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연에 관한 보편 타당한 진리

아이루다 2015. 12. 14. 07:01

 
1687년 유럽 사회는 새롭게 발간된 어떤 책으로 인해 아주 커다란 반향이 되고 있었다. 그 책은 '프린키피아'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책을 쓴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풀어서 쓰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책은 3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 책은 많은 학생들이 기초 물리학 시간에 배우게 되는, 뉴턴의 운동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이론과 그것을 만족시키는 수학적 증명을 담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에드먼트 헬리라는 사람은 이 책을 기반으로 해서 어떤 혜성의 다음 방문 주기를 예측했고, 그 결과는 맞았으며, 그래서 그 혜성은 그 유명한 헬리혜성이란 이름을 갖게 된 유명한 일화도 있다.
 
기본적으로 프린키피아는 자연과학 법칙을 다룬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진 의미는 단지 과학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나, 당시에는 그다지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우리가 속한 거대한 우주가 몇 가지 단순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지구에 있는 한 그루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와 태양이 지구를 잡아 당기는 힘이 동일한 원리로 인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그 두 가지가 사실은 같은 원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되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너무도 당연해서 모르면 바보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얼음과 물 그리고 수증기를 각각 접했을 때, 이것이 사실은 동일한 물질의 온도에 따른 상변화라는 것을 추측해 낼 수 있었을까?
 
즉,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물이라는 물질이 단지 온도의 변화라는 단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완전히 다른 물질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아무튼 이 복잡해 보이는 세상이 단순한 몇 개의 공식으로 지배되는 세상일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면에서 이 책이 가진 진정한 의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는 말로써, 우주가 지구를 주변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매일 스스로 돌고 있다는, 말 그대로 관점의 변화를 뜻하는 말이다.
 
이것도 역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하고 쉬울 것 같지만, 우리가 매일 바라보는 밤하늘을 보면서 우리가 스스로 돌고 있는지, 아니면 별들이 우리를 돌고 있는지 제대로 알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멈춰진 기차에 타고 있을 때, 갑자기 창 밖에 다른 기차가 움직이고, 몸에 아무런 진동이 없다면, 당연히 자신이 탄 기차가 아닌 상대 기차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상대 기차가 아닌, 자신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뜻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학은 이후 상대성이론을 거치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그것에 관한 절대적 시점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우리에게 절대적이란 말은 사실은 불가능한 단어가 되어 버린 셈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에 오면, 세상은 이미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는 확률에 지배되고 있다.
 
분야는 다르지만, 또 한 권의 유명한 책이 있다. 그것은 프린키피아 만큼이나 중요한 찰스 다윈이 저술한 '종의 기원' 이란 책이다. 물론 이 책은 프린키피아보다 훨씬 더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생명의 탄생에 대한, 그 전까지 알려진 종교적 믿음에 대립되고 또한 실제적 증거보다는 다수의 정황적 증거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프린키피아가 자연과학에 대한 보편적 법칙을 서술했다면, 종의 기원은 인간을 포함한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기원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 이 복잡해 보이는 세상이 사실상 단순하게 몇 가지 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전체적인 내용들이 가진 의미는 사실 꽤나 심각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자부하는 인간에 대한 특별함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천동설에 비해서 지동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특별한 장소인, 지구의 특별함을 없애 버렸다. 지구는 그저 태양의 주위를 도는 흔한 행성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 역시도 신의 피조물로써 만물의 영장이란 지위에서, 수십 억년에 걸쳐서 변화에 적응해 오다 보니 우연이 고도로 발달된 지능을 갖게 된 존재로,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격이 떨어졌다. 결국 인간 역시도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흔한 법칙에 지배를 받는 존재라고 정의된 것이다.
 
그리고 그 법칙은 바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자라서 죽는다는 것이다. 더해서 중간에 성이 다른 존재를 찾아서 짝을 맺고 후손을 키운다. 또한 가능하다면 이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중이다.
 
이제 좀 더 기술이 발전한 우리는 외계의 생명체를 찾아 다니고 있다. 그리고 이 넓은 우주에 오직 인간만이 지적 생명체가 아닐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요즘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이것을 오랫동안 부정해오던 카톨릭에서 조차도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런 변화는 우리 인간이 지지해 온 오래된 전통적 가치관에 대해 조차도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극히 소수의 의견이지만 말이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가치 있다고 믿는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거기엔 신뢰, 사랑, 배려, 정의, 용기 등등 우리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특별하게 좋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조차도 보편 타당한 법칙들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된다.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대단하지만, 사실은 그냥 이 자연계의 많은 동물들에서 나타나는 흔한 현상이다. 즉, 어떤 면에서 보면 그냥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인 셈이다.
 
모든 인간들의 행위는 생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는 살고자 해서 하는 일이다. 심지어 자살조차도 살기 위해서 한다. 이 역설은 웃기는 말 같지만 실제로 사실이다.
 
우리는 살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에 절망해서 스스로 죽어 버린다. 인간이 자살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지금 자신이 불행한지도 모르고, 내일도 오늘과 똑같이 불행할 것이란 것을 모른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우리 인간은 비록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고 살긴 하지만, 사실 그것에 대한 절대적 증명은 해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과거에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었고,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가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믿는 분들도 꽤나 된다.
 
하지만 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 인간만이 특별하고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만이 특별하다고 믿기엔 너무도 많은 과학적 사실들이 밝혀졌다.

 

그리고 우리는 참 큰 착각을 하나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존재하는 것과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좀 어이없는 생각이다. 신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특별함과 깊게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왜 이 우주를 만든 신과 인간의 특별함이 그토록 강한 연계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둘을 하나로 묶어서 커다란 혼란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품은, 신에 대한 거대한 욕심이다.
 
현재까지 과학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 그 어떤 정의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은 미확정인 명제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다르다. 과학은 인간이 이 지구 상의 생명체 중에서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말을 부정하는 많은 실제적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증거가 없다로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왜 그렇게 특별해야 할까? 이것은 너무도 인간 위주의 이기적인 해석이다. 왜 우리는 돌고래보다 가치가 있어야 할까? 단지 지능이 높다는 이유로 그래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모르지만, 우리가 미래의 어느날 우리보다 훨씬 진화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해서 그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신이 선택한 피조물이라고 우길 때, 우리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종교는 과학과 다툴 이유가 없다고 본다. 종교의 본질은 믿음이지 과학이 아니다. 소수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꾸 종교의 절대성을 위해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이보다 쓸데없는 짓도 없다. 

 

종교가 제 역할만 한다면, 인류가 아무리 높은 지식을 쌓아도 종교는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의 존재적 본질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달에 가고, 화성을 탐사 중이며, 100억년이 넘은 거리에 있는 별을 관측하고 있으며, 우리 몸을 모두 해부하고 각 기관의 명칭과 작용에 대해서 알지만, 아직까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또한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예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부터 전혀 인식되지도 못하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당장에만 봐도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알아낼 수 있는 우주는, 전체 우주의 4%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이 거대한 우주를 보고 숨이 막힐듯한 감동을 느끼고, 그 거대함에 말문이 막히지만, 그것은 진짜 우주의 겨우 4%에 해당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전혀 모르는 우주가 96% 존재한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타당한 가정이다.
 
또한 단일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가 아니라, 다중 우주를 뜻하는 멀티버스에 대한 상상도 하고 있다. 즉, 과학자들은 아예 이런 우주 자체가 무한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신은 존재할 수도 있다. 물론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우주가 누군가의 커다란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다. 혹은 완전히 우연하게 만들어진 결과물일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우리가 신을 발견했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믿는 그런 신은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은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다윈과 아인슈타인을 통해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뤘지만, 또한 이런 보편 타당한 자연법칙을 접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 인간의 본질에 대한 좀 더 깊은 의문과 사고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 이것들은 과학이지만 철학이기도 하다.
 
그리고 양자역학에 가면 더욱 더 그 상황이 복잡해진다. 사실 양자역학에 나오는 수 많은 가정들은 동양철학에서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것들과 겹친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과학을 연구하다가 홀연히 철학자로 변하기도 한다.
 
미래엔 또 어떤 천재들이 우리가 속한 이 세상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예상 가능한 것 하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은 결코 상상조차 못할 것이란 점이다. 마치 원시인들이 얼음과 물과 수증기를 차례로 봤지만, 그것이 사실은 서로 같은 물질이란 것을 상상 못하듯 말이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그것에 대한 진리는 점점 더 단순화 될 것이란 점이다. 이 복잡하고 다양한 우주가 몇 개의 힘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이 복잡하고 다양한 지구 위의 생명체들이 단순하게 유전자의 전달과 환경에 따른 적응이라는 단순한 방향성으로 인해 진화를 해 온 결과임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론이다.
 
우리 인간은 각자 많이 복잡해 보이지만, 우리의 삶의 원리는 무척 단순하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기에, 다들 오늘도 그렇게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의 가장 기초적인 목표는 바로 생존이다. 우리가 아무리 비싼 집, 비싼 옷, 비싼 밥을 경험해도 생존하고 싶다는 본능에서 단 한 걸음도 바뀐 것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강한 권력을 가졌고, 존경 받는 명예를 누리며,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 인사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모두 생존에 대한 본능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불합리한 존재가 되고 만다. 단지 살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것들이 마치 별도의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경조차도 생존 본능의 숨겨진 욕구이다. 우리는 존경 받을 때, 좀 더 오래 살 수 있다.
 
어떤 분들은 이런 결론에 대해서 강한 반발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은 그런 단순함보다도 좀 더 가치 있어야 한다고 믿거나, 스스로가 단지 그런 단순한 작동 원리에 의해서 말 그대로 '동작' 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에고는 그런 흔하고 평범한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런데 우리가 특별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특별해야 더 이득을 얻는다. 또한 그래야 더 오래 산다. 결국 그러다 보니 싸움이 난다. 자신은 특별한데, 평범한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를 침범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어오면, 누구나 그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응징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땅이나 집은 없었다. 지구는 결코 우리들에게 땅을 임대해주지 않았다. 코끼리와 고래와 참새가 우리에게 땅을 임대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인간들끼리 약속을 하고 금을 그어 놓은 것뿐이다.
 
우리는 미래에 달과 화성에도 금을 긋고 인간의 땅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권리일 뿐이다. 사실상 아무런 권리도 없는 인간들이 서로에게 권리를 인정해주고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사실 우리는 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단지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동물들의 목숨을 뺏는다. 매일 죽는 닭의 소와 돼지의 숫자는 과연 몇 마리나 될까?
 
우리는 과연 그렇게만 많은 동물들의 목숨을 뺏으면서 살아갈 권리를 가진 존재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그 답이 무엇이든 간에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단지 그것이 누구나 인정하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점만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집에 들어 온 도둑은 잡아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한 생명체로써 생존을 연장하기 위한 자기 보호 본능을 위한 반응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말 그래도 진정한 의미의 '코페르니쿠스 적 사고 전환' 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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