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의 비법

아이루다 2016. 1. 27. 11:28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참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다르고 또한 똑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각자의 성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물론 그렇게나 다양한 행복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는 보편적 행복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랑을 하거나, 가정을 이루거나, 아이를 키우는 일이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행운이 오거나, 하고 있는 일에서 성공을 한 경우 등이 그런 행복일 것이다.

 

하지만 이 보편적 행복이라고 해도 우리를 늘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단 처음부터 조건을 갖추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이뤄냈다고 해서 그것이 영속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행복은, 일단 사랑을 할 상대를 만나야 하고, 설령 만났다고 해도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있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권태가 찾아오고 그것으로 인해서 이별의 아픔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설령 사랑이 이뤄져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해도, 가정은 어느새 늘 반복되는 일상의 공간이 되고, 아이는 언젠가는 커서 자신만의 사랑을 찾고 가정을 이루면서, 부모의 품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큰 성공의 기억은, 당시에는 그 성공을 이룬 이들에게 아주 큰 기쁨을 가져다 주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것들은 그저 과거 한 때 화려했던 자신의 옛 이야깃거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렇듯이 우리가 보편적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얻고 유지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평생 동안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찾아서 헤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냥 평생 동안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어떤 비법은 없을까? 시기에 따라 조건에 따라 바뀌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 내내 변함없이 그리고 권태롭지도 않은 행복은 없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있다"

 

그것을 행복의 비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무튼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방법이다. 단지 우리들 대부분은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변함없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딱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게 관대해지는 것이다. 즉, 관대함만이 유일하고 지속적이며 변함없는 행복이 되어줄 수 있다.

 

유명한 철학자인 칼 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를 잘 살펴보다 보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이 말을 잘 해석해야 하는데, 그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느낄 때는, 보통 그 사람에게서 자신의 어떤 일면을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불만족스러운 어떤 모습을 상대에게서 느꼈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 같지만, 사실 너무도 명확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못한다.

 

쉽게 표현해서,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상대의 거짓말을 훨씬 잘 알아챈다.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상대가 거짓말을 할 줄을 상상도 못한다. 우리가 서로 거짓말을 하는지 아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새로 산 멋진 가방을 보면서, 누군가 그 제품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는, 사실 그 제품의 문제점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가방이 부러워서 질투하기 때문에 한 말이란 점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는 남자의 마음을 알고, 여자는 여자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의 딸에게 접근해오는 모든 남자를 의심하고, 여자의 여우 짓은 여자들만이 아는 것이다.

 

결국 상대의 어떤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가 싫다면, 그것은 그 싫은 부분이 이미 자신에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칼 융이 말한 것처럼, 상대를 싫어하는 이유를 잘 살피면,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해서 우리는 상대의 문제는 아주 쉽게 파악하면서, 자신의 문제는 좀처럼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칼 융의 조언은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그래서 결국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관대함은 결국 자신에 대한 관대함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일단 자신이 가진 수 많은 문제점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외부로 뻗은 수 많은 가시들을 모두 거둬들여야 한다.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타인을 향하고 있지만, 사실 그 가시들의 뿌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그것을 이용해서 타인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계속 자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거둬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열등감' 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이 생긴다.

 

즉, 타인에 대한 관대함은 결국 자신에 대한 관대함으로 이어져서, 결국 자신을 치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 동안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관대함은 잘못 적용되는 사례가 너무 많아서, 실제로는 관대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관대함으로 포장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영화 '300' 에서는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다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은 명언을 하나 남겼다. 그것이 바로 "나는 관대하다" 라는 말이다.

 

이때 그가 사용한 관대함이 우리가 잘못 사용하고 있는 관대함의 가장 흔한 예가 된다. 사실 그는 관대할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발 밑에 조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딱히 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무릎을 꿇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고 있는 관대함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관대함은 조건부이다. 우리는 조건 없는 관대함을 보여주기엔 너무도 부족한 존재이다. 아마도 조건 없는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 받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관대함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말은 사랑이나 자비로 다시 표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너무 고차원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관대함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이다.

 

우리는 건방진 태도의 거지에게는 적선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은 돕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모든 종류의 관대함이 적절하게 응답되지 않으면 그것을 거부한다.

 

이것은 무릎 꿇기를 원하는 페르시아의 왕이 가진 관대함이다. 달라 보이지만, 다를 것이 없다. 그 왕의 관대함은 오만함을 기반으로 했다고 해서 비판하고, 자신은 그와는 다르다고 우기고 싶겠지만, 실제로 둘의 차이는 전혀 없다. 단지 왕은 모든 이들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존재였고, 우리는 그런 왕이 아닌 것뿐이다. 우리는 무릎을 꿇는 대신, 고마워하는 태도를 원한 것이다.

 

무릎을 꿇는 것이 굴욕이라면, 고마워해야 하는 것도 굴욕이 될 수 있다. 동정을 받는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다.

 

"큰 인물의 넓은 마음에서 나오는 너그러운 관용은 타인에 대한 깊은 모멸에서 나온다. 우리가 개와 고양이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래서 우리의 관대함은 좀 고쳐져야 한다. 그리고 이 고쳐진 관대함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관대함은, 그를 통해서 나의 선함을 인정받는 행위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관대함은 타인을 이해하고, 결국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는 실천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는 용도로 관대함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아니, 아예 관대함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그리고 관대함을 베풀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멈출 필요도 못 느낀다. 즉, 실제로 행복하기도 하다.

 

하지만 변함없는, 영속적인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관대함의 정의는 다시 내려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하다. 이것을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해질수록 더욱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나 타인 모두에게 관대해질 수 있을 때, 진정하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면,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모습이 좋다. 그래야 힘든 고난을 견디고 목적을 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목적을 이뤘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에게도 관대해져야 한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할수록 불행해진다. 반대가 될수록 행복해진다.

 

불행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문제를 많이 꺼낸다. 지적하고, 비난하고, 편을 가른다. 사실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맞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꺼낸 이야기들은 모두 말을 하고 있는 당사자를 향한다. 즉, 결국 자신을 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참 떠들고 집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면, 자신이 그렇게 비난했던 대상이 눈에 보이게 된다. 이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자신에 대해 그렇게나 욕을 했으니, 어떻게 기분이 좋을 것인가? 또한 그런 비난은 훗날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도 영향을 미친다. 매일 같이 영화를 보는 사람을 시간 낭비한다고 욕했다면,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 어떻게 보러 갈 수 있겠는가? 결국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설령 하더라도, 누군가 '너는 예전에 그리 욕하던 것을 왜 하냐고' 물으면, 자신도 모르게 크게 화를 내게 된다. 그 사람이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는 뭔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영화들과 차별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 놓아도 모두 거짓말이다. 그냥 영화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만큼 남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래서 매일 남의 눈치를 보는 삶이 계속된다. 자기가 늘 남의 욕을 했다면, 누군가 자신의 욕을 하지 않을까 불안해진다. 사람들과 뒷담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빠진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어떤 뒷담화가 나왔을 지를 불안하게 여긴다. 그래서 어떤 자리라도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있기 싫은 자리도 버텨야 한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데 크게 일조를 한다.

 

행복하고 싶다면 타인에게 조건없이 관대해져야 한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관대함은 정말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영속적인 행복을 얻기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를 제대로 방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전체적인 과정을 통해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이 사실이기에, 적어도 제대로 된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도 나름대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돈을 훔쳐가려는 사람이나, 칼을 들고 찌르려고 하는 사람에게 관대할 수는 없다. 사실 그래서 우리는 관대함에 대해 명확한 한계점을 갖는다. 그럼에도 죽는 그날까지도 온전히 이룰 수 없을지는 몰라도, 관대해지면 관대해질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남에게 관대해지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관대해지면, 결국 관대한 남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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