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우리가 관대해지기 힘든 이유

아이루다 2016. 1. 30. 08:15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많은 사랑을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둘 중 누가 더 행복하냐는 질문의 답은, 당연하게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사실 남들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우리를 불행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수 많은 감정들, 분노, 슬픔, 짜증, 외로움, 질투, 공포 등은 대부분은 보통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그들의 이기심, 예의 없거나 무식한 행동, 나와 관련 없는 짜증, 무리한 욕심 등으로 인해 발생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들의 행동은 이해 불가능한 것에서 이해 가능한 것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는 특별한 누군가가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때 행복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덕목은 바로 타인에 대한 '관대함' 이다.
 
관대함은 타인의 단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상대의 다양한 형태의 어리석은 행동, 즉 짜증, 분노, 질투, 욕심 등을 상처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그럼으로써 그들의 신뢰와 사랑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타인들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를 봐도,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그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덕목인 관대함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행복한 삶의 기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우리는 관대하기가 엄청나게 힘들다. 설령 관대하더라도 자신마다의 고유한 조건부로 관대할 뿐이다.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관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거나 평가 받는 사람들이 보이긴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관대할 수 있을까?

 

사람이 관대 하려면 일단 친절한 성격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반드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갖춰야 한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탁월하게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왕이 되거나, 엄청난 부자가 되거나, 어떤 조직 내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왕이 경우엔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 내에서 관대해 질 수 있으며, 부자는 그 부의 크기에 따라서 관대함의 경계가 생겨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작든 크든,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는 그 조직 내에서만큼은 관대해 질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냈거나, 육체적으로 출중하게 우월하여 스포츠 스타가 되거나 혹은 만인이 칭송하는 외모를 가진 연예인이 되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레벨 자체가 다르게 되면, 관대해 질 수 있다. 이것을 일종의 차별적 관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함이다. 그리고 무관심할 수록 관대해 질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친절하면 된다. 결국 타인에게 무관심하지만 친절하기는 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관대해 질 수 있다.
 
사실 이들이 관대해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원래 관대함을 베풀려면 상대의 단점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어리석은 행동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상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만약 처음부터 상대의 단점 자체를 보지 못하거나, 상대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 자체를 아예 신경 쓰지 않으면 당연하게 둘은 비슷한 효과를 가져온다.
 
배고프다고 구걸을 하는 거지에게 돈을 만 원 주고, 그 거지가 정말로 밥을 사 먹는지 살펴보는 사람과, 돈을 주고 난 후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만약 거지가 그 돈으로 도박을 했을 경우, 그 다음에 거지를 만난 경우에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거지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본 사람은 당연히 돈을 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거지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은 다시 만 원을 줄 것이다. 그리고 관심 없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무관심한 사람이 탁월하게 관대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상대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도 없으면, 그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전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무지의 관대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두 가지 형태의 관대함으로 보면, 우리는 거지와 우리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어서, 정말로 깊은 동정심으로 느끼고 만원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만 원을 거지에게 준 후, 그 돈을 어떻게 쓰든 관심이 없을 때, 이 두 가지 경우에 평생 동안 지속적으로 거지에 만 원을 줄 수 있다.
 
물론 거지를 도울 때는 제 삼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관대한 존재가 아니라,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의 시작점이 다르다. 이들은 거지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느끼기에 거지에게 도움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 따라 거지를 돕기도 하지만, 돕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흔히 거지를 돕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우리는 보통 추운 날 거지를 더 많이 돕는다.
 
아무튼 우리는 이렇게 우월적 관대함이나 무지의 관대함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관대해 보이며, 그럼으로써 세상은 좀 더 따뜻해 보인다.
 
또한 이 관대할 수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다시 우리가 왜 관대해질 수 없는지에 대한 해석이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아예 레벨 자체가 다른 위치로 가기가 어렵다. 또한 회사 내에서는 사장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방이라도 밖에 나가면 그 누구도 우리를 사장님으로 취급해주지 않는다. 그때는 단지 돈으로만 대우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식당에서 대접을 받으려면, 회사 명암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주 비싼 식당에 갈 때 그나마 대접 받을 수 있다.
 
결국 회사 사장이 관대하다고 해도, 그 관대함은 회사 내에서만 머물거나 혹은 자신이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장소까지만 머문다. 물론 돈이 아주 많다면 훨씬 더 넓은 영역에서 관대해질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사장의 지위조차도 올라가기가 어렵다. 또한 당연히 돈을 많이 벌기도 어렵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타인과 레벨 자체가 달라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에게 완전히 무관심해서 관대해질 가능성은 많이 있을까? 물론 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은 거의 타고난 경우가 많다. 우리는 타인에게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기가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타인에 대한 관심이 바로 우리의 행복 코드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공감을 하고, 관심을 가져주고, 관심을 받으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행복 요소 중 아주 중요하게 지켜져야 할 조건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관심의 관대함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공감도, 관심을 주거나 받기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늘 친구를 사귀려고 애쓰고, 그렇게 사귄 친구들을 통해서 행복하게 된다. 우리는 친구들과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으며, 덕분에 삶을 많이 윤택하게 할 수 있다.
 
물론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착하고 친절한 성격으로 인해서 두루두루 많은 사람을 사귀게 된다. 비록 깊은 관계는 맺지 못해도, 얇고 넓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친구가 많아 보인다. 하지만 정확한 진실은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다 보면, 꽤나 꼬여 있다는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는 일단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즉, 기본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또한 그들로부터 관심을 받으면서 행복해진다.
 
하지만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를 받게 된다. 배신당하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한다.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를 느끼거나, 질투를 받기도 한다. 사실 관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불행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을 느낀다. 책을 찾아서 보고, 상담을 하고, 뒷담화를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려고 하지만, 평생 동안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함이다. 우리가 관대해지면 관대해질수록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받는 상처는 줄어든다.
 
관대해지면 무시를 당해도, 질투를 당해도, 배신을 당해도 덜 상처 받는다. 완전히 관대해지면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관계는 오직 행복함으로만 작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의 조건이 레벨이 다른 위치에 올라 서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라면, 뭔가 꼬이는 것이다.
 
그나마 보통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레벨이 다른 관대함은 바로 개나 어린 아이를 보면서 느끼는 관대함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우리는 그들과 공감할 수가 없다. 공감은 서로 그리 다르지 않아야 일어나는 것이지, 우리가 개나 어린 아이를 보면서 그들과 공감하기는 힘들다. 물론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관대하지만, 사람과 사람으로써 관계를 맺고 행복할 수는 있다. 만약 행복하다면 그것을 보살펴주고, 소중한 존재로써 행복해지는 것이다. 개와 아이는 보살핌을 해줘야 하며, 또한 당사자들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다.
 
그나마 레벨이 다른 위치로 올라 섰을 때는, 과거에 자신이 그 낮은 레벨에 있었던 경험이라도 있었기에, 일부분 공감이 이뤄지지만, 아예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인 경우엔, 이것 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반드시 공감과 관심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교류는 계속될 수 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서,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것에 따라서, 같이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에 따라서 서로 편의상 같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사회적으로 만나는 많은 관계가 그런 의미이다.
 
우리는 이웃이나 회사 동료와 반드시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이사 가거나, 회사를 옮기고 나면 평생 다시 안보기도 하지만, 있는 동안은 친하게 서로 도움을 주면서 잘 지낸다.
 
그래서 무관심한 관대함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을 남기지는 않지만, 어디에 가든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는 한다. 대신 이 사람들은 깊은 공감이나 특별한 관계를 맺는 행복은 느끼지 못한다. 또한 관심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결국 깊은 관계의 두 가지 면 행복과 불행 모두를 버린 것이 된다.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행복의 측면은 유지하고, 불행한 면을 버리고 싶어서 관대해지려고 하는데, 관대해지고 나니, 불행한 면은 없어졌지만, 행복한 면도 같이 날라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이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계를 맺으면서 느끼는 많은 감정들은 사실 서로 같은 것에 대한 단지 다른 해석일 뿐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새로운 차를 샀을 때 느끼는 질투심은, 내가 차를 샀을 때 남에게 자랑을 할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음과 같은 것이다. 친구가 차를 샀을 때 아무런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면, 차를 샀을 때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이것은 분리된 감정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못났다고 생각을 해서 우울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잘났다는 평가를 받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이 역시도 분리된 것이 아니다. 못남이 있기에 잘남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관대함을 가지면서 우리가 가졌던 원래 행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을까?
 
있긴 하다. 하지만 엄청나게 어렵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시도할 조건은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레벨이 다른 위치에 있거나,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시도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리고 이것이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끝없는 성찰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되면,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존재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관용적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맞다. 그리고 이 사실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꽤나 많다. 단지 인정을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의 성찰을 통해 자신을 관찰하면, 결국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관대함에 눈을 뜰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원래 관대할 수 있는 조건, 즉 상대의 처지를 공감해서 느낄 수 있는 관대함이 모든 존재로 확대되는 것이다.
 
모두가 불쌍하니,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거지인 셈이다. 모두가 거지이니 관대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거지들끼리 싸우고, 거지들끼리 뺏고 뺏긴다. 이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우리 스스로가 매우 비참하다. 하지만 사실 비참하지 않다. 사실 정말로 비참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다.
 
학교에 떨어진 수험생이, 부모에게 합격했다고 속이고 그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이다. 거짓의 삶,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비참함이다.
 
이렇게 얻어진 관대함은, 레벨이 다르거나, 무관심으로 인한 관대함이 아니기에, 타인에 대한 관심도 유지되고, 공감도 가능한 관대함이 된다.
 
그나마 평범한 우리가 관대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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