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논리의 문제점

아이루다 2015. 11. 9. 14:15

 
삼단 논법이란 것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한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먹어야 한다.

 
꽤나 명료한 논법이다. 그리고 이 삼단 논법은 무려 2500년 전쯤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그뿐만 아니라 논리학이란 학문 자체를 출발시키기도 했다. 사실 그는 더 많은 일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얼마 전, 세계 철학자들이 뽑은, 서양 철학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1위로 뽑힌 전력도 있다.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는 논리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형이상학, 시학, 생물학, 동물학, 수사학, 정치학까지 폭넓은 영역에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왜 논리가 중요할까?
 
우리가 요즘 흔히 쓰는 컴퓨터는 내부적으로 0과 1을 이용해서 모든 정보를 처리한다. 이것은 전등이 꺼진 상태와 켜진 상태, 두 가지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다. 
 
정보는 인간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이며,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정보를 다루는 법을 개선해왔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논리학이다. 우리는 논리를 통해 정보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 가능한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다.
 
머리 속에 있는 기억은 정보이긴 하지만, 남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정보가 아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은 꼭 말이 아니라, 몸짓, 손짓도 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문자를 통해서도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사실 말보다 문자가 훨씬 더 중요한데, 말은 사라지지만, 문자는 그 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있고, 또한 대대로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논리를 통해서 정보를 표현할까?
 
쉽게 예를 들어서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어느 방에 들어갔더니 전등이 켜져 있다는 정보가 있다. 혹은 꺼져있다는 정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쉽게 표현할 수 있다.
 
어떤 방의 전등은 꺼져있다. 혹은 켜져 있다. 컴퓨터로 이것을 표현하는 것은 무척 쉽다. 꺼진 전등을 켜려면 0을 1로 바뀌면 되고, 켜진 전등을 끄려면 1을 0으로 바꾸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상황을 보자. 어떤 방에 들어갔더니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측정 불가능한 추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방에 들어간 것이 명확하고, 그 안에 여자인 소녀가 있는 것도 명확하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표현이 추가되면서 애매함이 발생한다.
 
물론 아름답다는 것에 대한 부분은 보편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100명 중 80명이 아름답다고 말하면, 보통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등이 켜졌거나 꺼졌거나 하는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아름답다는 말은  0과 1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방에 들어갔다,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가 아름답다 라는 세 가지 정보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할까? 혹시 젊은 남자들이라면, 아름답다 에 가장 가치를 두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개의 정보 중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는 뜻이 된다. 또한 다른 정보도 그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 방에 들어갔다 온 후, 그 방에 갔더니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방에 갔더니, 왠 남자가 있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일까?
 
일단 그렇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실은 남자였는데, 분장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여자일수도 있고, 남자일수도 있다.
 
이 사실은 정보에 대한 또 한가지 특징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정보가 유효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다. 젊은이는 50년의 시간이 흐르면, 늙은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 만약 그 사람이 진짜 소녀이고 정말로 아름다웠다고 해도, 50년 후에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가면, 늙은 할머니를 보게 될 뿐이다.
 
우리는 말을 하고, 글을 써서 정보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논리가 필요하다. 전등이 켜져 있다거나 꺼져있다는 표현을 써야지, 전등이 눈부시다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 전등이 눈부시다는 말은 나름대로 말은 되지만, 그것이 아름다워서 눈이 부신지, 그냥 눈이 아파서 눈이 부신지 정확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정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컴퓨터의 세상과 같은 방식이 필요하다. 즉, 0과 1과 같은 식으로 표현해야 정확하다. 사실 요즘 디지털 시대가 바로 정보를 그렇게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없을까? 과연 이런 식으로 정보를 표현하게 되면, 아름답다 와 같은 정보는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옳을까? 0과 1 사이에 있는 무한대의 소수점 숫자들은 과연 어떻게 취급될까?
 
아이가 처음으로 차를 타고 나들이를 갔다 온 후, 정말로 멀리 갔다 왔다고 자랑하면서 그 정보를 전달해줄 때, 과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이에겐 엄청난 거리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매일 출퇴근 하는 거리 정도인데 말이다.
 
논리는 세상을 명확하게 표현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하지만 논리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쉽도록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최대한 단순화 시켜서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용하는 논리가 가진 가장 치명적 오류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능력으로 여긴다. 그래서 각자가 모두 어떻게 하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설명할 수 있을지를 가지고 고민하게 된다. 또한 그래서 무엇인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비가 내리는 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또한 구름이 생성되는 원리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 비가 올지를 예측하는 것은 단지 확률로만 가능하다. 즉,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알긴 알지만,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논리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논리이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수학을 최고의 언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수학은 정말로 논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가 가진 한계는 명확하다. 논리는 무한대로 연결된 세상을 각자 끊어서 보게 만든다. 그래서 전등은 켜지거나 꺼지는 것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전등에는 0볼트의 전기가 흐르거나 1볼트의 전기가 흐르거나 220볼트의 전기가 흐를 뿐이다. 단지 우리는 220볼트 정도의 전기가 흐를 때 그것을 등이 켜졌다고 표현하고 그 밑의 전기가 흐를 땐 동일하게 꺼졌다고 한다.


우리는 선과 악을 나누지만, 선과 악 사이엔 무수히 많은 차선과 차악이 존재한다. 하지만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들은 선과 악만으로 나눈다. 내 편이 아니면 적 편인 것이다. 도대체 중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수가 모일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모두 각자 입장이 달라서 도대체 각자의 입장을 모두 반영해서 통일된 의견을 만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 경우 한 가지 명제를 정해놓고는 찬성이냐 반대이냐 만 묻는다. 사실 선거가 그런 일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그 명제를 적극 찬성하건, 암묵적 찬성을 하거나, 따로 다른 의견이 없어서 찬성 하거나, 반대 의견이 너무 싫어서 찬성할 수 있는데, 일단 찬성 편에 들어오면, 그런 차이는 다 무시가 되고, 그냥 찬성인 사람으로 취급이 된다.
 
앞에서 말했던 어떤 소녀가 아름답다라는 의견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한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누군가는 볼만한 외모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우냐 않냐 만으로 판단해주길 바란다.
 
논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개괄적으로 설명해줄 수는 있지만, 있는 그래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세상은 원래 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는 왜 하늘이 파란지, 왜 구름은 흐르는지, 왜 비가 오는지는 모두 설명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왜 아름다운지, 구름은 왜 저렇게 다양하게 생겼는지, 비가 내리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왜 마음 한 구석에 설명하기 힘든 슬픔이 지나가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이 말은 이런 상황을 예측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는 논리적 관점에서는 결코 이 세상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정보라는 것 자체의 신뢰 역시도 그다지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을 미세하거나 혹은 거대하게 오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가 남들과 소통하는 법은 오직 논리적인 표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끝없이 싸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늘이 파란 이유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있지만, 하늘을 보고 기분이 좋은 사람이, 하늘을 보면 기분이 나쁜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만약 하게 되면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상대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한다. 좋아하고 싫어하고라는 감정을 논리라는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그 말도 안되는 노력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도 동일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기반으로 유추하여 결론을 낸다. 그래서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의도가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등등을 생각하고 결정한다.

 

그래서 연예인을 보고서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싫어하는 이유도 설명한다. 그리고 그 둘이 모이면 끝없는 논리 싸움을 한다. 아니, 자칭 의식적인 사람들이 나를 설득하려면 적어도 사실적 근거를 가져오라고 말한다. 또한 논리적 표현으로 나를 설득하라고 대 놓고 말한다. 누구를 좋아하는 이유을 설명하는데 사실에 근거한 논리적 설명을 원한다. 싫어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글 역시도 똑같다. 이 글은 나름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결국 이 글이 주장하는 바를 위해서 마음대로 논리를 가져다 쓰고 있다. 남들이 싸우는 이유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하고 있지만, 사실 싸우는 이유를 어떤 식으로든 이 글을 쓰는 사람이 믿고 싶은데로 주장하는 것 뿐이다.

 

사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가 저것 하나 뿐이겠는가? 어떤 연예인이 좋다, 싫다를 두고 싸울때는 그냥 상대에게 지기 싫어서, 그냥 상대가 싫어서, 그냥 그날 기분이 나빠서도 싸운다.

 

이미 감정은 싫고 좋고를 결정했는데, 그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니 온갖 논리를 자기가 편한대로 이용한다. 그러니 서로 같은 논리를 펴면서 서로를 공격한다. 서로 똑같이 다른 사람의 의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말은 논리적이지만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건 사용 가능하다.

 

정보 자체도 대략적인데, 정보를 접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도 편파적이다. 그 사람이 싫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린 이야기만 듣고, 그 사람이 좋다면 어딘가 기부를 했다는 한 훈훈한 미담만을 들으려 한다.
 
그리고도 자신이 내린 판단을 대단히 확고하게 믿는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흔들림 없이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싸움도 불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이란 학문을 만들어 낸 이후, 우리 인류는 지속적으로 정보를 단순화 시켜왔다. 우리는 많은 복잡한 것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찬성과 반대를 묻는 방식처럼 해왔다. 그래서 또한 많은 진보를 이뤄내기도 했다. 우리는 지구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은 지구에서는 진실이다. 화성에서도 진실이다. 하지만 금성에 가면 거짓말이 된다. 금성에서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 또한 하루가 일년보다 길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토록 정보를 맹신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정보화라는 것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다. 세상은 감정으로 경험하는데,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감정은 단위적으로 분리가 불가능한데, 이성적으로 정보화 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꾸 무리한 시도를 한다. 우리는 분노를 단위로 만들어서 1단계 분노, 2단계 분노라는 개념을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가진 정보는 무한대로 이어진 선에 어떤 단위를 매긴 것과 같다. 선과 악, 동과 서, 어둠과 밝음 등등 우리는 많은 것을 양쪽 끝에 두고 구분을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낮과 밤,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분노, 이런 것들은 마치 모두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결코 구분될 수 없다.
 
9월 10일을 보통 가을이라고 부르지만, 가을의 정의를 정확히 내릴 수 없다. 또한 그날 이상하게 무척 더워서 한여름의 기온이 나타났다면, 과연 그 날을 가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계절은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또한 한 해가 지나가는 12월 31일과 1월 1일은 사실 단 하루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 인간이 편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정보화 시켰기 때문에 한 해가 지난 것이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그 어떤 것도 정확할 수 없다. 모든 정보는 대략적이다. 부분적이다. 하지만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구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아니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분리하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훈련을 했다. 그래서 이미 그런 능력은 잃어버렸다.
 
그래도 이 사실을 안다면, 한 가지는 피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믿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문제점이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정보라도 해도, 절대로 완전히 믿지 않는 태도도 가질 수 있다. 자신이 믿는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너무도 확실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또한 그럴 수 있다면, 많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싸우는 일도 줄어들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정보를 접하고 해석한 것이다. 그것도 부정확한 정보를 편파적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들의 태도는 당연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가 별로 관심이 없다면, 그것을 싫어하는 것으로만 판단하지도 않게 된다. 그 사람은 그냥 관심이 없거나,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다. 우리가 배운 논리적 이분법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가지고도 싸운다. 사실 우리는 둘 모두를 한다. 누가 언제나 먹기 위해서만 살고, 살기 위해서만 먹겠는가? 어떤 것을 싫어하지만 특정 조건하에서는 좋아할 때도 있고, 정말로 좋아하는 것도 싫을 때가 있다.
 
우리는 늘 변하고, 늘 움직인다. 우리의 감정과 느낌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우리는 이미 한번 분석해서 정리한 것들은 절대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한번 싫은 것은 절대로 싫으며, 그것을 싫다고 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보는 늘 대략적이고 편협적으로 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실로 믿는 것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사실 이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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