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하고 싶다면

아이루다 2015. 12. 28. 10:32

 
실제로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지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나눴을 때,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각각 행복에 대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일단 첫 번째로 행복한 사람들은 이미 행복하기 때문에, 딱히 행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단 그러기가 쉽다. 인간은 원래 풍족한 것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고, 주로 부족한 것에 대해서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불행한 사람, 정확히 표현하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정말로 불행한 사람까지, 대체적으로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이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구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더해서 꽤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일단 첫 번째, 가장 흔한 답을 보자. 이들은 무의식 중에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행복하기 위해 추구하는 방법들이 주변 환경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즉, 어떤 시대에, 어떤 공간에,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냐에 따라서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계속 바뀐다. 그나마 이 환경이 일정하게 유지되면 꾸준하게 뭔가를 할 수 있지만, 변화가 심하면 끝없이 같이 변하게 된다.
 
이것을 좀 간단히 표현하면, 행복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행복을 복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하면서 행복한가를 기준으로 한다. 즉, 주변에서 등산을 하면 자신도 하고, 주변에서 노래방을 가면 자신도 간다. 그나마 따라 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그것을 할 때 아무런 행복을 얻지 못하거나 심지어 싫은 경우뿐이다.
 
이들은 친구, 동네사람, 친척, 회사사람, 심지어 전혀 모르는 TV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동까지도 복사를 한다. 그들이 여행을 하면 여행을 떠나고, 요리를 하면 요리를 한다. 옆 집 사람이 좋아 보이는 제품을 사면, 그것이 필요한지 않은지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을 산다. 사야 할 쥐꼬리만한 이유라도 만들어서 말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그것이 행복하다 싶으면 무엇을 따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자신은 언제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산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무엇인가에 돈과 시간을 쓰려면 이유가 필요하기에, 남들이 설명해준 이유를 외워서 말하는 것이 익숙하다.
 
왜 그 냄비를 샀는지, 왜 그곳에 여행을 가려는지, 왜 그것을 하려는지 물어보면 그럴듯한 이유는 수 없이 많이 설명하지만, 정작 그 이유들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사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진짜로 행복한 일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은 전혀 아깝지도 않고, 남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행복함에는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로 행복하지 않았다면 이유가 필요하다. 더해서 가치까지 있다면 좋다.
 
한정된 돈과 시간이라는 중요한 자원을 낭비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에 합당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자꾸 엉뚱하게 자신이 느끼지도 못하는 것을 설명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상관없이 그런 소비를 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단지 소비된 돈과 시간만큼은 행복을 얻지 못한 것만이 문제일 뿐이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남이 그럴듯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복사를 했기 때문에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행복 복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두 번째 유형이다.
 
두 번째 유형이 사람들은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의 패턴인,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행복에 대해서 비판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다. 즉, 남들이 하면 따라 하는 형태의 행복 추구를 거부하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경멸하기 까지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징을 쉽게 설명하자면, TV를 볼 때 드라마보다는 뉴스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설령 드라마를 보는 것이 재미가 있더라도, 그런 것을 봐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 비해서 주변 영향을 훨씬 덜 받는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대안으로 선택하는 행동 역시도, 단지 그런 선택과 행동이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해주기에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완전히 똑같다.
 
즉, 이들 역시도 달라 보이지만, 사실상 첫 번째 유형과 동일하게, 모든 사람들은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조차 인식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얻었는지 모를,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그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사실상 다른 이들의 눈에 이들의 모습은 어거지 똥고집에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만 인식될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비난하고 경멸하는 첫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과 그들 자신이 사실상 전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들을 비판하지만, 사실상 자신은 돈을 쓰는 행복보다 돈을 아끼고 저축하는 행복이 더 크기에 그런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돈은 쓰는 행복도 있고 모으는 행복도 있는데, 자신처럼 돈은 절약하는 것만이 행복으로써 가치가 있다고 우기는 것이다. 하지만 돈을 쓰지 않을 거라면 왜 모으려고 할까? 죽어서 유산으로 남기려고 그러는 것일까?
 
이제 세 번째로 가보자. 첫 번째 유형과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남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거나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결국엔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즉, 아무리 따라 하고, 홀로서도 결국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행복하기 위해서 많은 무의식적인 노력을 하다가 우연이 어떤 힌트를 얻는다.
 
그것은 누군가 적어 놓은 책이나, 방송에 나온 강사가 하는 말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아무튼 우리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아주 단순하고 쉬운 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행복에 대한 무의식적 추구에서 벗어나 의식적 추구를 하게 된다. 이들이 세 번째 유형이다.
 
세 번째 유형은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과는 조금 다르다. 이들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남들의 평가에 상대적으로 보다 자유롭다. 즉,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결국 행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끝없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따라 하거나 혼자서 잘난 척 하면서 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이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꽤나 난제이다. 그나마 개그 프로그램을 볼 때는 쉽게 즐거워졌는데, 이젠 스스로 행복한 것을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고, 남들이 보는 것을 보고, 남들이 사는 것을 살 때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젠 무엇을 하든 스스로 생각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그것이 정말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다 보면, 좀처럼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들 중 그것을 찾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반면, 찾지 못한 사람들은 혼란스러움에 빠져서 끝없이 행복을 찾아 다니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들 모두가 스스로 행복에 대한 자각을 하고자 해서 이 유형에 속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이 유형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유형에 속했지만, 결국 남들을 따라하기 조차 버겁거나 혹은 아무리 따라해도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가능성이 높다.
 
즉, 이들 대부분은 첫 번째 유형의 탈락자인 셈이다. 슬픈 일이지만, 돈이나 시간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남들의 행복조차도 제대로 따라 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주로 자기 위로를 해주는 것들에 매달린다. 그래서 주로 위로나 가벼운 질책을 하는 글이나 강연 그리고 책을 본다. 즉, 힐링을 원하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에 이런 종류의 인문학 서적들에 대한 높은 판매량은 우리나라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남의 행복을 복사하면서 살아가는 것 조차도 힘들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세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불행함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란 점을 확인 받으려고 애쓴다. 즉, 어떤 노력을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니, 인생은 행복하기 보다는 불행한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믿으려고 한다.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조언을 통해 작은 위로를 받으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리고 이들 중 극히 일부는 이제 네 번째 유형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바로 인식된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유형이다. 이들은 행복에 대해서 인식 단계를 넘어서 자각의 단계로 넘어간다.
 
쉽게 말해서, '행복하고 싶다' 라는 욕구에서 '우리 인간은 왜 행복을 추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차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유형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세 번째 유형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유형은 지금 행복한 사람도, 첫 번째,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 유형은 '왜' 라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지만, 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유형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행복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를 통해 나온 결과들은 다양한 형태로 타인들에게 전달되면서 영향을 끼친다. 이들이 분석한 인간에 대한 본질적 이해는, 특히 세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에게 크게 반향이 된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저자나 말하는 자가 되고 세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주로 독자나 듣는 자가 된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오랜 시간을 생각하고 고민해도, 우리는 왜 행복 하려고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유일한 답은 '생존하고 싶어서' 라고 밖에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누구나 살아야 하기 때문에 행복하길 바란다.
 
생명체가 생존하는 것 자체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의미를 갖고 싶어하고, 사는 이유를 가지고 싶어한다. 즉, 가치 있는 삶을 원한다. 우리 인간들이 자신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치는 이미 너무 높다. 우리는 뭔가 좀 더 그럴 듯 한 것을 원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두 가지 결론으로 나뉜다. 하나의 결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으니 그냥 가치는 스스로 부여하면 된다고 것이다. 나름 좋은 결론이다.
 
충분한 시간에 걸쳐서 사유를 한 후, 결론으로써 진실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어진 삶을 최대한 행복하고 풍요롭게 채우려고 노력한다. 단,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기 때문에 불필요한 욕망을 추구하거나 혹은 세상의 흔들림에 쉽게 동조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고요하게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결벽증이나 완벽성 추구 등을 이유로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행복 하려고 하는 이유가 납득이 안 되는 유형이다. 이들은 소위 염세주의자나 비관주의자로 칭해지기도 한다.
 
이들은 삶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끝없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들이 하는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불행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처음엔 참신하게 듣다가 나중엔 점점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비관주의자들은 그나마 자신을 유일하게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의 비관적 주장을 끝없이 남들에게 이야기 해서 자신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끝없이 말을 한다. 끝없이 주변에 이야기하다가, 잘 들어주지 않으면 글을 쓰고, 책을 낸다.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갈 행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인식하고 자각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자신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결국엔 참아내지 못하고 자살로써 삶을 마감을 하는 이들도 있다.

  

다섯 번째 유형도 있긴 하지만, 이 글에는 어울리지 않기에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여기까지 설명한 네 가지 유형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행복할 가능성이 있는 유형은 첫 번째 유형 중에서 운 좋게 남들처럼 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얻게 된 사람들일 것이다. 돈을 좀 더 벌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돈만 있어도 남들 하는 것 대부분은 할 수 있다. 소비뿐만 아니라, 결혼, 육아 등등도 모두 돈이 있으면 가능성이 높아진다. 말 그대로 평범한 삶이 주는 행복인 셈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가 왜 이렇게 돈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적어도 돈만 있다면 다른 이들의 행복을 복사하는 수준의 행복이라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우연하게 거기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유형은, 네 번째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첫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과는 달리, 행복은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법을 익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돈이 훨씬 덜 필요하다. 이들은 단지 앞산을 매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갔다 온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유형 이외에 나머지는 평생을 행복하지 않거나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슬픈 일이지만,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그나마 네 번째 유형에 속한 행복한 사람의 삶은 물질적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람들이 선택 가능한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의 행복은 돈이 많이 든다. 끝없이 사고, 끝없이 여행을 가고, 끝없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고리를 끊고 사지도 않고, 여행도 가지 않고, 죽지 않을 정도만 먹으면서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방법이 바로 이 네 번째 유형의 삶이다.
 
삶의 가치를 남이 정해주지 않고, 남을 따라 하지 않고 스스로 만드는 것, 이것이 가장 실현 가능한 행복 법이다. 문제는 우리는 그런 삶을 사는 훈련이 너무 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냥 남들이 하는 것을 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결정한 경로가 단 하나도 없다. 학교, 취업, 결혼, 육아 등등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없다. 그냥 모두 그럴 때가 되었고,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남들이 하기에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는 운 좋게 행복한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얻어 온 남의 옷처럼 잘 맞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그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얻어 입을 남의 옷조차 없는 사람들도 많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옷을 이해하고 재단을 하고 바느질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결코 공짜로 얻어질 수 없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노력할 때,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럼에도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행복하지 못하다면, 행복하기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통해 행복한지, 더 나아가서 인간은 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가능성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복잡함은, 행복할 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지게 된다. 이 순간에도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지고,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끝없이 분노하면서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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