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선한 것과 악한 것

아이루다 2015. 12. 15. 17:53

 
스스로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우리나라와 일본간의 축구 경기나 혹은 야구 경기를 관람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우리나라를 응원하게 된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자국 개최라는 최고의 지원을 받은 국가대표팀이었지만, 그들이 이뤄낸 성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그 동안 단 한차례도 조별리그조차 통과하지 못했던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고, 8강, 4강까지 연속으로 나갔으니 말이다.
 
이것과 비슷하게 우리는 온몸에 검댕이를 칠한 채, 군데군데 털을 거슬린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나오고 있는 소방수가 찍힌 사진 한 장에도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이런 크거나 작은 감동들은 불현듯 우리들 자신이 단지 이득만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언제나 이기적인 존재만은 아닐 것이란 희망을 품게 해준다. 실제로도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득 공식대로만 행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동정심이나 마음아픔이나 공감을 통해 받은 감정적 영향으로 인해 명백하게 손해 보는 짓을 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좋은 특징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나보다는 우리라는 감정을 주게 만드는 많은 것들을 좋은 것이라고 정해둔 편이다. 편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그 좋은 것들이라도 사람마다, 입장마다, 나이, 성별, 국적,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들을 시대를 초월하고 국경과 피부색을 초월해 인류 보편적 가치로 인정되고 있다.
 
거기엔 사랑을 포함해서 용기, 인내, 정의, 희생, 우정, 배려, 공감, 이타심 등의 좋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별하게 이상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 가치들이 가진 의미를 부정하긴 힘들다.
 
그리고 이와 반대의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보다는 나를 위한 것들로써 비겁함, 괴롭힘, 폭력, 잔인함, 고통, 배신, 이기심 등등 우리가 악한 것이라고 정한 것들도 있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개념들은 각각 선과 악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선과 악이 혼재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수 많은 사람을 죽이는 영화도 있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무리한 시도를 하다가 다수의 동료를 잃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악한 의도임에도 불구하고 선한 결과를 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언젠가 과거로 돌아가서 어린 나이의 히틀러를 죽을 수 있으면, 그를 죽이겠는가 에 대한 설문을 본 기억이 있다. 이 설문의 결과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죽여야 한다고 답을 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반대했을 것이다.
 
사실 히틀러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어린 나이의 히틀러를 죽어야 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히틀러는 평범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을 수도 있다. 사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아이의 생명을 뺏는 것이 선한 일이 되긴 힘들 것이다. 그 아이가 악마가 아닌 이상 말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는 한 명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영화 '버티컬 리미트' 역시도 마찬가지다. 높은 산에 갇힌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한 구조대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사실 살인에 가까운 시도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는 이런 희생을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가치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 가치가 얼마나 가치 있을까 는 사실 좀 의문이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하는 그 모든 가치들도 일단 살아야 의미가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서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는 분들도 있으니, 이것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이 선과 악의 불명확한 모호함은 사실 많은 곳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는 각자의 옳음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한쪽이 명백히 잘못한 것으로 보여도, 그 잘못된 쪽은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늘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보편성에 입각한 기계적 판단을 하는 방법을 쓴다. 그것이 바로 법이다.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뺏는 것은 범죄이다. 하지만 살인자의 손에서 총을 뺏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다. 이 두 경우 모두 남의 물건을 뺏는다는 행위는 동일하지만, 의도와 목적 그리고 그것으로 야기되는 결과에 따라서 다르게 판단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늘 그렇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세상은 이럴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어떤 절대적 기준점을 가질 수는 없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왜 우리 인간들에게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 수 없을까?
 
물론 과거에 그랬던 적은 있었다. 중세 유럽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그것을 담당했지만, 지금은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다. 과거 많은 나라에서는 왕의 말이 곧 절대적 진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모든 절대적 진리를 주장했던 시대는 쇠퇴했고, 이제는 모두 상대적 진리만이 존재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선하고 좋은 것으로 정의했던 수 많은 가치들 역시도 상대적으로만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역시 다시 의문이 일어난다. 사랑과 용기 그리고 희생과 같은 것들이 어떻게 상대적으로만 옳을 수 밖에 없을까?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이 세상에 누가 사랑을 나쁘고 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그럴까?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사랑은 좋고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나를 배신하고 떠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배신자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도 좋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배신이며, 상처이며, 치가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미는 감정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오직 불륜일 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 것을 허락도 없이 남에게 주면 그때는 그것은 도둑질이 된다. 설령 그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줘서 내 것을 가져다 줬더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주면 줬지 그 사람이 줄 권리는 없다. 물론 내가 줄 가능성도 없더라도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모든 것은 사실 내 이득이나 손해와 별다른 관련이 없을 때만 한해서 인간답게 판단된다. 하지만 내 이득과 손해와 관련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나마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더욱 큰 가치를 갖게 되지만, 반대로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게 되면,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을 넘어서 악한 짓이 된다. 내 돈을 훔쳐서 불쌍한 사람을 도우면 그것은 범죄인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가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해서 왜 절대적 기준점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정확히 이해가 간다.
 
영화 '마션' 에서 보면, 화성에서 표류한 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수십 억 달러의 비용이 소요된다. 단 한 명을 구출하기 위해서 든 비용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기꺼이 그것을 지지한다. 화성 탐사의 동료들은 수백 일의 임무 연장을 기꺼이 받아 들인다. 우주 개발에 있어서 경쟁자적 위치에 있는 중국 정부 조차도 그들이 비밀리에 가지고 있던 우주선을 빌려준다.
 
그리고 주인공은, 인간은 누구나 남을 돕기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맞다.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남을 돕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 각 집에 천 만원씩 기금을 요청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낼까?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선한 마음을 가졌지만, 그것이 단지 자신의 손해로 이어지지 않을 때 까지만 유지된다.
 
더해서 이 손해에 대한 마지노선 역시도 사람마다 천지차이가 난다. 누군가는 전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이 불쌍한 화성 표류인을 구출하길 바랄 것이고, 누군가는 10원을 내는 것조차 아까워할 것이다.
 
과거 오래 전 중국에 있었던 어떤 사람들은 '비록 세상을 구한다고 해도 깃털 하나 옮기는 수고스러움을 감당하지는 않겠다' 라는 뜻의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아무리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해도, 스스로 깃털 하나를 옮기는 일, 즉 거의 아무런 힘듦이 없는 일을 하더라도, 뭔가 일을 해야 한다면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잘못 해석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이 깃털은 누군 가에겐 10원이고 누군 가에겐 전 재산이 될 수 있을 차이만 있다. 물론 깃털은 좀 심하긴 했다.
 
이런 현실이 있더라도 우리 인간 그 자체의 한계점을 인정하고, 어느 날 우리 모두가 선함의 기준점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가정을 해보자.
 
인간 모두가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이, 화성에 표류한 누군가를 구출하기 위해서 천 만원을 기꺼이 내 놓는 세상 말이다.
 
이런 세상이 되었다면, 우리가 믿는 선한 것들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사실 그럴 것 같기도 하다.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모두 같은 대답을 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 문제로 서로 다투고 싸우다가 법원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우리는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없을까? 인간은 원래 이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는 충분히 가지면 많이 너그러워진다.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재산이 10조라면 천 만원 내놓는 것은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것이 문제다. 우리가 그럴게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불평등함이다. 그리고 불평등함에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이득이 가진 본질적 특징 때문이다. 손해가 없는 이득은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좀 더 극적으로 말하면, 이득은 손해의 다른 말이다. 누군가 돈을 벌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적절한 경로를 통해 돈을 벌었느냐 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돈이 줄어든 것이다.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일은 없다. 모든 이득은 손해를 기반으로 한다. 어떤 것이든 간에 마찬가지다. 심지어 스스로 자라는 작물들조차도 노동이라는 손해나 토질의 손상과 태양빛의 손실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외부 에너지를 통해 생존하고 있다. 그것을 엽록소를 통해서 스스로 만들든, 다른 동물을 잡아 먹어서 채우든 상관없이 그렇다. 생명체의 본질이 바로 끝없는 이득 추구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생명체가 그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에서 끝없는 손해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래도 오직 인간은 늘 이득만 누리고 전혀 손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생겨날 수 있다. 이 우주가 인간의 이득을 위해 희생되는 날도 올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막대한 이득을 챙기겠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살아갈 우주를 모두 희생시킨 후, 우리 자신도 파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이 매일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구에게 끝없이 손해를 끼치면서 우리의 이득을 끝없이 챙기고 있다. 이것은 지구가 망하는 순간 끝이 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안이 많다. 이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행성은 거의 무한대로 있기 때문이다.
 
대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우리 인간이 가진 한계는 명확하다. 누군가 이득을 얻으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있다. 지금은 인간 사회에서도 서로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주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은 빈민이 되고 있다. 이로 인해서 결국 빈부격차가 발생하며 불평등함이 만들어 진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서 이상한 것도 아니다. 결국 이 설명은 우리가 결코 평등해지지 못할 것이란 점을 의미하며, 더해서 모두가 천만 원을 낼 수 있더라도, 그 비용이 10억이 되고 100억이 되면 각자의 입장은 크게 달라질 것이란 점을 일깨워준다.
 
지금까지 좋고 선한 것들이 왜 절대화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인간에게 있어서 좋은 가치는 이득과 손해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하게 하며, 이득은 늘 손해를 발생시키므로, 누군가에게 선한 것은 누군 가에게는 반드시 악한 것이 되고 만다.

 

영화 '아바타' 에서 나온 자연 친화적인 나비족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빌려 온 것이라고 말이다. 이득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동한 것이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에너지는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열역학 제1법칙이다. 그러니 에너지를 얻은 누군가가 있다면, 반드시 에너지를 잃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과 악은 반드시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과학적 원리이다. 오직 이 원리 자체만 절대적이다.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에겐 정의의 실현이며 용기 있는 행동이지만, 히틀러를 포함한 그의 부하들에게 있어서는 비겁하고 야비하며,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될 행동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절대적 선함 혹은 진리를 가질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일까? 아니다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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