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욕망의 그릇

아이루다 2015. 10. 25. 07:55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주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그것은 '가지고 싶은 것 대비 현재 가진 것들' 이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싶은 것’으로 나누면, 그것을 통해 개인별 행복 값을 추정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분모인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분자인 가진 것이 적을수록 그 결과값은 줄어들어서 불행해진다. 반대로 분모인 가지고 싶은 것이 적을수록, 분자인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해진다.
 
여기에서 이미 가진 것은 보통 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통해 얻어진 것들이다. 그것이 외모이든, 지적 능력이든, 신체적 능력, 성격, 남들과 다른 조금 특별한 능력이든 간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유용한 능력들은 우리가 좀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런 개인별 능력들은 이미 어느 정도 타고나기 때문에, 능력 자체도 역시 가지고 싶다고 해도 가질 수 없는 대상이 되어 버린다. 즉, 우리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다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개인별 능력부터 원한다고 해서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결국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명백하게 한계가 존재한다.
 
반면에 행복을 결정하는 또 한 요소, 가지고 싶은 것은 끝없이 변화한다. 우리는 보통 가지고 싶은 것을 '욕망' 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욕망은 매일 다르고, 매년 다르며, 나이 대에 따라, 성별에 따라, 이웃집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 직장 내 동료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학교 동창들의 성공에 따라, 어떤 친구들을 사귀냐에 따라, 어느 교회를 다니느냐에 따라, 친척 중 잘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끝없이 바뀌어 간다.
 
그러다 보니, 행복을 결정하는 양대 요소, 즉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고정된 상태에서 가지고 싶은 것만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얼마나 행복한지가 끊임없이 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좋지 않는 소식은, 보통 어떤 것들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일반적으로 커지는 방향으로만 진행되며, 이렇게 한번이라도 커진 욕망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집의 크기만 생각해도 쉽게 이해가 간다. 일단 30평 집에 살았던 사람은 15평 집으로 이사가는 것이 무척 힘들다. 하지만 45평 집으로 이사하는 것은 쉽다. 그리고 30평에서 45평으로 이사간 사람은 몇 년도 되지 않아서 다시 30평으로 가기가 무척 힘들어 진다.
 
이런 개인별 가지고 싶은 것들의 크기를 이해가 쉽게 '욕망의 그릇'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의 그릇은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며, 또한 그 그릇이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도 모두 다르다.
 
즉, 앞에서 설명했던, 갖고 싶은 것은 그릇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고, 가지고 있는 것은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에 해당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그릇을 얼마나 채우고 있느냐에 따라 행복함이 좌우된다. 이때는 절대량이 아니라 채운 비율, 즉 다른 말로 하면 퍼센티지로 결정된다.
 
아마도 이 그릇을 100% 이상 넘치게 채운 사람은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 것이고, 반대로 텅텅 비어서 겨우 1%나 채운 사람은 심각하게 불행한 상태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고 싶다면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 그릇의 크기를 줄이든, 내용물을 최대한 채우든 해야 한다. 하지만 내용물을 채우는 것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그릇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더 당연한 결정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그릇의 크기를 줄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끝없이 늘려오기만 했을 뿐, 줄여보려고 노력은 해본적이 없다.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 그릇이 늘어나게 되면, 그것을 줄이려고 하는게 아니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채우려고 노력하면서 살 뿐이다. 하지만 그릇이 끝없이 늘어나기에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도 행복도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하는데도,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스스로 행복하고 싶어하면서도 반대로 그릇의 크기를 늘려서 행복도를 떨어뜨리는 짓을 할까?
 
우리가 그릇의 크기를 끝없이 늘리는 이유는 사실 조금 당황스럽다. 그것은 서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극 때문이다. 우리는 남들에게 자극 받고, 자신도 남들에게 자극을 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릇의 크기를 늘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설득 당하기도 한다.
 
즉, 소중한 자신을 위해서라면 바로 이 그릇 크기를 늘리는 일이라고 믿는다. 또한 너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릇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해준다. 너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말이다.

 

심지어 이미 자신의 작은 그릇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을 보면, 조언을 한답시고 그릇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조언을 하는 사람의 심리는 그냥 그 행복에 질투를 느끼는 것 뿐이다. 그래서 너도 나처럼 그릇의 크기를 늘려서 불행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언을 가장해서 내뱉는 말일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너무도 소중하기에 늘 좀 더 나은 것을 원한다. 우리는 늘 좀 더 좋은 것을 원한다. 우리는 늘 좀 더 대접받길 바라고, 좀 더 괜찮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사실 그래서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욕망을 부추김 당하고, 그렇게 생겨난 욕망을 타인에게 부추긴다. 서로가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면서 결국엔 서로가 불행해진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유는 매우 아이러니 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기에 그렇게 결정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우리 인간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될까? 사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또한 우리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가 왜 욕망의 크기를 늘릴 수 밖에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아주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고, 결혼을 해서 자녀를 키우고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돈은 풍족하진 못해도 나름대로 괜찮게 살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동창회에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최근 주식으로 큰 돈을 번 친구를 만났다.
 
그는 부러움 반, 호기심 반으로 친구에게 주식에 대해 물어봤고, 친구는 최근 큰 돈을 번 행운에 고취되어 호기롭게 자신이 아는 주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아주 즐겁게 설명해줬다.
 
이 사람은 원래 주식이라면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동창회에 갔다 온 후로 자신이 비상금으로 챙겨 둔 한 100만원 정도를 아내 몰래 주식 계좌를 만들어서, 친구가 오를 것이라고 장담한 한 종목을 샀다.
 
그리고 그는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그 주식이 200만원 가치가 된 것을 목격했다. 큰 돈은 아니지만, 돈이 두 배가 된 것이다. 그는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행복해졌다.
 
그런데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 가지 못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만약 백만 원이 아니라, 1억을 투자했으면 2억이 되었을 것이란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후회가 밀려왔다. 왜 백만 원어치만 샀을까 하는 후회다. 또한 이 주식이 다시 또 올라 300만원의 가치가 되었을 때, 또 다시 100만원을 벌었기 때문에 처음처럼 행복해야 하는데, 좋긴 하지만 처음과 같진 못했다.
 
분명히 100만원을 벌어서 행복해야 하는데, 겨우 100만원이란 생각과 함께, 좀 더 과감하게 투자하지 못한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자책까지 들었다. 그는 돈을 번 것이 좋으면서도 자신의 소심함에 후회를 했다.
 
이 사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물론 운이 좋아서 산 주식이 계속 올랐다면 큰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이런 예상을 한다. 결국 100만원도 다 까먹고, 아마도 빚까지 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그릇의 크기를 늘리는 것은 그 순간은 매우 극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큰 행복감을 느낄 때, 자신도 모르게 그릇의 크기를 늘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늘어나버린다. 그리고 보통 그것은 어떤 것이든지 처음으로 경험하는 순간이 된다.
 
처음 데이트를 하는 순간, 처음 해외 여행을 하는 순간,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사는 순간, 처음 주식으로 돈을 버는 순간, 이런 식으로 처음으로 무엇인가 큰 행복감을 맛보는 순간은 사실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이란 아주 대단하다.
 
만약 아까 100만원을 투자한 사람이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 돈을 다 까먹고 손해만 봤다면, 100만원을 번 행복감은 맛보지 못했더라도, 아마도 다시는 주식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었기 때문에 행복했지만, 그 순간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늘려버렸다.
 
이런 식으로 어떤 행복감들은 기존에 자신이 가진 그릇의 크기에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때는 마치 강제로 그릇의 크기가 늘어나듯, 늘어나 버리고 만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한번 늘어난 그릇의 크기는 잘 줄지 않는다는 것과, 그 크기를 늘려놨던 그 행복감은 오래 지나지 않아 익숙한 것, 늘 상 있는 것, 흔한 것, 심지어 지겨운 것으로까지 변해간다.
 
그나마 이런 문제를 피해가는 방법은, 그 행복을 만들어 준 행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즉, 주식을 해서 돈을 벌었다면, 그 돈은 자신의 능력이나 판단이 아닌 오직 행운으로만 얻은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틀린 말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성공시키는 것에는 능력보다는 운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은 그럴 수 있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노력했다면, 자신이 얻는 모든 결과는 모두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받아들이다. 즉,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생겨난, 가진 것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갖지 못하면 안 되는 것들이 된다. 즉, 작은 그릇을 처음 가득 채웠던 행복은, 당연히 가져야 할 것들이 되면서 그릇 자체가 커져버려서, 이젠 갖지 못하면 그 내용의 비율이 줄어들고, 열심히 노력해서 가져야 원래 비율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되고 만다.
 
원래 그릇을 50% 채우고 살았던 사람이, 큰 행운을 통해 100%가 되었다가 다시 시간이 지나 서서히 채운 비율이 50%로 줄었다면, 이때 내용물만 줄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럴 경우 보통은 줄어든 내용물보다도 그릇의 크기가 커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그래서 이제 50%라도 유지하려면 과거에 비해서 더 노력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노력의 결과는 행복하지만, 노력의 과정은 보통 행복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긴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런 극적인 변화의 증거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그때도 모두 우리는 우리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아주 푼돈에 행복했고, 아이스크림 하나에, 얻어먹는 팥 빵 하나에 그리도 좋아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거의 비슷했다. 우리가 가진 그릇은 너무도 작아서 인형이나 로봇 하나만 가져도 가득 찼다.
 
하지만 그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 현재 우리는 인형을 100개를 가져도, 로봇을 1000개 가져도 그것을 채우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관심이 달라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단지 더 돈이 많이 드는 것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도 인형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행복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어느 날 나는 어른이 되었으니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가진 인형과 로봇을 쓰레기 통에 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똑같은 존재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릇의 크기는 자신도 모르게 커져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좀처럼 그릇을 채우기가 힘들다. 특히 그 그릇의 크기를 스스로 늘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극에 의해서 늘렸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주식을 하는 것도 자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친구의 성공에 자극 받아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 의해 자극되어 얻어진 행복들은 모두 그것을 얻는 순간은 좋지만, 그릇의 크기를 늘려놓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더해서 이것은 쉼 없이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가 그릇의 크기를 관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한가롭게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반대 방향으로 허둥지둥 뛰는 상황과 같다. 우리는 이때 사람들이 왜 뛰는지 생각하기 보다는, 같이 뛰게 된다.
 
그러다가 우리는 그래도 생각을 해서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마라톤이 열리는 길에 들어섰음을 알고 빠져나오면 좋지만, 생각하지 않고 두려움에 빠져 있으면 계속 뛰어야 한다.
 
물론 그러다가 1등을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평생 같은 그릇을 유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실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처지에 맞게 적당한 그릇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릇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을 스스로 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그것을 줄이거나 늘리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으면 가장 좋다.
 
물론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늘리긴 하지만 줄이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리는 순간을 극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한번 늘리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에 대한 투자인 셈이다.
 
처음 한 번해서 그것이 좋았던 사람은 결코 한번으로 그것을 끝낼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반복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다시는 첫 번째 순간만큼의 행복은 결코 맛보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았던 시절 그것을 넘치도록 가득 찬 행복감을 더 이상은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때 부작용으로 늘어나버린 그릇은, 남은 삶 동안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슬픈 미래를 의미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 불행을 경험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릇의 크기가 줄기도 한다는 점이다. 거의 죽기 직전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다시 잠시나마 행복해지는 이유다. 그들은 죽음이란 거대한 불행함 앞에서 타인의 자극으로 인해 커진 그릇의 크기를 급속도로 줄인다.

 

왜냐하면 죽음은 결코 공감될 수 없는 불행이며, 그래서 그 죽음의 불행에 대한 타인들의 조언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때 우리는 평생 동안 들어왔던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조언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단지 불행함에 대한 조언보다 행복에 대한 조언은 달콤하기에 스스로 그것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은 것 뿐이다. 불행이든, 행복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오직 그 당사자에게만 한정된다. 그리고 그외의 모든 존재는 엄밀히 말해서 제 삼자에 불과하다.

 

죽음 앞에 선 어떤 사람은, 죽음이란 불행은 오직 자신 혼자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불행의 반대인 행복 역시도 온전히 혼자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 후로 잠시 동안이나 혹은 평생 행복하게 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행운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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