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선한 것과 악한 것 - 2

아이루다 2015. 12. 16. 11:07

 
지난 글에서 인간은 왜 절대적 기준을 가진 선함이나 진리를 가질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했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는 비록 그런 인간이라고 해도 혹시나 절대적 기준을 가진 선함이나 진리를 가질 수 없을까에 대한 내용을 쓸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미 지난 글에서 말했듯이, 어떤 가치가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득과 손해를 기반으로 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생명체인 인간의 한계로 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뭔가 기준점을 갖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아주 조그만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과거 오래 전 그것을 해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를 창시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말했고, 그것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말했다. 그래서 절대적인 기준점을 가진 선과 진리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이 글은 종교에 대한 글이 될 수 밖에 없다. 종교 이외엔 어느 곳에도 신이 존재할 수 없다. 지금부터 종교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것이다.
 
처음 언급할 종교는 가톨릭, 개신교 등으로 구분되는 기독교에 대한 것이다. 이 두 분파는 달라 보이지만, 사실 뿌리가 같은 종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종교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구약을 공유한다.
 
요즘 국제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중간에 낀 이스라엘의 유대교의 관계는 사실은 동일 신을 믿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아무튼 이것은 오늘 이야기 할 얘기는 아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성경의 구약과 신약은 사실 다른 종교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약은 유대인의 민족 설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비록 기독교의 진정한 시작이 된 예수의 존재가 자신의 뿌리인 구약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절대적 진리의 삶을 설법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시대적 배경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예수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믿었던 유대교의 뿌리를 쳐내지 않았을 뿐, 사실상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낸 셈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바로, 야훼라고 알려진 신과 예수 사이의 차이가 된다.
 
사실 성경을 좀 읽어보면,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인간과 매우 비슷한 성격을 가진 존재이다. 비록 천지를 창조하고 전지전능한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 매우 불합리한 상황이다.
 
감정은 원래 죽음, 즉 두려움을 기반으로 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영생을 하고 절대로 죽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정이란 도구를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감정을 통해 끝없이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이때 이성은 그것을 좀 더 잘해내는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전지전능한 신이 감정을 갖는다는 설정은 일단 시작부터 실패다. 감정은 필멸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 말이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야훼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 말한 분이다. 여기에서, '무조건적' 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이 글의 주제인 '절대적' 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무조건적인 사랑은, 절대적 선함과 가치의 다른 말이 된다.
 
그래서 예수는 인격을 가진 신인 야훼를 훌쩍 뛰어 넘는다. 한때 기독교에서는 야훼와 예수는 둘 모두를 신으로 할 수 없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둘 중 예수가 더 신에 가깝다. 물론 삼위일체 설을 만들어 낸 기독교 쪽 입장은 이 말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절대적 사랑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표현되곤 한다. 이 말은 그래서 나름 일리가 있다. 신이 아니면 누가 인간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말한 것의 포인트를 놓쳤다. 왜냐하면 결국 예수의 말을 듣는 사람 자체가 바로 한계를 가진 일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결코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물론 천국과 지옥은 현세를 사는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은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결과여야만 한다. 절대로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
 
예수가 말한 것은 오직 절대적 사랑뿐이다. 그것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것을 실현하기가 불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신이다 라고 확정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예수는 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신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예수조차도 신의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유대교의 신을 대상으로 신이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것은 아마도 거의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진실이고, 중요한 포인트로 다시 이동해보자. 그것은 바로 예수가 말한 절대적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이 절대적 가치이고 절대적 선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는 종교인이라면,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에 가고 싶어서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런 목적 없이 선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뭐라고 해도, 깃털만큼의 이득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선한 행동은 절대적 선이 아닌, 상대적 선이 된다. 즉, 인간 수준의 선함이 되는 것이다. 오직 이득과 손해를 초월하는 선한 행동만이 진정한 의미의 선이 된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면, 인간의 범주를 넘어 서야 한다. 하지만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냉정하게 말하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결국 지옥에 가야 한다. 물론 지옥이 있다면 말이다.
 

당연하게도, 이 글을 읽은 어떤 기독교인은 이 글 전체가 헛소리라고 말 할 것이다. 그런 것은 별로 상관없다. 지난 번 글에서 썼다시피 종교는 과학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믿음이다. 따라서 각자 기준에 맞게 믿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맞는다고 남들에게 강요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 글은 믿으라고 하는 글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생각의 단초가 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은, 절대적 선함이나 가치는 인간의 판단 기준점에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과, 만약 천국에 가고자 해서 종교를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이미 선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이제 두 번째 종교인 불교를 보자. 불교의 특징은 바로 신의 존재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불교인들은 사실상 그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이 존재를 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사실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깨달은 자' 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깨달은 자' 의 인도 식 표현인 '붓다' 의 다른 발음이다. 즉, 불교에서 신처럼 모시고 있는 존재가 바로 깨달은 자이다. 고대 인도의 한 왕국에서 태어난 부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결국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설법했다.
 
그리고 부처는 자비를 말씀했다. 사실 여기에서 예수와 부처가 온전히 만난다. 이 자비는 사랑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즉, 부처 역시도 절대적 사랑에 대해 말씀한 것이다.
 
단지 부처는 유대교의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예수처럼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인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인도의 방식대로 신을 정의했다. 아무튼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전혀 다른 종교처럼 보이는 기독교와 불교는 사실상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란 점이다. 하지만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인간들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설령 이런 식으로 풀어 쓰고 있는 나 자신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이론적으로만 설명할 뿐이다.
 
인간 중 과연 누가 절대적 사랑을 할 능력이 되겠는가?
 
아무튼 이 두 종교 모두 절대적 가치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방식의 차이가 있어서 가능성은 불교가 좀 더 높아 보인다. 사실 기독교엔 그것에 대한 훈련 계획이 매우 부족하다. 이것은 아마도 유대교에서 출발한 종교가 가진 한계점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가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에서 태어났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슬람교가 그런 형국이긴 하다. 그들은 마호메트를 예수의 역할로 본다. 하지만 개인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이슬람교에 대해서 설명할 처지는 안 된다.
 
이제 세 번째로 인도의 종교에 대해서 설명해보도록 하자. 사실 인도의 종교는 힌두교로 알려져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도의 종교는 사실 좀 많이 모호하다.
 
그럼에도 인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인도를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전 국민 모두가 신을 믿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그들의 전통 신의 숫자는 무척 많으며 거기에 따른 신화나 구전되는 이야기도 무척 많다.
 
하지만 이 역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더 이상 설명하긴 힘들다.
 
아무튼 인도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실 부처는 인도가 가진 전통적 종교관에 부합하는 존재이다. 즉, 인도의 종교 그 자체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이 딱히 어떤 경전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명확한 신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더라고 그렇다. 그들은 평생 동안 신을 찾아 헤맨다.
 
불교를 믿는 분들은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실 부처는 인도의 종교를 기반으로 해서 깨달음을 얻는 분이다. 그런 사람은 부처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현세에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정리하고, 자신들도 경험하면서 그 내용을 경전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경전들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불교라는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원래 인도의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에서도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도의 종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게 윤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윤회는 깨닫지 못한 자가 겪는 과정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깨달음을 얻는 오랜 과정 속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제대로 이행해내지 못하면 모든 기억을 잃은 해 또 다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신의 영역인 셈이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도 절대적 자비를 행하고자, 이 땅으로 돌아온다. 다른 이들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서 그렇다.
 
아무튼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아주 다양한데,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 바로 요가와 명상이다. 인도에서 요가와 명상이 시작된 것은 우연함이 아니다. 비록 대중들에게 퍼지면서 그 원래 목적이 꼬여서 그렇지, 요가는 원래 몸매관리 용도가 아니고, 명상은 원래 마음 다스리기나 혹은 불면증 해소법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훨씬 많은 종류의 종교가 있을 테지만, 지식의 한계는 여기까지라서 더 이상 설명하긴 힘들다. 아무튼 중요한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기준을 벗어난 절대적 선함과 가치는 당연하게 신의 경지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과거엔 그것을 이뤄낸 존재들이 있었다. 그러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런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아 들었더라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두 편에 걸친 글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적 실체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얼마나 강하고 절대적으로 믿든 간에 상관없이 그것은 절대적 선이나 가치 혹은 진리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직 각자에게만 상대적으로 옳은 것이다.
 
이것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상관없다는 말도 된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믿는 종교가 가진 진짜 의미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리도 기도하는 대상이 말씀하신 진정한 뜻을 전혀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신을 포함한 그분들께서 말씀 하신 것은 단 하나뿐이다.
 
'절대적 사랑, 자비, 선함, 가치, 진리'
 
이것을 얻기 위해서 평생 동안 노력하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있긴 하겠지만, 그리 많지는 않을 듯 하다. 다들 경전 해석에 빠져있고, 기복에 빠져있으며, 천국에 가는 것에 빠져있다.
 
이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바로 기복이다. 왜냐하면 복을 비는 행위는 당연히 자신의 이득을 바라는 것이고, 이득은 반드시 다른 존재의 손해를 일으킨다.
 
자식의 대학 입시 합격을 바라는 부모의 기도는, 다른 가정의 자녀가 떨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돈을 벌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누군가 돈을 잃길 바라는 기도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너무도 당연하게 한다.
 
심지어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조차도 다 이뤄지면, 이 땅의 그 많은 의사와 간호사와 병원과 약국과 보험업체와 의료보험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망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기도라고 해도 그것이 이뤄지면 손해 보는 사람은 반드시 나오게 된다.
 
그 바램이 그리 크지 않다고 해서, 남에게 큰 손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면, 더 크게 바라는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바라지 않을 수 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을까?
 
종교를 가지고 삶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가지고 싶다면, 이것부터 변화해야 한다. 절대적 진리를 찾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노력할 때, 그나마 종교를 가진 쥐꼬리만한 가치라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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