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동일시

아이루다 2016. 1. 18. 10:56

 
우리가 흔히 하는 경험 중에, 지인들의 요청에 의해서 어떤 제품에 대한 소개를 해주거나 혹은 어떤 장소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새로 사려고 하는 냉장고, TV, 스마트 폰 등에 대한 정보일 수도 있고, 이번 주말에 방문하고 싶은 온천이나 산행에 대한 정보일 수도 있다. 그것에는 여행지나 음식점 등등 수 많은 종류의 것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상대의 요청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 중에서, 괜찮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상대가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소개를 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정보들을 상대에게 알려줄까?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바로, 어떤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이 꼭 물질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자신에 대한 호감이나, 좋은 정보를 줄 수 있는 가치를 가진 사람이란 인식 등만 얻을 수 있어도 크게 만족스럽다.
 
이 심리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알려주고 욕먹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사실 그런 경험은 자주하는 편이다.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다가 욕을 먹는다든가, 상대가 요청한 것도 아닌데 괜히 알려줬다가 욕을 먹는 경우가 있다.
 
물론 욕까지는 아니고, 그냥 불평이나 불만을 들을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겠지만, 아무튼 그럴 때마다 우리 머리 속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알려준 대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내 잘못인가?' 하는 불만이 섞인 생각과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왜 그 정보를 알려줘 가지고 욕을 먹지?' 라는 자책이 섞인 생각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그 둘 모두 어떤 종류의 불만이란 점에서 같지만, 하나는 상대에 대한 불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란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다른 점만 보면, 일단 첫 번째 불만인, 왜 상대는 내가 준 정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비판하는가 라는 것은 바로 그 정보와 우리 자신과의 연관성이 없음에 대한 강조하는 생각이다. 즉, 결정은 최종 자기가 해놓고서, 그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왜 나를 비난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그 정보와 우리 자신과 따로 놀아한다. 하지만 따로 놀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친구에게 어떤 주식이 많이 오른다는 고급 정보를 전달했다고 했을 때, 실제로 그 주식이 많이 올라서 친구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때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준 정보에 대한 생색을 낼 근거가 없다.
 
이런 식으로 친구가, 그것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원래 의도한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즉, 친구가 정보를 준 것은 준 것이고, 산 것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니, 둘이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말 그대로 삐친다. 아마도 친구와 절교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정보의 결과가 나쁘게 나와서 그것을 가지고 상대가 자신을 질책하면, 그것은 이상하게 여긴다. 좋은 결과를 분리하면 화를 내고, 나쁜 결과는 연관시키면 화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인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자책은, 어떤 시도를 한 결과가 나쁘게 나온 것에 대한 스스로 실망한 것이다. 즉, 우리들 스스로도 이미 그 정보와 우리들 자신을 충분히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아는 사람들에게 준 정보와 자신과의 관계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좋은 결과이든 나쁜 결과이든 상대가 자신의 성과를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아무런 생각이 없어야 하고, 더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책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나쁜 결과에 대해서만 빠져나가려고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상대에 준 정보와 우리들 자신을 말 그대로 '동일시'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어느 회사 냉장고가 더 좋은지에 대한 정보를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을까? 사실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더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 태생의 누군가가 해외에서 뚜렷한 활력을 펼치면, 그것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들처럼 된 듯 느낀다. 그래서 그들을 응원하고 심지어 후원도 하기도 한다. 또한 그들이 광고에라도 나오면, 그 제품을 더욱 선호하면서 산다. 깊게 관여될 수록 우리는 동일시를 느낀다.
 
이것은 각종 매체를 통해 도배가 되는 정치인, 스포츠 선수, 연예인 등등에 대해서 그렇다.
 
이것과는 반대로 해외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저지른 어떤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나, 매너 없는 짓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유명 관광지에서 한글로 써 놓은 이름을 발견한 기사나, 유서 깊은 장소에 가서 예의 없는 짓을 하다가 쫓겨난 일등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 그들과 우리들과는 전혀 모르고,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명백한 동일시 현상이다.
 
물론 이런 자부심이나 부끄러움은 그것을 통해 얻는 이득과 손해에 대한 기본적인 계산법이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니, 완전히 우리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질수록 혹시라도 외국에 나갔을 때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이미지가 나빠질수록 좋지 않는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고려해도, 우리가 느끼는 자부심과 부끄러움에 대한 감정은 너무 많다. 이득과 손해는 명시적이지도 않고, 실제로 해외 여행을 언제 하게 될지도 모르며, 그들이 쌓은 이미지가 과연 우리들 개개인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도 판단하기가 애매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거의 그 사람을 직접 아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한 감정을 느낀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거나, 너무 부끄러워서 한바탕 욕을 해야 할 듯이 느끼기도 한다.
 
이런 동일시 현상은 각종 모임, 소속 단체, 태어난 지역, 다녔던 학교, 심지어 살고 있는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각종 형태의 무리 짓기에 따라서 자부심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속한 단체와 자신과의 관계가 밀접하고 또한 바꾸기가 어려울수록 더욱 더 심해진다. 우리가 가장 바꾸기 힘든 것이 바로 소속된 나라와 태어난 가정이다. 그래서 이 둘을 통해서 일어나는 동일시가 다른 것들에 비해서 강력해진다.
 
회사의 소속감도 강한 편이지만, 회사는 옮길 수 있기 때문에, 한 회사를 평생 다닌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선에서 한계가 지어진다. 태어난 지역이나 졸업한 학교 등은 바꿀 수 없긴 하지만, 보통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정보이기 때문에, 스스로 밝히지만 않으면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자신과 그 지역이나 혹은 학교가 관련이 있다고 은근슬쩍 자랑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일시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그 어떤 관계보다 강하게 느낀다. 하지만 가족이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정도로 괜찮은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도드라져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의 가족이다. 다른 사람들은 기뻐해주긴 하지만, 가족만큼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아주 나쁜 범죄를 저질렀을 때도 역시 가족이 가장 크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가족은 단지 감정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여기엔 이득과 손해가 아주 크게 연관된다.
 
그래서 가족은 더욱 더 동일시 현상이 강력해진다. 그것은 단지 자부심과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적 동일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운명 공동체로써 이득과 손해를 공유하면서 더욱 더 강해지는 것이다.
 
결국 이런 동일시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동일시 여기는 많은 대상들이 사실상 우리와는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일시는 사실상 허상이며 착각이고 일종의 환상이다.
 
축구 선수가 해외에서 맹활약을 떨치는 것이나, 어떤 가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현상은 사실 우리들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있다. 있다면 오직 우리를 좀 더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동일시를 통해서 행복해야 할까? 이미 행복하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으니 행복할 필요가 있다.
 
왜 행복하지 않을까? 요즘은 돈이 행복의 주요 요소이니, 돈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짓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유명해서 충분히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기업은 이런 동일시를 이용해서 광고를 한 후, 더 비싸게 제품을 팔고, 광고에 나온 사람들은 광고를 찍었기에 직장이라면 몇 년을 벌 돈을 한 번에 벌기도 한다.
 
그래서 기업도 돈을 벌고, 동일시 대상들도 돈을 번다. 그런데 결국 우리는 그들을 응원하느라고 돈을 써서 행복해지긴 했지만, 결국 호주머니는 텅텅 비게 된다. 그리고 동일시로 오는 정신적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물질적으로 부족하기에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다.
 
이것이 무한 반복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환상 속에서 나름 행복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냥 어느 순간에 동일시를 멈추고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생각하고 살면, 사실 그 누구든 눈에 보이지가 않는다. 세계 기록을 세웠건, 노래를 얼마나 잘하건, 사실 우리와는 관련이 없다. 그냥 각자 사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수준의 관심만 가지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는 욕구로 인해 동일시를 넘어서 집착까지 발전한다. 자신의 삶을 거기에 맞추기도 한다. 사실 스토커가 그런 사람들이다.
 
또한 이 동일시가 가진 가장 나쁜 것은 바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될 수록 그 대상에 대해서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일시는 당연히 주관적 해석이다. 동일시 된 존재는 무조건 편을 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주관적 입장의 판단은 비판적 사고 기능을 막아 버린다. 그래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 많은 독재자들이 펼친 정책이 바로 '영웅 만들기' 이다. 영웅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일시를 할 수 있는 매우 좋은 대상이며,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객관적 판단력을 잃고 점점 국가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 시킨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며, 독재자들이 즐겨 쓰는 방법이다.
 
스포츠나 연예산업을 흥하게 만드는 것도 비슷한 원리이다. 그것들이 적절하게 제어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일 동일시 현상 속에서 초등학생 수준의 사고 능력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은 만화 영화에 나오는 로봇에 자신을 동일시 여긴다. 어른들은 단지 그것이 실제 사람으로 바뀐 것뿐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비웃는다.
 
여기까지 해서 우리들 자신과 외부의 동일시에 대한 것을 알아봤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정말로 중요한 동일시 하나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사실 이 말은 좀 어폐가 있긴 한데,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 가장 강력하게 동일시를 느낀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좀 철학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동일시는 다른 존재들이 하나로 느끼는 현상이다. 그래서 생각에 따라서는 분리가 가능하다. 국가와 나는 분리될 수 있고, 연예인과 나는 분리될 수 있다. 힘들지만 가족과 나도 분리될 수 있는데, 결코 나와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나와 동일시를 느낀다는 말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뭐, 100% 동일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비 상식적인 말을 좀 더 곰 씹어서 생각해 볼만한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동일시를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사실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국가와 지인과의 관계와 가족과 아무런 동일시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일이 가능하다.
 
우리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감정적 변화를 겪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메달을 따거나, 누군가 영웅적인 일을 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황을 볼 때도, 그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초연한 대처를 할 수 있다. 즉,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면, 당연히 그것이 가능하다.
 
물론 이러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좋은 쪽, 그러니까 자부심을 느끼는 쪽으로 작용하면 그나마 낫지만, 반대로 부끄러움 쪽으로 작용하게 될 때, 우리가 받는 상처는 꽤나 심각하다는 점에서 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설령 좋은 쪽으로 알려진, 자부심을 느끼더라도, 그것은 사실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대한민국 대표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딴 것은, 사실 우리 자신과는 거의 연관이 없다.
 
아무튼 만약 이때, 우리가 조금이라도 우리가 속한 그 어떤 종류의 관계와 조금이라도 덜 동일시를 느낀다면, 우리가 얻는 불필요한 자부심과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불필요한 부끄러움을 덜 느낄 수 있다.
 
이제 이 말을 그대로 확장해보자.
 
우리가 우리들 자신과 동일시를 조금이라도 덜하게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통해 얻는 자부심과 부끄러움에 대해서 조금 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책임을 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 여기는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재의 자신과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의 동일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사실 많은 것이 변화할 수 있다.
 
이때 과거를 통해 얻은 자부심이 줄어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했던 수 많은 종류의 실수에 대해서 스스로 매일 자책하는 일도 줄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름대로 근거도 있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하기 때문에, 과거에 저지른 일은 과거의 내가 저지른 것이지 현재의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 물론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와 나와의 관계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불필요한 실망을 줄일 수도 있다.
 
동일시가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우리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비난을 더욱 더 심하게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자부심을 느낄 때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늘 성공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힘들다.
 
그리고 더해서 많은 사람들은 완벽주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백 가지 잘한 일이 있어도 한 가지 실수만 저질러도 그것을 인해 밤잠을 설치게 되고, 평생 마음 한 구석에 생채기가 난 상태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덜 괴롭고, 더 행복하고 싶다면, 우리 자신과 또한 자신을 동일시 여기는 것에 대해서 조금 깊은 성찰을 해봐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 괴롭힐 필요가 없다. 특히나 과거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과거의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자꾸 동일시 여기면서 후회하고 자책을 한다. 현재의 자신과의 동일시는 멈추기 힘들지만,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분리하는 것은 조금 쉽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의 자신과의 동일시도 조금 느슨하게 할 수 있다. 사실 현재의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우리들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그냥 태어나졌다.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인 외모나 성격이나 능력은 이미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부모가 물려준 외모와 부모가 물려준 신체적, 지적 능력은 거의 고정되어 있다. 성격 역시도 어린 시절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은 이미 선택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런 자신과 스스로를 동일시 여긴다.
 
사실 이것은 거의 외부 사람과 같다. 그들 역시도 그들이 해낸 어떤 일에도 우리 자신이 관여하거나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동일시 여기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어떤 선수가 메달을 땄다면, 그의 노력의 결과가 거의 100%이다. 우리는 고작 응원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선수는 그 선수의 부모가 물려준 신체적 능력을 최대화시킨 것이다. 그 역시도 자신이 타고난 것으로 대부분 이뤄낸 것이다.
 
메달을 노리는 선수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한다.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거의 이미 고정된 능력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노력으로 극복한다고 해도, 노력하는 성격도 이미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마치 스스로 모두 만든 듯 동일시 하고 있다. 그래서 잘하면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하고, 못하면 자기가 못한다고 여긴다.
 
물론 이 말은 맞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여지는 있다. 그래서 이런 한치의 틈도 없는 동일시에서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불필요하게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덜 스트레스 받게 해줄 수도 있다.
 
물론 그로 인해서 성공했을 때 얻는 행복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이뤘을 때, 그것이 자신과 큰 연관이 없다고 생각되면, 우리는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겸손함은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 즉,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준다. 그러니 줄어든 행복만큼 다른 행복이 채워질 수도 있고, 더해서 이런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줘서 더욱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자신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보자는 것은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거의 절대적 한계를 벗어나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사실 이것은 지금의 설명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개인적인 능력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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