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생명의 소중함

아이루다 2016. 1. 4. 15:08

 
인권이란 말이 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졌다는 천부설로부터 인간들끼리 약속한 것이란 계약설에 상관없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름대로 문명화를 이룬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되고 있다.
 
인권은 말 그대로 인간의 권리이다. 그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누구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자신의 목숨을 지킬 권리가 있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타인의 목숨을 뺏을 권리가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후로 많은 세세한 것들이 달라 붙는다. 거기엔 자유, 의무, 선호, 기호, 추구, 꿈, 방향, 사상, 종교, 선택 등이 채워져 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우리는 타인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복잡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어,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 인간의 생명 가치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다고 믿고, 많은 논쟁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엄숙한 얼굴로 혹은 슬픈 얼굴로 '생명의 소중함'이야 말고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우리들 모두는 정말로 인간의 목숨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에 온전히 동의할까? 아니면 상황에 따라서,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까?
 
2004년도에 인도양에 거대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도 9가 넘는 이 해저 지진은 거대한 쓰나미를 발생시켰고, 그로 인해 다수의 사망자가 생겼다.
 
이보다 조금 먼저 2001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최악의 테러가 발생했다. 일명 911테러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전 지구적인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물론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없다. 약 3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사건으로, 하나는 자연 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이다. (미국인들의 분노와 달리 911 테러에 대해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다양한 음모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범죄를 정말로 누가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확실해질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에게 이 두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면, 911 테러에 대해서 조금 더 잘 알고 있는 편이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그런 면이 있다. 단순히 위키 백과만 검색해봐도 인도양 쓰나미에 대한 기록은 10줄도 채 되지 않는 반면, 911에 관한 기록은 몇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되어 있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건의 피해자 수는 각각 몇 명 정도일까? 인간의 생명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면, 피해자 수만 봐도 이 두 사건의 무게가 달라질 것이다.
 
2001년 911 테러의 피해자 수는 대략 3,500 명 정도로 알려졌다. 물론 재산피해는 대단했다. 세계 무역센터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렸으니 말이다.
 
2004년 인도양 쓰나미 피해자 수는 280,000 명이다. 28만명이다. 이 두 사건의 피해자 수의 비율은 100배 정도 차이가 난다.
 
아마도 인도양 쓰나미 사건에 별 관심이 없었던 분들은 깜짝 놀랬을지도 모른다. 28만명이라니.. 우리나라로 따지면 웬만한 도시 급 인구가 사망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년에 태어나는 아이의 숫자의 반 이상이 죽은 것이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인식 차이는 한 사건은 자연 재해이고, 다른 한 사건은 인간이 저지른 범죄라서 그런 차이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두 사건은 일어난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듯 하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일어난 대형 자연 재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2005년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사망자 수는 1만 명 수준이라고 한다. 이 역시 쓰나미 피해자 수에 비교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인식과 쓰나미에 대한 인식의 차가 죽은 사람의 숫자만큼인 28배에 이를까? 슬프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끔찍한 테러가 벌어졌다. 그리고 각종 SNS에서는 'Pray for Paris' 라는 문구가 유행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쓸 때는 조심해야 하는데, Pray 를 Play 로 잘못 표기했다가 무 개념 여자로 낙인 찍인 연예인도 있었던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행위를 비판했고, 희생자들을 위로 했다. 그런데 이런 흐름과 비슷하지만 다르게 'Pray for Humanity' 이란 문구가 튀어 나왔다. 그것은 이라크, 시리아 등등에서 매일 파리 테러 당시에 죽은 사람 숫자 이상의 사람들이 테러로 죽고 있는데, 선진국 사람이 죽을 때만 위로를 하느냐는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파리를 위한 기도' 가 아닌, '인류를 위한 기도' 라고 바꿔야 한다고 했고, 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었다.
 
사실 이런 사건들의 해석 차이는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생명의 소중함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점을 방증하고 있다. 같은 목숨이라고 해도 선진국 목숨이 더 소중하게 다뤄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돈과 깊게 연관된 곳일수록 더 많은 집중을 받고, 그로 인해서 더 많은 정보가 생성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비 인간적인 것일까? 정말로 그럴까?
 
아마도 많은 종교 관련자나 인문주의자들은 '그렇다' 라고 답을 할 것이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그 권리가 천부적이든 인간간의 계약이든 상관없이, 우리 인간의 목숨은 소중해야 한다.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가는 존재들은 소중해야 한다. 무생물이라도 상관없다. 지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란 말인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남을 평가한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머리 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다는 척만 할 뿐이다.
 
그나마 우리가 남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때는 거의 비슷한 경험을 했을 때이다. 아이를 잃어 본 사람이 아이를 잃은 사람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부모를 잃어 본 사람이 그 일을 당한 사람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타인의 목숨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이 중요할 때, 타인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내 목숨을 중요하고, 타인의 목숨은 덜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반대로 될 수는 없다. 내 목숨은 덜 중요하고, 남의 목숨이 더 중요하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잘해야 내 목숨과 타인의 목숨을 동급에 두거나, 대부분은 자신의 목숨을 더 가치 있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신의 목숨이 지닌 가치를 동일하게 판단하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똑같은 수준으로 자신의 목숨을 중요하다고 여길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최근에 본 영화에서(별로 재미가 없어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총으로 위협을 한 채, 손가락을 자신의 이빨로 물어 뜯어낼 수 있다면 살려주겠다는 협박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남자는 공포 속에서 엄지 손가락을 입 속에 넣지만, 결국은 고통으로 인해 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영화화 한 작품도 있었다. '172시간' 이름을 가진 영화였던 것 같던데, 아무튼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살기 위해서 다리를 자를 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마도 사람마다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손가락을 물어 뜯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냥 죽고 말 것이다. 누군가는 다리를 자를 것이고, 누군가는 포기한 채 죽어갈 것이다.
 
물론 이것을 단지 생명에 대한 가치 기준점 차이로 볼 수는 없다. 이것은 고통에 대해 견디는 힘, 공포에 대항하는 의지의 차이로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큰 차이라면, 생존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 이루고 싶은 욕망 등을 통틀어서 구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결국 우리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서로 다르게 느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을 확장하면, 우리는 자신을 기준으로 타인의 생명의 중요성을 판단하기에, 사람마다 서로 다른 기준으로 타인의 목숨이 지닌 가치를 평가하게 된다.
 
여기까지 해서 대략적으로 생명에 대한 소중함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최종 결론은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이것에 대해서 반발심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별 상관이 없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어떤 신흥 국가의 독재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정권 유지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반발하는 특정 종족을 말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이미 수 십만 명의 사람을 죽였으며,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독재자가 병에 걸려서 입원을 했고, 당신에게는 이 사람을 치료할 기회가 있다고 치자. 당신은 아무도 몰래 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그를 치료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을 치료하면, 그 후 수 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한 사람을 죽이면, 한 사람만 죽지만, 그 사람은 우리 자신이 죽인 셈이 된다.
 
물론 치료 방법을 몰라서 죽인다면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점점 치료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치자. 이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때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다수의 사람은 사실 이 문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독재자이든 아니든 그냥 일반 환자 치료하듯이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 독재자가 치료 후에 고맙다고 지불해주는 추가적인 비용을 받게 될 것이다.
 
이때 이런 선택을 한 사람들은 사실 이 문제를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았기에 가능하다. 그것은 의사로써의 의무나 혹은 생명의 소중함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그냥 직업자로써 능력이 있으니 치료를 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감사를 하는 상대의 성의를 받은 것뿐이다.
 
그리고 아주 소수만이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할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 아니면 모른 채 생명의 소중함을 선서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때 독재자를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은 나중에 그 사실이 알려지면 아마도 의사 면허를 뺏길 것이다. 더해서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생명을 지켜야 할 의사가 환자를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면, 이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들은 어떻게 감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공감은 되지만 결코 허용되지 않는 것이 바로 '안락사' 문제이다. 사실 안락사는 이것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 단지 그때는 환자 스스로 죽음을 원했다는 사실만 다르다.
 
아무튼 독재자를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그들은 과연 그 의사만큼의 고민을 했기에 그렇게 비난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중 대부분은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치료를 하고, 추가 보상을 챙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독재자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문제로 고민조차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이 이 의사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소중함일까?
 
사실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TV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경기에 실제로 참여중인 선수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 붇는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그 경기에서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이기고 싶은 사람은 바로 그 선수들 자신이다. 그들은 TV를 보다가 지면 기분이 나빠서 리모컨을 던지는 수준이 아니다. 그들에겐 직업이 달렸고, 가족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틀린 명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적어도 그것을 위해서 깊은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말로 가볍게 다뤄져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충 판단되어서 평가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사람들의 존재가 드물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말로만 설명될 뿐인 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말을 한다. 너무도 쉽게 판단을 한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단정짓는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 어떤 경우라도 해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툭하면 논쟁에서 이것을 가져다가 쓴다. 영화로 가볍게 만든다. 별다른 고민도 없이 너무도 쉽게 한쪽 손을 들어 준다.
 
혹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생명은 그다지 소중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특히 남의 생명은 그렇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은 소중하지만, 타인의 목숨은 그에 비하면 너무도 별 것 아니라고 믿는다. 그래서 병에 걸려서 살고 싶다면, 심장이, 신장이, 간이, 폐가 어떤 경로로 입수되었는지 상관없이 이식을 받을 수 있다면 돈을 지불하려 한다.
 
직접 간, 심장, 신장, 폐를 적출한 것이 아니니,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불법 사이트에서 영화를 다운로드 받으면서 약간의 돈을 지불했으니 합법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생명의 소중함을 절대적으로 주장하거나, 생명의 소중함은 오직 자신이나 가족에게만 유효하다고 믿는 사람들 모두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다른 것 같아도 같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정말로 깊은 성찰을 해보지 않았기에 그리 쉽게 답을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이 소중하든 아니든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는 동일하다.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진짜 문제는 이것에 대해서 단 한번도 제대로 깊게 생각해본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정신 영역과 행복 - 1  (0) 2016.01.15
행복마다의 가치  (0) 2016.01.11
행복하고 싶다면  (0) 2015.12.28
선한 것과 악한 것 - 2  (0) 2015.12.16
선한 것과 악한 것  (0) 2015.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