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의 정신 영역과 행복 - 1

아이루다 2016. 1. 15. 08:51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인간의 정신 세계를 세 가지 영역, 즉 이드, 에고, 슈퍼에고로 구분한 이래, 이 구분 방식은 꽤나 신빙성 있게 또한 다양한 방면에서 유용하게 응용되어 왔다. 물론 지금도 이 이론을 정확히 증명할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 세계를 그렇게 단편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무튼 이 분석 방법이 틀렸거나 맞거나 상관없이, 인간을 정신 세계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보는 방법은 꽤나 유용하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드, 우리말로 하면 본능 정도에 해당되는 말 그대로, 본능은 식욕, 수면욕, 배변욕, 성욕 등을 느끼는 영역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원래 주장은 이 표현과는 조금 다른 식으로 정의하긴 했는데, 그냥 대충 이 정도로 이해하는 것도 괜찮다 싶다. 이런 행동들은 생명체 본질적 욕구로써 인간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류의 생명체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에고는 우리말로 하면 자아에 해당되는 말로, 본능을 제어하는 나름대로 의식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자아를 통해서 자신이 자신임을 인식하다. 그래서 에고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의식이 강하다는 뜻이 되며, 스스로 존재적 확신이 강하다는 의미가 된다.
 
슈퍼에고는 우리말로 하면 초자아에 해당되는 말로, 도덕, 양심 등과 관련된 부분이다. 우리는 보통 자아를 통해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고, 극단적인 자신만의 이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초자아는 이때 그 한계점을 긋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을 하거나 이득을 얻기 위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들을 제어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냥 보편적이고 개인적으로 이해한 수준에서 서술했다. 그런데 이 세 단계 분류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기반으로 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이드는 자기 혼자만의 영역이다. 물론 성욕은 상대가 필요하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준의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냥 성적 역할로써만 제한된다. 그리고 나머지 식욕, 수면욕, 배변욕은 알다시피 혼자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유일하게 식욕은 남들과 함께 해도 좋은 것이다. 우리는 이런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을 통해서 아주 큰 행복을 얻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사람이 모이는 장소엔 반드시 먹을 것을 함께 즐기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우리의 똥에서 향기가 나서, 똥을 싸는 것을 같이 할 수 있었다면, 인간의 다양한 문명에서 똥싸는 모임이 활성화 되었을지도 모른다.
 
에고는 기본적 본능을 넘어서, 자신을 자신으로 인식하는 단계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교 대상이 되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에고는 원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 본 그 어떤 경험도 없는 사람이라면, 결코 에고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해도 어린 아이들에게는 에고가 아주 약하거나 아예 없다. 원래 인간의 에고가 극단적으로 발달하는 시기를 바로 사춘기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춘기를 스스로 인식할 정도로 겪지 않는 사람들은 보통 일반적으로 에고가 약하다. 혹은 어릴 때부터 너무 강해서 아예 사춘기조차 겪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에고는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크게 차이가 나고, 에고가 강할수록 사는 것이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을 밀어 붙이는 힘이 강해서, 힘듦을 참고 의지적으로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얻어내어 행복을 쟁취할 가능성도 높다.
 
슈퍼에고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집단 의식의 영역이다. 물론 이 영역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실체가 없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도덕을 정의하고, 양심을 가르친다. 즉, 우리는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해도, 결국 슈퍼에고를 구성하는 개념들을 교육을 통해 개개인에게 주입하고 있는 중이다.
 
이 역시도 에고와 동일하게 인간 사회에서 자라 교육 받지 않는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영역이다.
 
본능은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타고나는 DNA에 새겨진 영역이다. 그래서 사람 별로 각각 선호도 차이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본능적 욕구는 존재한다. 식욕이 강한 사람, 성욕이 강한 사람, 수면욕이 강한 사람, 배변욕이 강한 사람은 존재하지만 각각이 아예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능은 제어하거나 숨기기만 가능할 뿐, 이것을 제거하거나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억제시키는 것만 시도할 때조차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금욕은 매우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나마 외부에서 주입되는 약물 등을 통해서 하는 방법도 있다. 아무튼 이 영역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에고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절 가능하다. 심지어는 거의 불가능하긴 하지만, 없애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에고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어떤 어떤 존재이다' 라고 정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 정의의 결과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어려운 일을 해내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희망사항이기 때문에, 현재 실제의 자신과 에고가 바라는 자신의 차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커진다. 그래서 결국 불행하게 된다.
 
에고는 이렇듯 행복과 매우 큰 연관이 있는 영역이다. 물론 본능도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깊은 행복은 주로 에고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 착시현상이긴 하다.
 
본능은 욕구를 생성시키는 주체이고, 에고는 욕구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그 어떤 행복도 결국 본능적 차원에서 발원한다. 하지만 대충 보기엔 에고의 영역에서 마무리 되기 때문에, 마치 행복이 에고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듯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에고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또한 타인들에게서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사실 에고가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럴수록 본능이 요구하는 것을 좀 더 잘 이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을 먹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을 벌려면 잘날수록 더 유리하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잘 받을수록 유리하다.
 
이 과정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도대체 의문를 가질 여지도 없다. 그런 면에서 에고는 본능의 노예와 같다. 에고는 본능이 원하는 것을 이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가진 감정적, 이성적, 신체적, 지적 역량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본능의 욕구를 충족시킬 가능성이 높이려고 애쓴다.
 
결국 우리는 평생 본능의 욕구를 추구하기 때문에, 평생 동안 에고의 영역에서 사로잡혀서 산다. 즉, 자신의 존재 이유, 자신의 존재의 가치, 타인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죽기 직전까지 노력한다. 심지어 죽은 후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뭔가 인류사적 업적을 남기려고까지 한다.
 
아무튼 에고가 강할수록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의지가 강해지기 때문에, 능력만 된다면 결국 이뤄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의식' 이라고도 하는데,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 비해서 일반적으로 행복하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은 보통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행복을 얻는다. 밥을 먹는다든지, 무엇인가를 만든다든지 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행복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서 행복하긴 힘들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런 휴식을 취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어떤 성과를 최근에 이미 냈을 때나 가능하다. 주중에 일을 해야 주말에 쉴 수 있다.
 
아무튼 어떤 일을 할 때, 사람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이 된다.
 
첫 번째는 그 일이 좋아서 하는 경우이다. 맛있는 밥을 먹는 것은 보통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나무를 다듬어서 목재 가구를 만드는 일이나, 자전거를 열심히 타서 몸의 건강함을 높이는 일은 누구나 그것이 좋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한다면, 그것을 좋아해서 하는 경우가 가장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떤 것을 하고 싶어서 한다는 의미가 강한 에고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이런 경우 에고는 약해지게 된다. 아니 거꾸로 말하면,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에고를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적다.
 
이들은 이미 충분히 행복하기에, 더 행복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행복하고 싶어하는 에고가 강해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결국 에고가 낮다. 그리고 이 낮아진 에고는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줘서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즉, 목표로 하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 사이의 차이가 거의 없어져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두 번째는 그 일이 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속한 사람들은 에고가 무척 강하다. 이들은 보통 자신이 어떤 특별한 존재이길 바라기에, 그에 합당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평생을 매달린다.
 
그러나 성공하면 큰 만족감을 얻지만, 실패하면 큰 좌절을 겪으면서 힘들어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것은 도박이다. 이들은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에고가 강한 사람은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가능하면 최대한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단점으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치에 대해서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최고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에고가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목적 자체가, 자신의 잘남을 증명 받고자 하기 때문에, 당연히 처음부터 스스로 최고라고 인정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목표로 하는 가치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가치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예상치 못하게 타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하찮게 여기는 것으로 잘못 적용된다.
 
그래서 이들은 타인과 끝없이 충돌한다. 사회 정의의 가치, 법의 가치, 목숨의 가치, 가족의 가치, 국가의 가치, 사랑의 가치, 관계의 가치, 고문서의 가치, 문화재의 가치, 자연의 가치, 지구의 가치, 돈의 가치, 취미의 가치, 일의 가치, 결혼의 가치, 육아의 가치 등등을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로 정하고는, 다른 이들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대립한다.
 
세 번째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마치 두 번째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이 경우엔 반대로 에고가 무척 낮다. 이들은 두 번째 경우에 속한 사람들처럼 그것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가치를 느끼거나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 등이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그저 살기 위해서 그것을 하고 있다.
 
그리고 보통 이들이 하는 일들은 사회적으로 그다지 가치 있다고 인정되는 일도 아니고, 돈도 많이 못 버는 경우가 흔하다. 설령 돈을 많이 벌더라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종류의 일을 하게 되면 비슷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아무튼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 세 가지 경우 중에서 가장 불행하다. 이들은 사실 행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냥 사니까 산다. 인생의 뚜렷한 목표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별로 없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에는 결국 능력 부족의 문제가 있다. 즉, 원래 이들도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무리한 목표를 정하거나, 혹은 타고난 능력이 너무 부족해서 무엇을 해도 잘 안 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자의식 자체가 찌그러진 것이다. 그래서 포기하고 마냥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유형으로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타고난 사람들이다. 누구나 달리기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은 두 번째 유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에고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에고는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회복되지 않는다. 에고는 성공을 해야 회복된다. 그래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성공이다. 작은 일부터 조금씩 시도를 해서 성공하게 되면 결국 언젠가는 큰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주변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삶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행복하게 사는 길을 알려주는 많은 서적들은 보통 에고를 버리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이 책들은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에게 에고의 좌절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행복한 것을 찾으라는 조언을 해주고 있다. 사실 첫 번째 유형이 가장 행복하게 살수 있기 때문에, 이 조언은 유효하다.
 
하지만 이 조언을 세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이 들으면 아주 웃기는 소리로 들린다. 그것은 마치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파 죽겠는데, 고기보다는 야채가 몸에 좋으니 야채를 먹어야 한다는 소리와 같이 들린다. 에고가 없어서 불행한데, 버리라고 하니 황당하다. 그래서 분명히 중요한 조언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이론적인 이야기나 혹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리로 밖에 이해되질 않는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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