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이성과 합리의 한계점

아이루다 2015. 12. 9. 10:21

 
한 명의 환경 지킴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수 많은 산업 현장에 가서 동료들과 시위를 하고 농성을 했다. 그는 자신의 몸조차 아끼지 않고 많은 장소에서 활동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그의 병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다. 그리고 그러던 중, 환경 지킴이의 아내가 문병을 온다. 그리고 그녀는 누워있는 남편에게 애원을 한다. 이제 좀 제발 소중한 가정을 지켜달라고 말이다.
 
사실 이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넓은 땅에 있는 수 많은 장소에 시위를 하러 다녀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 문제는 고사하고 두 사람간에 낳은 아이와 놀아 줄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것뿐이랴. 그는 일반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많은 것들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쇼핑을 하거나, 가끔 근사한 저녁을 먹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런 행위들은 시간을 내기도 힘들지만, 사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는 울면서 애원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자신은 아이를 사랑하고 아내도 사랑한다. 하지만 왜 다른 아이들보다 자신의 아이를 더 사랑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는 정말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답을 한다. 그 아이가 바로 당신의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것 이외에 더 어떤 이유가 더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아내의 대답은 누구나 수긍할만한 이야기이지만, 남자는 다시 반문한다. 단지 DNA를 절반만큼 물려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아이가 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을 합리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아이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강변한다.
 
아내는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을 향해 원망의 눈물을 흘리지만, 남자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옆에서 보고 있던 의사들은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뭔가 답답한 눈빛을 교환한다.
 
사실 이 남자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내의 말이 더 맞는다고 믿을 것이다. 세상에 도대체 남의 아이와 자신의 아이가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말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의 말처럼 단지 DNA를 물려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아이보다 자신의 아이가 더 소중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하기도 힘들다. 그를 설득하는 힘은 오직 감정적인 접근밖에 없다. 그가 신봉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의 대화를 통해서는 설득이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여기에서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은 쉽지 않다. 관점에 따라서 남자의 말도 맞고, 여자의 말도 맞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여자에게 한 손을 들어주고 싶긴 하지만 말이다.
 
남자의 말처럼 인간은 끝없이 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그 피해는 지금의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대가 받게 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사이에 낳은 자신의 자식을 남몰라라 하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여자의 말도 맞다.
 
이 이야기는 미드, 하우스의 한 에피소드 중 소개된 내용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
 
아무런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뜻 이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남자의 말은 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고찰을 해보면, 남자의 말은 사실 매우 좁은 우물 안 개구리의 이론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말이 옳다는 뜻도 아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 둘의 말 모두 틀렸을 수 있다.
 
일단 여자의 문제는 인류 보편적인 감정에 대한 것이니 딱히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고 이제는 이 이상한 생각을 가진 남자의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인류는 환경을 파괴하고 있으니, 그 행위를 막아야 하는 것은 맞다. 우리는 엄청난 환경 파괴를 하고 있다. 더해서 인류로 인해 멸종되고 있는 동식물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악영향은 사실 답이 없다. 따라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미래를 살아가야 할 우리의 후손들 그리고 우리를 먹여 살려주는 자연을 보호하고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명제는 반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이 말에 문제가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그 남자 스스로 말했던 내용에 담겨 있다. 그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인류의 미래, 즉 인간 종의 영속성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남자의 말은 틀렸다. 왜 틀렸는지 알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우리 인간은 영원히 존재해야 할까?
 
질문은 던져졌지만, 이것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이 영속해야 할 개연성은 없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고, 지난날 수 많은 생명체들이 그랬던 언제든 멸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물론 인간의 영속성과 상관없이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그럴 수 있었다고 남자의 말이 바뀔 수 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
 
도대체 지구라는 행성은 왜 이 우주에서 영속적으로 존재해야 할까?
 
물론 지구라는 행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명의 축제는 정말로 대단해서, 바라보고 있자면 도대체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아주 작은 벌레부터 커다란 코끼리와 거대한 나무에 이르기까지, 지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감동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절대적 의미를 포함하지는 못한다.
 
물론 종교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종교는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종교 자체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은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바라봐야 한다. 또한 지구라는 행성이 가진 그 어떤 의미도 다 내려놓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남자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반박하는데 있어서 그가 사용한 논리를 이용할 수 있다. 우리 지구는 왜 특별해야 할까? 그 위에서 살아가는 수 많은 생명체들은 왜 특별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 인간은 왜 특별해야 할까?
 
이 질문엔 답이 없다. 그래서 남자의 주장은 우물 안 개구리의 주장이다.
 
더해서 이 남자는 스스로 피할 수 있었던 문제까지 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그런 삶을 선택했다면, 왜 결혼을 했느냐에 대한 것이다. 물론 결혼을 한 후, 갑자기 환경문제에 급격한 관심이 생겨서 그랬다면 약간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명백한 한계가 있다.
 
아무튼 결혼 전부터 그랬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또한 결혼 후 그랬다고 해도 먼저 이혼을 했어야 했다. 그 사람이 뭐라고 주장하든 간에 상관없이 결혼 자체는 사회적 계약이다. 결혼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서로 함께하는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암묵적 약속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것을 저버렸다.
 
가족을 부양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했다. 이것이 이 남자의 가장 큰 문제이다.
 
이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중요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성' 과 '합리'가 가진 맹점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꽤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들을 하면서, 타인들의 비 이성적이고 비 합리적인 선택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한다. 하지만 비판의 칼날은 늘 밖으로만 향할 뿐, 스스로에게 겨눠지지 못한다. 즉, 우리는 타인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익숙할 뿐,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가진 가장 비 이성적이고 비 합리적인 면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이 언뜻 보기엔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듯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대로 그 본질을 따져보면 그렇지 않는 데는 그럴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 존재가 아닌, 감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본질은 감정이고 이성은 단지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즉, 우리가 그리도 신뢰하는 이성이란 능력은 사실 허구에 가깝다.
 
수천 년 된 나무를 벌목하는 현장이나, 숲의 동물들이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죽어가는 현실, 마구 오염되는 대기와 강 등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안타까움과 분노이다. 즉, 우리는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감정으로 느낀다.
 
그런데 우리는 이후 자신이 느낌 감정에 대해서 추가적인 작업을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느낀 감정의 정당성을 얻고자 노력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순간부터 이성적인 능력이 필요해진다. 그것은 책을 찾아보고, 이론을 습득하며 그렇게 얻어진 지식들을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자신이 느낀 감정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 받는 과정이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감정으로 반응한 후, 그 감정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붙인다. 특히나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화난 것에 대한 이유를 찾는 일이다. 그래야 자신이 화를 낸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성적 능력으로 정보를 찾아낼 때, 사실 우리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것에 대해 분노를 했고, 그 분노가 정당하고자 한다면 그것에 합당한 정보만을 따로 골라서 접할 수 있다. 즉, 환경문제에 대해 어떤 나쁜 영향을 알고자 했다면, 수 많은 지식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환경론자들의 활동에 대한 문제를 찾아내고자 했다면, 또한 수 많은 지식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세상은 수 많은 지식이 존재하고, 그 각각의 지식은 모두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사건을 바라본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장점을 찾길 바라면 장점을 찾고, 단점을 찾길 바라면 단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들을 찾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심지어 누가 봐도 명백한 범죄에도 장점은 존재한다. 범죄자가 없다면 경찰들은 다 굶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 이유와 같다. 청소부들의 일자리는 버려진 쓰레기를 통해 유지가 된다. 사람들이 병에 걸려야 의사들도 먹고 산다. 불이 나야 소방관도 먹고 산다.
 
결국 이 남자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느낀 분노의 감정을 지식의 습득이라는 이성적 능력을 통해 합리화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것을 맹신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남자에게 이런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이 남자는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했다가 주장해서는 안되었다. 이 남자는 그저 자신이 그것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고, 삶의 이유를 찾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환경운동은 그에게 있어서 옮음을 증명하는 정의가 아니라 그의 분노를 정당화 시킬 수 있는 목적이자 결국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이 한 편의 에피소드는, 최종적으로 이 남자가 평소에 30종의 살충제를 사용한다고 해서 결코 옆에 두려고 하지 않은 화원의 꽃을 단 한 번 샀다가 장미의 가시에 찔려서 병에 걸린 것으로 판명되면서 끝이 난다.
 
인생에서 단 한 차례 자신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아내를 달리기 위해서 산 장미꽃으로부터 원인불명의 병을 얻은 것이다. 
 
결국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간다. 그는 자유로워졌다. 이젠 마음껏 환경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단, 고단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그를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점만 빼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남자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여자가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둘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여자는 그저 감정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고, 다른 사람들 역시도 감정적으로 동조했을 뿐이다. 상식적이라고 해서 옳을 수는 없다. 이런 사고방식 체계 역시도 우리가 가진 문제점 중 하나이다.

 

반대 되는 두 명제가 있을 때, 한쪽이 틀리다고 해서 반대가 옳은 것은 아니다. 둘 모두 틀릴 수도 있고, 둘 모두 맞을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대립되는 의견은 단지 입장이 다른 것 뿐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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