 가면, 상점만 즐비하다. 사람이 많고 복잡해서 뭔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그러니 뻔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낮다. 그래서 낯선 곳, 알려지지 않는 곳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 불편하고, 불안해도 거기엔 뻔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처음엔 불안하고 두려움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천천히 시작해야 한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는 남극에 갈 수는 없다. 다행인 것은 아직 시간이 많다는 점이다. 그리 행복하지 않는 시간이지만, 우리가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죽기 전에만 바꿀 수 있으면 된다.

 

오늘이 그것을 시작하는 날이 되면 된다. 서울에 산다면, 오늘 지하철을 타고 과천에 있는 현대 미술관을 다녀오면 된다. 심심하고 외로울 것이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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